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테노트/문학노트

1960년 서울, 김수영, 1980년 광주, 황지우

단테, 2014. 6. 2. 23:23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

 

  

두번째 시집을 내며 

 

징검다리 - 돌 하나 (1983년), 돌 둘 (1985년)을 놓아 

내 갈 길을 만든다. 

이 길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이 길은 외로운가. 

위험한가. 

내 발목을 거는 세찬 물살, 이제 시가 나의 운명이라고 

말해야 하나. 

내가 던지는 이 고통스러운 돌이 너무 깊은 데 들어가 

발 디딜 곳이 없지나 않을지. 

 

1985년 초여름 

황지우 

   

     

...

   

  

:: 짧은 메모 :: 

  

  

역대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들 중에 가장 김수영을 닮은, 특히 그가 말한 '불온한 문학'에 근접한 황지우를 빼놓을 수가 없다. 2004년 탄핵정국 때, 또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던 그때가 생각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냈고, 또 이명박 정권 때 자리를 내놓고 지금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게 눈 속의 연꽃"이 발표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대개 엇비슷한 분위기를 지녔다. (물론 풀빛으로 기억하는 시집 "나는 너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위적이면서 또 가장 리얼함으로 기억한다.) 두번째 시집인 이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닐 성싶다. 

  

유월의 첫 시집이자 독서는 이렇듯 해서 또 황지우였다. 

- 시간은 또 하루를 흘러 자정에 임박해옴을 알리는 듯... 

  

     

...

  

    

...

  

   

- 목차 - 

 

  

두 번째 시집을 내며 


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 

14시 30분 현재 

꽃말 

1983년/말뚝이/발설 

뱀풀

「뱀풀」의 詩作 메모 

1960년 4월 19일 ·20일 ·21일광주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벽 3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아, 이게 뭐냐구요 

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상징도> 찾기 

오늘 오후 5시 30분 일제히 쥐(붉은글씨)를 잡읍시다 

버라이어티 쇼, 1984 

비 오는 날, 유년의 느티나무 

우리 아버지 

大正 15년 10월 11일, 동아일보 

無等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최남단의 자작나무 앞에서 

착지 

思春의 강가에서 

잠든 식구들을 보며 

소설, 이상한 전염병 

근황 

박쥐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桃花나무 아래 

닭장 

近作詩 「닭장」을 위한 詩作 메모 

아침 산 

나무는 단단하다 

또 근황 

아내의 편지 

밤 병원 

참꽃 

담양 

서울로 띄우는 엽서 한 잎 

잠자리야 잠자리야 

대밭에 드는 푸른 월색 

삶 

논 

그리움 

노숙 

水北을 떠나며 

大興寺 봄밤 

은하 속의 해동 전라남도, 해남 李吉南 씨 집 뜨락 

비닐 새 

그대, 부재를 위한 메모 

호박등 

종로, 어느 분식점에서 아우와 점심을 하며 

나의 누드 

윤상원 

들풀 

돌아온 4월 

어느 벗의 결혼식에 가서 

봄바다 

출가하는 새 


연보  

  

 

...

 

  

1960년 4월 19일 · 20일 · 20일, 광주 

  

   

 그날은 오후반이어서 오전 11시쯤 란도셀을 메고 등교하던 나는, 계림동 기차건널목을 돌아, 막 계림극장 앞을 지나갈 무렵이었지요. 나는 난데없이, 거리로 뛰어나온 수천 명의 광주고생· 광주상고생·사레지오고생들이 도열을 지으며 모자를 손아귀에 쥐고 번쩍 들며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며 광주중앙국민학교 쪽으로 움직이던 데모대에 휩쓸려 가고 있었지요.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턱에 수염난, 아저씨들 같은 고등학교 학생형님들이 목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목청껏,  


 이승만은 물러가라!

 자유당은 자폭하라! 


