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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시집]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단테, 2018. 3. 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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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에선 뜻하지 않은 "미투" 열풍으로 더 유명세를 타버린 시인의 이십년전 시집을 구태여 찾아 읽었다. 기실 그의 데뷔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지겹게 또 한차례 더 꺼내는 일보단 오히려 낫겠지 싶어 고른 책.

사실 그의 '시풍'이랄까? 꽤나 잔뼈가 굵은 중견들의 문체와는 사뭇 다른 그의 시들이 누구 말대로는 참신하거나 조로증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구한텐 일견 에세이스트가 더 적합한 호칭이 아닐까도 싶을만큼 도도한 '일상'을 지녔다는 게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음... 아무래도 이는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저 '떠도는 소문' 같던, "이론과실천"을 통해서 처음 나왔던 마르크스의 <자본>을 공동번역하기도 한 인물이라는 사실이거나 또 SNS의 시대를 살면서 더러는 위력적이기도 한 그의 '아젠다'들을 뽑아낸 기질 등에 기인한 인상적 측면인지도 모른다.)

시들이 풀어낸 각 행과 연들을, 또 당시의 주류로까지 검토된 적 있었던 산문적 형태들은 온전히 시인만의 그것이라기보단 하나의 '전형적'인 양식 정도일 수도 있겠다. 다만 그 안에서 오롯이 '일상화'된 언어는 김수영 시인의 그것들처럼 충분히 '시적'이거나, 아니면 "자아의 분열이 낳은 파편화" 즉 일종의 '해체' 작업처럼 느껴질 법도 하다는 생각. - 이게 곧 그 세기말 시단의 주된 풍경이자 '대세'였음도 분명히 기억할만한 모습이다.

다만, 1990년대의 시단을 놓고 말할 때는 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즉 모더니즘은 이상 이후로 및/또는 황지우와 장정일을 충분히 '넘어섰다'고 말할 수작들이 제대로 보여지지 않았다는 점. 또 리얼리즘 역시 김수영과 신동엽의 주제의식으로부터 별반 더 깊은 고민들을 생산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자성이거나 짐짓 과장된 억측부터가 과연 무리일 뿐일까? 짚아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물론 황지우의 정반대편에서 혜성같이 도드라진 박노해라는 상징적 연대기도 늘상 존재해왔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최영미 시인도 그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겠다. 그의 첫 시집이 이들에 대한 아련한 슬픔들을 남루한 추억으로 애써 사양해가며 새로운 '도전'을 쌓기 위한 첫 출발이었고 딱 그만큼이 그 어떤 '시적' 성취였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다음 시대의 정신들이 앞서 거론한 '전범'들보다도 오히려 그들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조류들, 즉 '개인화'되고 '일상화'된 채 <시대>와 <사회>는 거세된 듯한, 이른바 "죽은 문학"의 영향권 안에서만 확대와 심화의 흐름을 형성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 것 같다. (심지어는 신춘문예를 싹쓸이하다시피 한 당시의 서울예전과 지금의 한예종을 거치면서 어쩜 문단도 이젠 일종의 '산업화'가 된 건 아닐까도 감히 제기해볼 법한 문제이니까... '죽은 사상'의 주검들 위로 무럭무럭 피어난 건 오로지 '레토릭' 뿐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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