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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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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의 첫 시집, 때때로 이는 '신화'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극복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손찌검을 당하기도 할 법한 시집. 신경림의 시들은 때때로 너무 촌스럽거나 또는 너무 낯익은 풍경들이라 오히려 '향토'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창비의 첫 시집이 이 작품이어서인지 소위 '리얼리즘' 시들이 갖는 일련의 수사학은 결코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점 또한 에둘러 짚어둔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 옛날 위대한 시인들 중 이상과 윤동주가 아닌 김소월을 끄집어내게 된다. 가장 아이러니한 일은 이 방면의 최고봉은 다름 아닌 서정주였다는 사실이고.)
창비가 문지보다 훨씬 앞선 시집들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 첫 시집의 출간연도가 1973년(!)이라는 사실에서다. 실로 격세지감을 느낄만큼 현 시대의 문학이 문지를 중심으로 '시의 왕국'을 건설했다면, 오히려 창비는 시집들보다 소설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고 볼 법도 한 사실이겠다. (물론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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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빛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이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컬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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