함성을 지르고, 연도의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학생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하던 것들이 그저 신이 나 대열 한가운데에 끼여, 국민학교 2학년 어린이의 작은 보폭으로 철없이 따라갔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만 8세 때, 영광스럽게도, 나중에 역사책에 나오는 그 현장에, 그 소요에, 그 혁명에 우연히, 있었지요. 말 탄 나폴레옹 그림이 그려진 나의 란도셀 속에는 국어책, 국어공책, 산수책, 산수공책, 자연책, 자연공책, 사회생활책, 사회생활공책, 음악책, 짝짝이, 병아리표 크레용, 도화지 2장, 필통, 자가 들어 있고 아침에 깎아 넣은 연필들이 화란 풍차 그림이 든 철갑 필통 속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지요. 나는 군대 담요색 당꼬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열이 동명도 광주형무소와 전남여고 사이에 흐르는 동문다리 개천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때였을 거예요. 히말라야 소나무숲으로 우거진 전남여고 앞에서 검정색 제복을 입은 일단의 순경아저씨들이 곤봉을 쓰윽 빼들고 대열 앞을 가로막자, 수천 명의 광주고생·광주상고생·사레지오고생들이 그 자리에서 너나없이 스크럼을 짜고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를 외치며 발을 맞추는 사이에, 나는 스크럼을 짜기엔 키가 너무나 작아서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했지요. 대열은 그대로 경찰 저지선을 밀어버렸지요. 나는 곤봉으로 맞아 이마에 피가 주르륵 흐르는데도 손으로 그것을 싸매고 교복 단추가 모조리 떨어져 나간 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광주고생·광주상고생·사레지오고생 들을 보았지요. 싸움은 어린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으나 어른들이 왜 싸우는지는 알지 못했지요, 전남여고의 프러시아식 지붕에서 놀던 비둘기떼가 일제히, 와다다닥 날개를 부채질하며 히말라야 소나무숲 위를 날아 갔지요. 교복 손목에 예쁜 흰 줄이 세 개 달리고 어깨등에 해군 수병들이 다는 것과 같은 마골러가 부착된 전남여고 누님들이 치마에 돌을 싸가지고 교문으로 쏟아져 나오니까, 광주고생·광주상고생·사레지오고생 들은 와아, 박수를 치고 전남여고만세 대한민국만세를 부르고, 어느새 전신전화국 쪽에는 경찰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소방차들이 속속들이 들이닥치고,  


               이승만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아, 당장 길을 비켜라!

               경찰도 우리 편에 서서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우자!


  고함이 깃발처럼 일고, 드디어 소방차에서 이쪽으로 물줄기가 머리 든 뱀처럼 뻗어 오고, 이쪽에선 그쪽으로 돌멩이가 운동회 보자기 던지기 할 때처럼 새까맣게 날아가고,


 나는 겁이 나서 뒷길로 줄행랑쳐서 학교로 들어갔지요. 교실은, 흡사 여름날 처마 밑으로 귀에 손고등을 만들어 소낙비 소리를 들을 때와 같이, 눈앞에서 막 떠나갈 듯했지요. 우리 반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가 본 것들을 늘어놓고, 평소에 자기 아버지가 검사라고 주변의 힘없는 우리들을 괄시하던 내 뒷자리의 임동현이란 놈도 신이 나서 자기집 장동 쪽에서 광주공고생·광주여고생·조대부고생 들이 소방차를 뺏어 타고 도청 쪽으로 진격하던 장면을 이야기하고, 우리들의 계집애 짝꿍들은 무섭다고 훌쩍훌쩍 짜고 있고, 임동현과 나는 이 겁쟁이들!을 한 번씩 쥐어박아 주고, 임동현은 책상 위에서, 나는 걸상에서 제자리 걸음으로 뛰면서 번갈아가며,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한참 까불고 있는데, 그때사 김현숙 담임 선생님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 한가운데 꼿꼿하게 세운 채 조용히, 조용히, 들어오대요.


 우리 반 아이들은 이쁜 김현숙 선생님을 따라, 칠면조 사육장 앞을 지나, 하얀 백엽상이 있는 교실 뒤뜰 화단으로 해서, 물 빠진 풀장을 끼고 후문으로 빠져나왔지요. 후문에 서서 김현숙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 가정통신 때까지 학교 나오지 마라고, 한눈 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고 그러시고, 후문에서 박소아과 의원이 있는 광주중앙국민학교 네거리까지 상가들도 모두 양철문이 닫혀져 있고, 거리에는 무슨 푸른 연기 같은 것이 자욱했지요. 우리들은 쿨럭쿨럭 기침에다 눈물 콧물 흘리고, 그러면서도 김현숙 담임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분단장 인솔하에 한 줄로 서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를 부르면서, 장난치면서, 그날 하교했지요.


