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웅, "天路歷程, 혹은" (문학과지성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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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8년 만의 두번째 묶음이다. 그러나 묶는 일만이 능사가 아님을 더 명념한다. '天路歷程, 혹은' 연작과 씨름한 지난 여름의 무더위는 거의 시를 쓸 수 없었던 더욱 견딜 수 없는 무더움과 추위 속의 몇몇 해 전체와 맞바꿔도 좋으리라. 하지만 나태가 진정한 휴식은 아니라는 체험도 비싼 것이다.
I부는 의도적 배열, II부는 대개 제작순, 무시해도 좋지만 참고 삼아 밝힌다.
1988. 10. 김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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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이 시집은 대학 도서관에서 몇달째 파묻혀 지내는 동안, 인적도 뜸한 복사기 앞에서 시집을 연신 넘겨가며 카피를 하던 추억들이 먼저 앞선다. 그해 겨울이 아마도 1994년쯤이었을까?... "창비" 영인본 중에서 마종하 시인의 "노예의 詩" 연작을 카피로 만들던 그때, 세상은 YS 정권 시절로 엄혹하였고 내 기말고사 시즌은 형의 득달같은 기별로 인한 처참한 성적표였고 술자리마다 자학을 해대며 연신 머리를 벽에 찧던 내 걱정을 해주던 동기들이 있었고, 그래도 여전히 고독했으며 여전히 '꿈'? 그런 걸 꿈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벌써 하루 하루가 일년 같았던 그 시절들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세월 속에 묻혀, 어느덧 웃음 속에 꺼낼만한 '추억'이 돼버렸다는 건 실로 기적에 가깝다.
오랜만에 김정웅 시집을 꺼내며 대뜸 그의 안부가 궁금했다. 인터넷을 뒤적여볼까 싶다가, 그냥 관뒀다. 시인의 직업 내지는 '생계형' 부업이 무엇이든간에 뭐가 중요하랴...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법 같다. 그게 맞는 말 같다.
가장 유명한, 가장 인상적인 詩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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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天路歷程), 혹은
- 서시(序詩)
지난 날 내 그대를
자욱한 눈물 없이 사랑함은
거처 없이 떠돌던 내 가난한 영혼이
살[肉]을 빌어서 그런 저런
세(貰)들어 살던 집들같이
땀냄새 진한 까닭일지나
이제, 내 사랑은
겨드랑이 가볍고
살을 버려서 살을 얻음 같음이니
그 사이
모나고 답답했던 단칸방을 벗어나
욕심줄인 은단(銀丹)알 같은 집 한 채 찾아
아담히 홀로 먼저 이사함 같음이니
그곳, 푸르고 단단한
둥근 청기와 가없는 담장 너머
아직 싹트지 않은 별들이
까마득히 박혀 숨쉬는 그런 곳
그대여,
내 나가는 곳 지금은 모를지나
어린 날, 수학여행 떠나기 전날 그 신새벽처럼
그렇게 뜬 눈으로 가슴 설레이게 하는 곳,
유성(流星)이 옛 할아버지 흰 턱수염처럼
바람 없이도 이따금 길게 흩날리는
잊혔던 고향 동구(洞口) 밖 아득한 천공(天空),
기쁜 그곳, 너희들과 영 이별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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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했지, "이별이 아니라"고... 그만큼 이별에 중독된 삶에게 이별만큼 치명적인 게 또 있으랴만,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모든 '이별'에 대해 끝끝내 이를 거부하고픈 모종의 충동 또는 꿈 같은 게 있었을 게다. 적어도 '이별'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토록 메마른 가슴 속 무덤덤히 이를 지켜보기만 할 뿐인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토록 고색창연한 또는 처연한 문체를 굳이 꺼내 느닷없이 현재화하려는 걸까? 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21세기에...
낡은 詩 한편이 새로운 시대의 서정이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 그리움과 추억들이 미래를 밝혀줄 거름 정도는 될 것이기에.
그리고
나머지 한편의 詩,
※ 함께 읽기, 방법적 원리로서의 수다 - 김정웅의 <천로역정, 혹은> / 김현
...
추억은 사랑처럼 눈 내리어
자정에 끓던 물
새벽에 잦아들고
빈 벌판에 거짓 사랑처럼
끝없이 흰 눈 내릴 때
잠들지 마라.
그대 영혼이 깊이 잠들 때
육신만이 거지처럼
불가로 모여든다.
보라.
흰 눈 속에 붉게 핀
꽃들의 온도,
쓰레기통 속에서
색종이꽃들 밤새 웃고
벨을 누르면 언제나
꿈처럼 울린다.
돌아보지 마라.
찬 눈 밑에선
찬 눈 밑에선
영하의 잘디잔 눈금들이
언 발가락을 비비고 있다.
한겨울 깊은 어둠을
자신의 체온만큼 조금씩 녹이며
이루지 못한 行을 다시 이루려고
깨알처럼 박혀 있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지 마라
추억은 사랑처럼 눈 내리어
그대를 잠재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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