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동문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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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내내 필사한 보람도 없이 한순간에 휘익 사라져버린 이 허탈함은 또 무엇이랴...
아무튼, 책 한권을 다 덮은 채로 또 다시 망연한 심정으로 글 앞에 선다. 매번 똑같을 수야,
아니 매번 필사만으로 채울 수만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말 그대로 '독후감'인 편이 낫겠지.
사회주의가 몰락했을 때, 알튀세르를 읽으며 '상부 구조'를 논하고 이데올로기만 논했다면
사회주의가 필요해진 때, "경제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하나도
제압하지 못해 여전히 "빨갱이" 타령에 수세로 일관하는 것도 시대마다의 아이러니구나...
어쨌든간에,
드디어 루이 알튀세르다. 미처 다 읽어내지는 못한,
그럼에도 그의 원전을 하나 맨 뒷페이지까지 덮었다는 데서 위안을 삼고자 하며......
'이데올로기'라는 낱말 하나에 이토록 목숨을 건 까닭이 무얼까? 괜시리 궁금해진다.
하물며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에 비해 비로소 "혁명"을 논하긴 했어도, 여전히 시의성은
지금에 비해 다소 한계가 있음을 느끼는?... 유효한 주장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 일단은.
- 하부 구조가 아닌 상부 구조에서의 계급투쟁을 다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90년대는
충분히 그의 시대가 될 법했다. 그만큼 사회변혁세력은 확실히 '경제주의'적이었으니,
하지만 현 시대의 "99%" 투쟁이 보여준 것만큼 그 역시 경제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
또는 이를 망라한 총체적 '이데올로기론' 같은 형태로 진화했으면 또 어떨까?...
그런 생각들을 갖게 만드는 책,
P.S. '원전 읽기'가 비로소 발터 벤야민까지 이르게 되고. 좀 더 진도를 뽑아야 하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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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국가 기구
이 저작의 중심적 테마는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라는 장소틀, 즉 은유가 충분치 않으며 기만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적인 토대가 나머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볼 때, 생산 양식을 최종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사회적 생산 관계이며, 이 관계의 재생산은 억압적인 국가 장치 + 이데올리기적 국가 장치 전체에 의해 보장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기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에게서 자기 영감의 일부를 만난다. 그람시는 지도 계급의 '헤게모니', 그러니까 그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의 패권이 실현되게 해주는 사정/공적 제도들 전체를 '시민 사회' - 이 시민 사회는 '정치적 사회',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의 국가 기관들과 대립된다 - 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해 시계 이해/지식/문화/윤리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에 따르면 또한 시민 사회는 부상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진보주의적 투쟁이, 따라서 헤게모니 정복과 동일시된 혁명 과정 자체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제도들 전체를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 기구의 요소들로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견해를 뒤엎는다...
호명을 호명하기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상부 구조의 다른 요소들을 나란히 놓고 말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재검토하도록 유도하고, 그 방식을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포함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문제틀을 중대하게 전복시킨다. 그의 분석이 지닌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유물론적 실재론상의 위상, 다시 말해 사회적 존재론상의 위상을 부여한다는 데 기인한다. 동시에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호명'으로, 그러니까 각자가 소환되고 방식이자 주체로서 사회적으로 구성되게 하는 방식인 호명으로 정립한다는 점이다...
:: 일러두기 ::
... 나는 자본주의의 착취, 억압, 이데올로기화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근본 원리들을 상기시키는 게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재생산을 보장해주는 체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게 불가결했다. 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사용 재화들의 생산은 이익, 따라서 착취라는 유일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노동 운동의 실천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하면서도 체계적인 이론 형태로 아직 표현되지 못한 주장들을 두 가지 점에서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 부르는 것과 이데올로기 일반의 기능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제시했다...
... 마르크스가 확립한 과악에 속하는 모든 것(특히 이 제1권에서 생산 관계의 재생산 이론)은 하나의 혁명과학에 달려 있다. 마르크스는 이 혁명과학을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토대로 해서만 확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철학적 입장을 토대로 보여주고 입증할 것이다. 따라서 - 레닌이 훌륭하게 이해하고 보여주었듯이 - 그런 제한된 문제에 관해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론 영역에서 계급상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 있지 않는다면 마르크스 이론을 이해하고 하물며 설명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모든 철학의 속성은 일정한 계급의 입장을 이론을 통해 대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속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입장을 이론을 통해 대변하는 것이다...