 그날 저녁, 대인동 시장에서 돌아오신 우리 아버지는 학생놈들 때문에 굶어죽게 생겼다고 역정내시고, 우리 어머니는 학생들이 다치면 큰일이라고 걱정하셨지요. 우리 아버지는 김장철이면, 장성, 비아 쪽에서 무 배추를 실어다 시장에 넘기시고, 무안에서 고구마를 실어다 넘기시고, 봄 여름엔 여수에서 멸치 갈치를 떼어다 넘기시는 장사꾼이었고요, 우리 어머니는 집에서 학생들 하숙치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일찍 들어와 손발 씻고 제때 밥 딱 먹고 책상에 딱 앉는, 아랫방의 전남대 법대 다니는 화순 학생을 손가락질하면서, 저 친구는 데모도 안하나, 핀잔을 주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중학생인, 우리 집 장손 민수 형과 나를 방안에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놓고, 그래도 아직 안 들어온, 광주상고 3학년 다니는, 아랫방의 곡성 학생을 근심걱정하고 앉았고요.


 그날, 밤이 되도록 시내에선 함성이 그치질 않았어요. 마침내 도청 쪽에선가 충장로 쪽에선가 금남로 쪽에선가 연발이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온 것과 동시에,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마당으로 뛰어나오고, 우리 어머니는 형과 나에게, 이 호랭이 물어갈 놈들아 싸게 방으로 안 들어갈래, 소리 지르면서, 소리 지르면서도 앉았다 섰다 하시면서 가슴을 치고  


 오매, 어째야 쓰까 어째야 쓰까, 꽃 같은 우리 학생드을 - 


안절부절 못하고, 또다시 도청 쪽에선가 충장로 쪽에선가 금남로 쪽에선가, 


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 


그리고 함성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우리 식구들은 마루에서 보았어요. 내 가슴이 콩콩 뛰고 손이 떨리고 신나고 경이로운 그날 밤, 곡성 형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아랫방은 아까처럼 불 밝힌 채 조용했지요.


 그 다음날, 나는 봄볕을 받으며 혼자서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지요. 곡성서 형룡이 형님 어머니가 올라오시고, 우리 아버지는 형룡이 형님 어머니와 함께 시내 나가시고, 신문 배달 하고 돌아온 민수형이 어머니와 나를 앉혀놓고 시내 정황을 일러주대요. 파출소란 파출소는 모두 박살났대요. 민수형이 궁동으로 해서 체신청과 광주경찰서 사잇길을 가는데 일단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인 검은 지프차 위에 어떤 사람이 올라가, 전 서울신문이 아니라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하니까 그때야 시민들은 


 동아일보 만세! 민주주의 만세! 


를 외치며, 그 차량을 손으로 밀며, 도청 쪽으로 갔대요.


 그 다음 다음날, 아들 찾으러 올라오셨던 곡성 형님 어머님과 함께 우리 아버지가 다시 시내로 나가신 후, 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동네 아이들과 철도 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놀았지요. 우리들은 엊그제 들었던 총소리를 흉내내면서, 


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땅 


철도 저편 적이 죽고, 철도 이편 우리편도 죽고, 우리들은 고지를 서로 탈환했다고 아우성치고, 서로 이겼다고 만세 부르고, 곧장 달음박질로 시내 쪽으로 들어갔지요. 계림동 파출소는 유리창과 문짝들이 모두 깨지고 떨어져 나가 있고, 기차 건널목의 차단기가 넋을 잃은 듯 하늘 높이 뎅그마니 올라가 있고 그런데, 이상하게 거리 곳곳에 군인 아저씨들이 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요.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회생활책에서 보았던, 북한 공산당을 무찌른, 그 용감한 국군 아저씨들 앞으로 달려가 일렬횡대로 서서 배 뚝 내밀고, 손바닥을 눈썹 위에 철썩 갖다 붙이면서, 경롓! 했지요. 우리들은, 아저씨들 가슴에 단 수류탄이랑 허리에 단 단검이랑 수통이랑 그물 친 철모랑 빛나는 일등병 계급장이랑 빤짝빤짝 한 구두를 숭배했지요. 우리들은, 아저씨 총 한 번 쏴 보세요, 네? 야아, 멋지다 칼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진짜로 총알이 들어 있어요? 하면서, 갖은 아양과 아첨을 다 떨어봤지만, 아저씨들은 꿈쩍도 않더구만요. 우리들은 각자 손으로 트럼본 트럼펫 수자본 큰북을 공중에 그려가면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를 취주하면서, 집으로 왔지요. 집에는 마루에 우리 아버지와 곡성 형님 어머니가 벌써 돌아와 앉아 계셨는데, 곡성 형님 어머니는 멍하니, 멀리, 봄하늘 끝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

