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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이후, 새로 나온 시집들을 찾다가 이준규의 "네모"를 읽었다.
마치 단문들과도 같은 시들, 시의 숙명과도 같을 형식에 대한 조롱일까? 아니면 포기일까?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시"들은 각양각색인 반면에, 시인의 시들은 하나같이 단문들로만 채워진다. 획일적이다. 의도적인 획일성. 시대를 상징하듯 또는 비웃듯 시인은 이렇게 시를 포기한다.
트위터를 보다가, 어쩌면 시인의 글들이 곧 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한편의 단문들은 마치 140자 제한 속의 시편들처럼 넘실댄다. 각각의 파편화된 낱말들은 결코 질서 따위를 거부한다. 몸짓. 그래, 어쩌면 시인은 이들 속에서 하나의 몸짓 몸짓 같은 걸 발견하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짓, 형식을 거부한 본능이요 일회성 창작행위가 아닐까. 기록이 아닌 휘발성 때문에 이를 '글'로는 읽어내지 못한 것들을 한데 모아 시라는 이름을 붙인 시인의 용기는 그래서 타당한가. 모르겠구나.
다만, 형식을 비껴선 자리에는 앙상한 내용들만 남았다. 형식적 실험 차원에서 기껏 구현해낸 정서, 메시지가 고작 실연 따위의 것이거나 또 때로는 더 초라한 신파에 그칠 우려도 분명히 있겠다. 필히 남다른 필력을 가졌음에도 그 능력이 더 한층 빛을 보려면 시인한테 필요한 건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독서는 아닐까도 싶은데...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추측이거나 오만한 질타일 뿐이지만,
P.S. 기술이 문화를 낳는가? 애플의 시리즈들이 한참을 그랬듯이, SMS와의 연계 탓에 제한적 요소를 태생적으로 안고 나온 트위터 서비스가 오히려 빛나는 상상력의 공간으로도 '리포지셔닝'한 부분에 대해 강력한 힌트를 제공해주는 <미덕> 또한 함께 존재한다. 일종의 '벤치마킹' 대상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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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말 ::
"지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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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얼굴
얼굴이 있다. 도마 위의 칼 위의 햇빛. 소리가 있다. 하늘이 있고 나비 같은, 아니, 씨 같은 새가 하나 둘 셋 넷 지나갔다. 그는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옮겨가며 허기를 느꼈다.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꺾이고 거기로 다가가지 못했다. 얼굴이 있었다. 얼굴은 동그랗지 않았다. 나는 그날 버스 안에 있었다.
얼굴
너의 얼굴이 흐른다. 너의 얼굴이 비낀다. 너의 거울. 너의 얼굴. 나는 너의 얼굴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낙엽이 흐를 때. 새가 솟을 때.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을 만졌다.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 안에 있었다. 아무것도 지우지 못했다. 너는 언제나 잊히는 얼굴 하나였다. 나는 그날 너의 얼굴을 걸었다. 바람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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