... 사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을 포함해 모든 철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이 철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라 해도 말이다. 그것이 철학에 속한다면, 이는 철학을 규정하는 일이 철학에 속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몇몇 희귀한 예외를 제외하면, 철학사 내내 철학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수행해 왔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적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과학과 이 과학으로부터 파생되는 과학들 모두는 마르크스가 과학적 지식에 새로운 '대륙' '역사라는 대륙'을 열어 준 발견에 의존한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의 일반 이론은 사적 유물론이라 불린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 즉 철학의 과학적 규정에 이를 수 있기 위해 사적 유물론에서 나온 과학적 결과들을 통한 커다란 우회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바로 이 커다란 우회가 우리의 연구에서 플랜의 성격을 천명하게 된다. 여기서 나는 연속적인 순서에 따라 이 플랜을 구성하는 장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겠다.
제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제2장 생산 양식이란 무엇인가?
제3장 생산 조건의 재생산에 대하여
제4장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제5장 법
제6장 국가와 국가 장치
제7장 정치적/조합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제8장 생산 관계의 재생산
제9장 생산 관계의 재생산과 혁명
제10장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의 법
제11장 이데올로기 일반...
제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1. 상식의 철학과 철학
...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시 부딪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첫번째 질문이 상식의 철학이라는 무엇인가?라는 두번째 질문에 의해 수태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2. 철학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 대문자 철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위에서 원용한 두 가지 조건인 필요 조건(계급들의 존재)와 충분 조건(과학의 존재)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것은 플라톤을 넘어서 학문으로서 살아남았고, 마치 철학이 존재하기 위한 어떤 필연성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마치 그것이 그것의 변모들 자체 속에서 본질적인 무언가를 반복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이 특이한 방식으로 영속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지속과 발전은 우리가 '서양 세계'라 부르는 곳에서 이루어졌음이 주목된다. 이 서양 세계에서는 계급들과 국가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고, 과학이 커다란 발전을 발전했으나, 계급 투쟁 역시 커다란 변모들을 겪었다. 그렇다면 철학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 정치-과학적 결합과 철학
...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철학에서 모든 커다란 변모가 역사에 개입하는 시점은 계급 관계와 국가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이루어질 때이든지, 아니면 과학사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할 때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과 함께 분명한 것은 계급 투쟁의 주목할만한 변화와 과학사의 커다란 사건이 만나 서로 강화되어 철학에서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제2장 생산 양식이란 무엇인가?
1. 네 개의 고전적 명제
... 1) 모든 구체적인 사회 구성체는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 양식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곧바로 함축하는 바는 모든 사회 공동체에는 한 가지 이상의 생산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2) 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크크스가 한편으로 생산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 관계라 부르는 것 사이의 통일체이다... 3) 우리가 하나의 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생산력/생산 관계라는 통일체 속에서 이 양식을 고찰할 때, 이 통일체는 생산력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 이 생산력의 한계 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생산 관계라는 점이다... 4) 생산력/생산 관계라는 통일체에서, 그러니까 경제적인 '토대' 혹은 '하부 구조'에서 결정적인 요소와 관련된 이 마지막 명제와 또 다른 고전적인 명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고전적 명제가 단언하는 것은 상부 구조(법/국가/이데올로기)를 하부 구조(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통일체)와 결합시키는 것은 매우 복잡한 또 다른 통일체에서 '최후 심급으로서 결정적인' 것이 경제적 하부 구조라는 사실이다.
