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시선 310, 2009)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내 영혼의 방직소
길 건너 3층 내수전문의류업체
흰 백열등 아래 눈이 퍼렇게 언
파키스탄 노동자 몇이 입김 내뿜으며
직조기 따라 곱고 둥근
꿈의 원단을 나르고 있다
이제 그들이
내 영혼의 방직소를 대신 돌려주고 있는데
나는 얼마큼 걸어와 길 잃은 낙타인가
헝클어진 실타래, 올 풀린 영혼
잊고 싶었던 어떤 유령의 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김남주를 묻던 날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낭송을 듣고도 울지 않고
광주 톨게이트, 빛고을 시민들보다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섰던
백골단 장벽 보면서도 울지 않고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해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를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
촛불 연대기
미선이 효순이 때
처음 촛불을 들었다 화염병도 죽창도 아닌
연약한 촛불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싫었다
촛불의 열기를 모아 권력이 된 노무현은
부안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 2만이 사는 부안에
2만 5천의 공권력을 투입했다
미제국의 더러운 석유전쟁에
군대 파병을 결정했다 부안에서 여의도에서
다시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아야 했다
이듬해엔 WTO 각료회담 저지를 위한
한국투쟁단의 일원으로, 한 손엔 핵과
한 손엔 자유무역협정을 들고
전세계 인민의 목을 조르는 무장한 세계화를 막겠다고
태평양 건너 멕시코 깐꾼까지 원정투쟁을 갔다
그곳에서 '다운 다운 WTO'를 외치며 이경해 열사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
전세계 인민의 가슴들이 부르르 떨렸다
어떤 이는 회담이 열리는 컨벤션센터로 돌격했고
나는 커터기로 철책을 끊다 곤봉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저녁이면 촛불을 켰다
시시때때로 쏟아붓는 열대성 폭우 속에서
촛불 하나를 지키기 위해 두꺼비처럼 몸을 말았다
총구를 들이댄다 해도 꺼트릴 수 없는 증오의 촛불
가장 긴 촛불은 평택 대추리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800일 동안 촛불을 켰다
한반도는 동북아 전쟁기지가 아니라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다국적 전쟁기계들에게 내어줄 순 없다고
포클레인에 철거당하는 대추초교를 부여안고 울었다
700명이 지키는 대추초교를 감싸고
1만 5천의 군경이 몰려오던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손에 든 촛불을 놓고 죽봉을 들었다
이것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허공을 향해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추리에서 쫓겨나오자
한미FTA 떼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FTA는 일터 하나를 뺏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쌀과 영화와 의약품과 방송만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빼앗는 것이었다
경쟁력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는 말
경쟁력이 없는 대지는 대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싸움이 가물가물해질 때 허세욱 열사는
자신의 몸을 심지로 내놓았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양심을 끝까지 소진케 했다
그렇게 몇년 나는 지난 시절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촛불을 들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서성였다
촛불은 진화하면 화살촉이 되는 걸까
들불이 되는 걸까 때로는
백만 촛불로 광화문을 뒤덮어보기도 했지만
광장은 다시 차벽과 공권력의 폭력에 밀리고
나는 다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이 오른 구로역 CC카메라탑 아래에서
콜트, 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오른
양화대교 천변 고압송전탑 아래에서
다시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아래에서
순한 촛불 하나를 들고 있다
단 한번도
민중 무력 없이 세상이 바뀐 적은 없다고
청원으로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불붙는 심장의 열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끔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 몇방운 떨구며
순한 촛불 하나를
어두운 밤 보탠다
참, 좆같은 풍경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가을, 나무들에게
왜 내게냐고
하늘 향해 성토하듯
빈손 치켜든 나무야
다 떨구어버렸다고
슬퍼하지 말려무나
우리가 너와 같아
수없이 많은 얼굴들을
피눈물로 떨구며
예까지 왔단다
...
이 시대, 가장 '전투적'인 시인은 송경동 시인이다.
희망버스와 강정마을과 촛불집회와 온갖 "달려감"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한 시인은
급기야 얼마전에 국정원 부정선거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촛불집회 도중에 "달렸다"고 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그 시대의 가장 정확한 시각은 가장 소외받는 자들의 시각이다"라면
이 시대의 가장 순수하며 정확한 시각 역시 그의 시각이 아닐까? 그 되물음을 되풀이하는 요즘,
그의 시집을 꺼내 읽는다. 김수영문학상이 왜 그한테 수상소감을 묻지 않았는가를 되묻게 되는,
요즘, 이 좆같은 세월에 말이지...
...
...
:: 소개 ::
노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송경동 시인이 전하는 우리 기층민중의 고난의 역사!
<창비시선>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거리의 시인이라 불리며, 노동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온 송경동 시인은 현실의 구체성에 뿌리내린 생생하고 비범한 시적 인식으로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펼쳐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 용산참사 현장 등 야만적인 권력의 횡포가 벌어지는 곳에서 맨몸으로 저항하는 이들과 함께했던 시인이 전하는 현장감 살아있는 시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정신을 만나보자.
☞ 이 책에 담긴 시
석유
어려선 그 냄새가 그리 좋았다
모기를 죽이는 것도
뱃속 회충을 죽이는 것도 그였다
멋진 오토바이를 돌리고
삼륜차 바퀴를 돌리고
누런 녹을 지우고 재봉틀을 매끄럽게 하던
미끈하고 투명한 묘약
맹탕인 물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동동 뜨던 그 오만함도, 함부로 방치하면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리던 그 가벼움도 좋았다
알라딘의 램프 속에 담겨진 것은
필시 그일 거라 짐작하기도 했다
개똥이나 소똥이나 물레방아나
나무장작과 같은 신세에서 벗어나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기름때 전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도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저자 ::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 있다. 제12회 천상병 시문학상, 제6회 김진균 상, 제29회 신동엽 창작상을 수상했다.
:: 차례 ::
제1부
혜화경찰서에서
가두의 시
석유
오줌 누고 자!라는 말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똥통 같은 세상
무허가
첫 고료
이 삶의 고가에서 잊혀질까 두렵다
가리봉오거리 연가
마산항 새벽복국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
목수일 하면서는 즐거웠다
내 영혼의 방직소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
김남주를 묻던 날
미행자
제2부
어린 날의 궁전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우리들의 암송
당신의 운명
어이!
그해 겨울 돗곳
대마치 연가
재개발을 기다리는 까치들
그해 여름 장마는 길었다
돈
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
어떤 약
생태학습
제3부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안녕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너희는 고립되었다
꿈의 공장을 찾아서
멕시코, 깐꾼에서
별나라로 가신 택시운전사께
이 냉동고를 열어라
너는 누구에게 물어보았니
촛불 연대기
황새울 가는 길
제4부
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를 베어버리라
난지도 쓰레기꽃
참, 좃같은 풍경
주름
경계를 넘어
아직 오지 않은 말들
셔터가 내려진 날
삶이라는 광야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다
혁명
뇌파
수조 앞에서
가을, 나무들에게
도살장은 무죄다
당신은 누구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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