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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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
이제 강은
내 책 속으로 들어가 저 혼자 흐를 것이다
언젠가는
아무도 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강은
네 추억 속에 들어가 호젓이 흐를 것이다
네 추억 속에서
하루하루 잊히고 말 것이다
이제 강은
누구의 사진 속에 풀린 허리띠로 내던져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것이 강인 줄 무엇인 줄 모를 것이다
차라리 돌아가고 싶어라
지지리 못난 내 후진국 거기
이제 강은
오늘 저녁 오늘 밤까지 기진맥진 흐를 것이다
자고 나면
강은 다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이없어라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
공교롭게도 노벨문학상 발표 소식이 있은 다음날, 고은 시집을 꺼내 읽는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가장 자주 언급된 그가 이번에도 역시 (어쩌면 예상대로) '물을 먹었다'는 소식이 그리 달갑지만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세계를 주름잡은 이웃 나라의 하루키 같은 소설가가 물을 먹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나쁜 성과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리던 게 불과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고은 시인의 "만인보"도 완간을 한 게 몇년전인가 싶구나.
개인적으로 그가 쓴 시들 중에서 '섬진강에서'를 제일 높게 치곤 한다. 이번 시집에서도 아마 그 중 가장 엇비슷한 작품이 이 시는 아닐까 싶어 한줄... 그럼에도 여전히 갈증은 가시지 않는데,
가끔 지나친 다작이 과작보다 못한 경우를 볼 때가 종종 있고, 아마도 시인이 등단하기 전이라면 그 매서운 눈을 가진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서 '고르지 못한 수준'이라는 일갈이라도 얻었을 텐데...
그럼에도 매번 꾸역꾸역 시집을 펴낸 그의 대단한 저력도 무시 못할 바이나, 거꾸로 그 다작이 시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 즉 '시작법'과 맞닿아 있음도 알게 된다. 이미 시집은 한편의 시요 그 여럿의 시집들이 모여 이 시인을 형성하게 된다. 과거는 곧 현재요 현재는 곧 미래니까. 그렇게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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