 

  

아, 이게 뭐냐구요 

- <전화 이야기> 풍으로 

 

 

  절망의 시한폭탄은 아니구요. 디 임파서블 드림예요. 가방이죠. 열어보라구요. 그러죠, 뭐. 사건은 없어요. 아, 이게 뭐냐구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죠. 아편은 아니구요. 온건하지요. 다른 저의는 없어요, 필독서예요. 은유가 전혀 없구요. 알리바이에 대한 일종의 옹호에 불과해요. 아, 이건 또 뭐냐구요.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이죠. 이젠 굶는 사람은 없잖아요.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조. 그게 성장의 총량을 명시적으로 늘리는 방법이죠. 그리고 1천 불 소득의 연자매를 끝없이 돌게 해요. 미래에의 환상은 현재의 환멸을 상쇄하죠. 잔뜩 불어넣으세요. 중진국이잖아요. 워커 대사가 뭐, 총독인가요. 그렇지만 운전수들이 영어를 너무 못해요. 필리핀 보세요. 이건 뭐냐구요. 어려워요. 오리지날이죠. Joseph Gable, Lafausse conscience예요. 지난번 프랑스 지사에 나간, 장사하는 친구가 보내준 건데요. 제목이 섹시해서요. 내용은, 조ㅈ도, 모르겠어요. 다만,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라진 나의 어머니를 추모하며, 그리고 1968년 뉴욕에서 위로받을 길 없이 죽어간 나의 아버지를 추모하며, 나는 이 책을 모든 광신에反하여 바친다>는 헌사가, 존나게, 좋대요. 유태인들인가 봐요. 케스키들. 체제를 지지하느냐구요. 난, 사시사철 하루 24시간 내내 내 큰골헤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샅샅이 검열하고 있다구요. 절망이죠. 턱이 둥글고 미남형, 키 175cm 가량, 서울 말씨, 이런 사람을 본 적이 나는 결코 없어요. 우리 연대에 인쇄도니 문학은 이미 문학이 아니다고 난 주장하고 싶어지네요. 나는 모든 급소마다. <노동자>는 <근로자>로, <계급>은 <계층> 혹은 <사회구조>로, <폭력>은 <물리적 힘>으로, <투쟁>은 <대립> 혹은 <갈등>으로 고쳐 번역하곤 해요. 물론예요. 前 문교부 장관이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의 송아지 고기를 포식시켜 준 건 사실예요. 거세된 고기는 부드럽잖아요. 최근, 레이건 대통령의 정치 기조에는 서부활극 같은 데가 있지 않아요. 낸시 여사와의 키스신은, 진짜, 연기라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잖아요. 씹할, 전라도년이 서울 온 지 1년도 못 되어 서울말 찍찍 쓰는 건 정말 못 들어주겠어요. 캄플렉스예요. 그래요. 이성은 1973년 10월 2일, 舊서울 문리대 동숭동 교정에서 사망했죠. 금서가 총 몇 권이죠. 세종문화회관 뒤뜰 늦가을 나뭇가지 사이로 저무는 저녁 햇살이 너무너무 황홀해요. 아까부터 왜  여기서 계속 얼쩡얼쩡했냐구요. 이승의 끝 같애요. 이제 우리들, 절망의 뇌관을 다, 제거했나요. 터질 것 같은, 우리들, 절망의 안전핀을, 절망의 노리쇠, 절망의 가늠자, 기타 등등을. 이게 뭔지 아직도 모르세요.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근황 

 

 

