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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지] 001. 황동규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단테, 2017. 7. 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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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1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2 -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문학",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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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데뷔작 한편을 먼저 읽어둔다.

 

이 시집이 벌써 등단 20년차의 다섯번째 시집이었다는 사실도 좀 놀랍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처음 나온 시집은 이 대가의 작품들이다.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 장미희씨를 본 적 있었는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은 인물이 바로 황동규 시인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이산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신작시집 "미시령 큰바람"을 신문에서 읽던 시절이었는데) 그 미시령을 수해 뒤에야 처음 가보게 된 기분은 또 어땠을까... 세차게 내리는 눈발 속에서 어두컴컴한 미시령 너머의 풍경들을 바라본 겨울, 그 풍경 역시도 어쩌면 내 기억 중 일부일 텐데. 굉장히 아련한 기억이 된 듯한 이 기분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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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질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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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애정의 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착각의 도도 높아진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애정을 쏟았으나 상대방이 몰라주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동기야 어떻든 일단 있는 그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 다른 사물에로 확대된다.어두운 건물들 뒤로 희끗희끗 눈을 쓴 채 석양빛을 받고 있는 북악(北岳)의 아름다움이 새로 마음에 안겨온다. 자신도 모르게 주위의 풍경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의 풍경과 비슷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까치가 그저 하나의 새가 아니라 귀족적인 옷을 입고 있는 새라는 것도 발견하게도 되고, 늘 무심히 지나치던 여자가 화장이나 옷차림에 과장이 없는, 다시 말해 낭비가 없는 여자라는 사실도 새로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사는 일이 바빠진다. 바빠짐이야말로 살맛 있는 삶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 http://moonji.com/book/4325

    

 

※ 또 다른 블로그 중에서, http://blog.naver.com/elqpdltm48/220051935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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