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Identity'에 관한 요즘 생각들
- 오늘의 편지,
[취재][리뷰] <오블리비언>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
<오블리비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다. 감각적인 이미지와 달리 공허한 이야기로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던 조셉 코신스키의 전작 <트론: 새로운 시작>(2010)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변화다. 그렇다고 해서 <오블리비언>이 뭔가 대단히 독창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펼쳤다는 얘기는 아니다. <토탈리콜>(1990,2012) <매트릭스>(1999) 등의 영화와 필립 K. 딕의 소설 등 SF를 즐겨보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꽤나 익숙한 편에 속한다.
2077년 현재 인류는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핵을 사용했다가 멸망한 상태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잭 하퍼(톰 크루즈)는 빅토리아(안드레아 라이즈보로)와 함께 지구 상공 위에 거처를 마련, 정찰병의 임무를 수행 중에 있다. 전투로봇 '드론'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한편 지구에 숨어있는 정체불명의 세력으로부터 바다 위의 발전 탑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한대가 지구에 불시착한다. 이를 조사하던 잭은 자신을 알고 있는 줄리아(올가 쿠릴렌코)를 만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 제목이 힌트다. <오블리비언>은 바로 '망각 Oblivion'을 의미한다. 스포일러 노출을 무릅쓰고(그러니 주의!) 얘기하자면, 잭(과 빅토리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외계문명이 지구에 숨어 저항하는 인간들을 찾아내기 위해 복제한 인간이다. 하여 그의 정찰병 유니폼에는 '49', 그러니까 잭의 마흔 아홉 번째 복제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다. 대신 그는 인간으로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도록 세팅된 상태다. 그 와중 순수한 '인간' 줄리아의 출현으로 잭은 각성을 이루는 것이다.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바로 잭 하퍼의 망각과 관련한 부분에서 생겨난다. 잭 하퍼의 정체는 무엇인지? 영상으로만 존재하는 샐리(멜리사 레오)라는 이름의 '빅 브라더'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약탈자'라고 불리는 지구의 생존자는 인간인 것인지? 등등. 앞 문단에서 밝힌 바, <오블리비언>의 의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풀렸을 거라고 보지만 사실 이 영화의 진가는 좀 다른 데 있다. 잭 하퍼로 대표되는 지상의 문명과 지하에 숨어 사는 인간 생존자들의 대비를 통해 영화가 설파하는 아날로그적 삶으로의 귀환이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이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미장센으로 활용하는 것은 책과 음반, 그림과 같은 인류의 문화 예술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각종 예술의 인용을 따라가는 것은 <오블리비언>의 주제에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 격에 해당한다. 우선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인용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다. 이 책은 잭이 지구에 정찰을 내려올 때마다 빅토리아와 샐리의 감시를 피해 영혼(?)의 안식을 얻겠다며 찾아가는 울창한 숲 속의 오두막집에 놓여 있는 책 중 한 권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 삼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영국의 런던과 가난이 들끓는 프랑스 파리를 대비, 차별받는 민중의 투쟁과 저항을 묘사한다. 그것처럼 <오블리비언> 역시 극 중 지상과 지하의 문명이 흑백을 가르듯 완전히 대조되는 세계를 이룬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 간의 대결을 에너지원 삼아 극을 이끌어 간다. 잭 하퍼가 지구에서의 움직임을 감시해 우주에 알리는 것처럼 지하의 인간 저항군들에게 잭과 같은 우주의 정찰병은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잭 하퍼 쪽에서 저항군들은 그야말로 눈엣 가시 같은 존재다. 발전 탑은 지상문명의 유지를 위해 바다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시설인데 지하의 저항군들이 지구 환경의 회복을 위해 이를 공격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외계문명에게 잭과 빅토리아를 제외한 인간들은 그저 잉여일 뿐이다. 인간의 역할을 기계가 대신하며 그나마 존재하는 복제인간 잭과 빅토리아는 빅 브라더에 의해 숫자로 관리되는 등 모든 게 디지털화 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비인간적이다. 뭔가 텅 비어 있고 공허하며 차갑다.
그에 반해 지하에 숨어 저항하는 인간들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인간다운 삶을 지향한다. 무엇보다 책을 모으고 음악을 들으며 명화를 걸어놓는 등 예술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협소한 공간임에도 불구, 온기가 묻어난다. 저항군들의 목표는 그들을 말살하려드는 기계화된 문명을 몰아내고 다시금 초록빛 무성한 인간 세계를 건설하는 것. 다시 말해, 조셉 코신스키는 <두 도시 이야기>를 슬쩍 노출하는 것으로 지상과 지하, 디지털과 아날로그, 인간과 기계로 대변되는 두 개 문명의 대립이라는 의도를 확실히 한다.