  벗이여, 나의 근황은 위독하다. 위문 와다오. 붉고 흰 국화꽃을 들고, 장의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섬뜩섬뜩하다. 구긴 종이가 휴지통에 정확하게 들어가 주지 않은 그날은 내내 불길하고, 왜 나는 자꾸자꾸 예시받으려 하는지. 왜 자꾸 목숨이 한숨인지, 나는 모르겠다. 벗이여, 지난 여름, 그대는 범람하는 강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우리들 목숨의 치수 바로 밑에 출렁이는 流量을 보았느냐. 상 황 통 제 불 능 상황통제불능. 응답은 없었다. 영원히. 1984년, 大望도 빨리 지나가라. 우리들 패인 분지에 헐벗은 이재민으로 남아 울리라. 지나가라. 황폐한 축제여. 노예들의 환희여. 아, 대한민국, 대한민국 헌법은 여성명사며 대한민국 현대사는 변태 성욕자의 病歷이다. 누가 이 여인을 범하랴.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누가 이 여인을. 그대 몸에 깊은 구멍 있도다. 상처인가 통로인가. 깊고 굶주린 구멍. 물 질척거리는 그대 영혼의 잔잔한 오물이여. 폭등하는 첨탑이여. 교회는 자본주의와 성교한다. 아 마침내 땅끝까지 왔구나. 우글우글하게 까놓았네! 그들의 먹이는 불안한 신흥 중산층이다. 그대 목마른 영혼을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한 값을 내라. 가까이 오라. 양변기에 앉아 똥누는 자들이여. 밀리고 밀린 똥냄새가 맡고 싶구나. 그대들은 李朱一에게 침을 뱉고 그는 돈을 번다. 이게 원리 원칙이야. TV 시청료를 내지 맙시다. 현실을 착색하지 맙시다. 확실한 것은, TV는 공범자다. 벗이여, 이제 나는 시를 폐업 처분하겠다. 나는 작자 미상이다. 나는 용의자이거나 잉여 인간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추행자다. 아아, 나는 시의 무정부주의를 겪었고 시는 더 이상 聖所가 아니다. 거짓은 나에게도 있다. 우리는 다 레이건 치하에서 산다. 극악무도한 놈! 젊은 金 순경이 변심한 애인집 일가를 몰살하고 그도 곧게 뻗은 사건 있지. 그것도 우리 사회가 성숙해 가는 데 거쳐야 할 방역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그놈은 구조기능주의자임에 틀림없어. 아가리를 찢을 놈. 그들과 나는 덮여진 형제 살해의 시대에 산다. 우리는 연루자다. 벗이여 우리는 코미디언도 순교자도 못 된다. 혹은 모든 시대에 코미디언은 순교자의 대칭이다. 김지하를 보라. 그대가 캄캄한 날의 그의 옥중서한을 대독해 봐. 나는 시의 顯敎를 믿었다. 나는 곧 개종한다. 나는 거칠어질 것이다. 나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왜 성조기가 독나방의 날개로 보이지. 악몽이여, 흉악한 시절이여. 내 가슴 뜨거운 문신이여. 이것은 증오일까 오류일까. 나는 나 이외의 삶을 범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혼수상태다. 위문 와다오. 우리 결별하자.

  

 

...

  

   

桃花나무 아래

 

    

금년 봄부터 나는 지방대학 시간강사 노릇 한다.

이것은 부업이고 나의 주업은 실업이지만

대학 근처에 얼쩡거린다는 자책감이

나를 찌끈찌끈 찔러댄다. 그러나,

시만 써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다.

편당 10만 원만 달라.

아니다. 편당 2만 원도 넘친다.

정신의 지불유예가 그렇게 억울한가?

그렇지는 않다.

내가 못 살겠다, 생활이 어렵다 어렵다 하는 것은

18평 크기에서 25평 크기의 삶의 증대를 바라는

욕망이다. 도둑질은 분명

욕망이다.

H물산 여공 일당이 2,900원이 될까 말까 한다.

체제여, 지금 내 가방 속에는

아이들에게 썰 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가

들어 있다.

이 테제도 상품이다.


사당동 네거리에서 탄 시외버스가 과천 아파트 단지를 지나 안양으로 들어간다.

공장이 들어선 단지 사이사이에 였 복숭아밭이 지금, 절정의 무릉도원이다.

윤사월 도화는 꼭 팝콘 같다:

저 팝콘을 안주삼아

소주 한병 비우고

따사로운 도화나무 아래

잠이나 원없이 잤으면

生前(생전)까지 갔다 오는 멀고 먼 잠, 잤으면

다시 생후(生後)로 내려와 나는

허옇게 수염난, 코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고, 이봐 나야 나

뭐 해, 자기

내려가지구

딴 세상이야

진짜 팝콘이 복숭아 꽃잎처럼 마취적으로

내 어깨 위로 난무하는,

   

잠에서 깨고,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꼭 교도소 같다.

   

   

...