예술은 인간의 생존에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 오히려 예술은 인간에게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블리비언> 속 지상 문명에 예술품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인간을 기계처럼 관리하기 위해 획일화와 몰개성을 주입하는 시스템에게 예술적 행위와 이로 인해 생겨나는 예술품은 금지해야 될 것들이다. 이는 <오블리비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망각'임을 감안하면 예술은 곧 기억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잭 하퍼는 지난 60년 동안 지구에서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상태로 정찰병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2017년 이후, 그러니까 지구 멸망의 순간부터의 기억이 말살된 채 빅 브라더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미세하나마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미식축구팀인 뉴욕 자이언츠의 경기를 잊지 못한다. 미식축구라는 게 그렇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선수들의 몸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고 경기 내내 뒤엉키기를 반복한다. 미식축구의 용어 중 하나인 '터치다운'이 접촉을 의미한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잭 하퍼가 그런 미식축구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에의 동경을 나타낸다. 스포츠 또한 인간의 예술적 행위 중 하나라고 본다면 잭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줄리아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인지, 빅 브라더는 무슨 연유로 동료인지 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하의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드는 것인지, 왜 자신은 2017년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등등 이해 못 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인용. 지구로 내려와 지하조직을 수색하던 중 잭은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한다. 토머스 B. 매콜리의 <고대 로마의 노래>다. 잭 하퍼는 이 책을 품 안에 넣고 틈틈이 살펴보는데 '호라티우스 Horatius'라는 시가 그의 눈길을 끈다. 이 연작 시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성문의 수장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지상에 살아있는 자 모두에게 늦거나 빠르거나 죽음은 찾아온다.
그렇다면 선조의 유물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강적에 맞서는 것보다 더 나은 죽음이 있겠는가."
예술의 진가를 알아본다는 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기 마련이다. 즉, 빅 브라더의 입장에서 잭은 '버그'로 불리는 시스템 상의 오류와 같은 존재다. 모든 게 숫자로 관리되며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디지털 문명에서 예술을 각성의 계기 삼아 생각과 의심을 통해 이 세계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려 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세상을 바꾸는 건 잭과 같은 '버그'다. 그가 처음으로 보는 책이 <고대 로마의 노래>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인간이었던 당시의 기억을 회복한 잭은 온갖 감시를 피해 빅 브라더와 맞선다. 그리고 결전의 순간, '호라티우스' 중 한 대목을 인용해 최후 변론처럼 어떤 의지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호라티우스가 고대 로마를 지키기 위해 다리 위에서 홀로 수만의 대군과 맞선 것처럼 2077년의 호라티우스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 잭은 그 자신을 희생해 디지털 문명을 파괴함으로써 선조들이 남긴 유물과 신념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잭이라는 버그 하나로 시스템은 붕괴되고 지구는 '재부팅'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인용되는 예술은 앤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다. 1948년에 발표되어 현재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되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들판을 가로 질러 집으로 향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속 크리스티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앤드류 와이어스의 부인으로, 그녀의 장애는 뼈만 남아 앙상해 보이는 팔로 힘겹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불안정한 자세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감정 혹은 분위기라는 것은 혼자라는 외로움과 과연 들판의 집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이를 통해 조셉 코신스키는 디지털에만 경도된 작금의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할 생각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오블리비언>의 지상에 구축된 디지털 문명을 바라보면서 겹치는 현실의 광경이 있었다. 길거리를 걸어가는 중에도,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하는 중에도, 카페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너나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 말이다.
감독은 그런 현대인들의 병적인 디지털로의 집착을 장애로 보는 것 같다. 스마트폰(혹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소통이 휘발되며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져 정신적으로 공허해지는 것이야말로 장애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거다. 디지털의 세계에만 빠져 정체성을 잃지 말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삶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오블리비언>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인용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처럼 잭의 기억과 정체성이 예술에 의해 되살아나듯 <오블리비언>은 암호화된 숫자들로 망각을 반영한다. 극 중 심심찮게 등장하는 날짜, 시간, 번호 인식표 등은 언뜻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 아니 의심을 해 보면 꽤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되면 처음 나타나는 숫자는 2077년 3월 14일이라는 날짜다. 그 중 월일을 출애굽기의 3장 14절로 (무리하게) 연결하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가 된다. 잭 하퍼가 처한 상황이 연상되지 않나.
뭐,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오블리비언>은 익숙한 이야기와 화려한 이미지 속에서도 인간 존재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퍼즐을 연상시키듯 각종 예술에 대한 인용을 곳곳에 심어놓아 관객의 이해를 유도한 발상은 비슷한 영화들 속에서 차별을 이룰만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뜨거운 반응, 무수한 질문과 대답이 곧 조셉 코신스키가 극 중에서 제기한 생각과 의심의 주제에 대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오블리비언>은 영화적 재미의 유무를 떠나 꽤나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 토머스 B. 매콜리의 <고대 로마의 노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외계소년'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허남웅
*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ddanziNews/1132789
- 편집하는 말,
벌써 2년이나 지난 영화평 기사 한토막을 헤드라인으로 올려놓는 연유는 그 'Identity'에 관한 요즘 내 생각들의 파편을 어떻게든 모아보고 또 걸러냄으로써 무언가 의미있을 나만의 '정체성' 내지는 '자아'에 관한 일종의 편력 같은 걸 시도해보고자 함인지도 모르겠구나...
페이스북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아무래도 '모바일'이 주력공간이 된 마당에야 어떻게든 페이스북 곳곳마다를 이 블로그와 어떻게 연계할 것이냐도 큰 화두가 될 터. 다소 낯설지만 때때로 블로그를 아예 대체할 일종의 '대안' 같은 것들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겠기에... 일종의 'Plan B'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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