 

   

종로, 어느 분식점에서 아우와 점심을 하며 

 

 

국수 두 그릇과 다꾸왕 한 접시를 놓고 

그대와 마주앉아 있으니 

아우여, 20년 전 우리가 주린 배로 헤매던 

서방 고새기 마을 빈 배추밭이 나타나는구나 

추수가 수탈이었음을, 상실이었음을 그때 우리는 몰랐어도 

다 거두어 간 뒤의 허한 밭이 우리에게는 더한 풍요였다 

내 입으로 벗긴 배추 등걸을 어린 그대에게 먹일 수 있었다 

그대가 곱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경계가 있고 

찬 저녁 노을이 우리를 몰아낼 때까지 거기가 

할퀸 우리 땅임을 몰랐으므로 

아우여, 이농의 허천난 후예로서 우리는 

가시 돋친 탱자나무 울타리 안을 노려보며 

땅강아지 같이 살아왔다 

거지와 도둑이 사는 마을, 닐니리 동네와 철로변 하꼬방촌을 

전전하며, 땅 바깥으로 삶을 내동댕이치는 울타리가 

도둑질이며 도둑질을 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어느 새 내가 울타리 안에 있음을 

아까 악수하는 그대 손바닥이 알려준다 

울타리를 치지 않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 아우여 

국수를 한 입에 몰아넣는 그대 앞에 

나의 허기가 사기라는 것을, 

아 어쩌다가 내가 시인이 되었을까, 

국수와 설움과 쫓겨난 땅을 노래하는 일까지 극치의 사치라는 것을 

아우여, 용사여, 

두려워서 자백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간 길과 다른 나의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통로, 나의 길  

나는 늘 경계에 있었다 

대구와 양산, 김해 혹은 영등포에서 빡빡 깍은 그대 머리를 

대했을 때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게 나에 대한 그대의 면책은 

아니었다 면책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계가 

나의 에펜네, 새끼들, 그리고 그대와 나의 어머님, 지금도 

해남에서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고 있는 형님과 

나 사이에도 있다 나의 분노는 슬픔을 지나온 것이다 

나는 뚫고 가야 하리라 

내 등을 그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대가 먼저 떠나라 

우리는 다꾸왕은 한 입도 대지 않았구나 

빈 국수 그릇에, 그대와 나의 새벽 공복을 

 

울리고 가던 송정리행 기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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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그는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하는 흔치 않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것은 `우리 사회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황지우는 정장 차림에 안개꽃 한 다발을 들고 종로3가 단성사 앞으로 나갔다. 안개꽃은 광주시민 학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의 눈초리 앞에서 안개꽃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황지우는 곧 지하철 1호선 역의 플랫폼에서 체포됐다. 손목이 등뒤로 묶인 채 거칠게 끌려나갈 때, 오후의 햇살은 지하철 입구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지금도 그 때의 그 지하철 입구를 잊지 못한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건 바로 우리 사회 때문이었다. 80년 5월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지옥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지옥을 생각해낸 것은 고문에 대한 체험에서였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 모진 지옥에서 한 계절을 보내면서 증오의 힘으로 시를 썼다. 결코 침묵해서는 안될 것 같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그의 첫 시집이자 출세작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였다. 80년대를 관통하며 줄기차게 자기 목소리를 내 오던 그는, 그러나 90년대 들어 근 10년 가까운 침묵을 지켰다. 글을 안 썼다기보다는 도무지 씌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80년대의 문제의식을 너무도 쉽게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은 말하는 것이 악덕이다, 침묵만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대신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이대로 술을 퍼붓다간 내가 죽지 싶었을 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광주 무등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요가수행을 하고 명상을 하면서 밀교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손 댄 것이 조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선생님이 `10년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할 소묘력을 지녔다`며 미대 진학을 강권해 교무실에 끌려다니곤 했을 만큼, 미술적 감성이 풍부한 황지우였다.


흙덩이를 만질 때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도 끄덕 없었다. 그렇게 90년대를 보내면서, 95년에는 개인 조각전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도 저물어갈 무렵, 한 편 두 편 써두었던 시를 모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펴냈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이 시집이 예상을 뒤엎고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다시 시인으로서 세상과 만났다.


`너도 아팠냐? 나도 아팠다. 그러나 너무 아파만 하지 말자. 살아야 하지 않겠냐. 그런 쓸쓸한 인사 같은 것이 이 시집이다.`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세월이 흐른 후에는 어쩌면 딱딱한 돌 덩어리를 부여 잡고 또 다시 조각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지도 모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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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오늘의시인총서 21)

저자
황지우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85-10-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황지우의 시는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뻔뻔스런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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