2. 생산력
... 노동 과정을 담당하는 인간들이 나타는 생산력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이 인간들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에 대해 항상 명료했다... 생산력=생산 수단+노동력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이 계급 사회에서 생산 수단은 노동력의 소지자들에 의해 소유되지 않고 생산 과정의 외부에 있는 자들인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의해 소유되어 있다... 생산력은 생산 양식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고, 다른 하나의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 생산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생산 관계
...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는 자본주의의 착취 관계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프랑스에서 지배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도 이 나라에 이전의 생산 양식(들)의 요소들, 이 경우 '분야들'이 존재하거나 '농노제'나 봉건제적인 생산 양식의 해체 요소들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자연적'인 지대를 자본주의적 지대로 변모시킴으로써, 또 잔존하는 '소규모 독립적 생산자들'에 대한 자본주의 시장의 거의 전적이 지배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런 시대에 뒤진 형태들을 지배한다. 한편 매매나 생산 조합들(최후로 남은 희귀한 것들)은 분명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속하며, 몇몇 뒤처진 공상가나 기회주의자들의 정신 속에서만 사회주의 생산 양식의 '예고'가 된다... 실질적으로 모든 동일한 노동 과정, 심지어 모든 노동 과정 일반은 어떤 생산 양식 혹은 어떤 '제도'에서 일어나든, 노동 대상/노동 도구/노동력이라는 불변의 요소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신자본주의의 옹호자이든 수정자본주의자이든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상가들의 상상력이 작동하여 우리에게 놀랄만한 일(계급의 종말이든 공산주의이든)을 약속한다. 왜냐하면 자동화가 일반화될 때면 이 자동화가 노동력의 거의 모든 개입... 따라서 그것의 착취를 '말하자면' 없애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지해지자!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유용성을 지닌 생산물들을 진정으로 생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특별한 생산 관계 아래서만 그것들을 생산하며, 이 생산 관계는 동시에 이 생산 양식의 착취관계이다. 이 점은 모든 계급 사회에 맞는 말이지만, 이 착취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들에서 특수한 형태를 띤다... 실제적인 '생산'은 생산 수단(이 생산 수단은 홀로서 일할 수 없다)이 노동력, 즉 임금 노동자들과 관계가 이루어질 때 - 그리고 그들에 의해 작동될 때 - 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임금 노동자들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소유자의 것인 이와 같은 생산 수단과 접촉을 함으로써 물질적인 생산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접촉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생산 수단의 소유와 비소유(생산 수단의 비소유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노동력만을 소유하고 있다)의 관계 아래서만 이루어진다. 이 관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는 착취 관계로 전환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착취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다(이것이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이다.) 그것은 자본가가 노동력의 사용을 사는 대가로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양도한 가치에 있다. 자본가가 (계약을 통해서) 임금 노동자에게 양도한 것은 임금 뿐이다. 다시 말해 임금 노동자의 노동이 생산한 가치에서 오직 일부 뿐이다... 자본가는 모두가 '만족'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자본'을 투자했는 바 자신의 '위험'에 대해 지불하는 이익을 챙겨야 하고, 노동자의 노동은 '그 가치'에 맞게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추론'을 산산조각 냈는데, 그것의 불행은 이렇다. 첫번째로 그 어떠한 법률적 범주도 운 좋게 자본을 소유한 자에게 그가 겪은 '위험을 대가로', 또 일반적으로 그가 전혀 겪지 않는 위험을 대가로 이익을 주어야 할 필요성을 기록할 수 없다. (단, 이는 최근 일련의 민자사업과 같은 경우 예외가 생기곤 한다. - 편집자 주) 두번째로 임금의 형태로 노동자에게 양도한 가치는 '그의 노동 가치'를 전혀 나타내지 못하고, 다만 그의 개인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만을 나타낸다. 이 가치는 '노동 가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게다가 노동가치는 모든 이론적 의미가 문자 그대로 없다. (이 역시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 편집자 주)
(중략)
제12장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1. 마르크스와 이데올로기라는 용어
2.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
3. 억압과 이데올로기
4.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의 상상적 '표상'이다
5.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가 있다
6.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7. 하나의 사례 : 기독교의 종교 이데올로기
8.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9.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10. 구체적인 사례
부록 : 생산력에 대한 생산 관계의 우위에 대하여
#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노트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 종교 (교회 체제), 교육 (학교 제도), 가족적인 AIE, 법률적인 AIE, 정치적인 AIE (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 제도), 조합적인 AIE, 정보의 AIE (언론, 매체 따위), 문화적인 AIE (문학, 미술, 스포츠 따위) //
...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 우리는 주체라는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곧바로 덧붙이고자 하는 점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주체들을 '구성해 주는' 기능(이 기능이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을 수행하는 한에서만 주체라는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중적 구성 작용 속에 모든 이데올로기의 기능 작용이 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기능 작용에 불과하고 이 기능 작용은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형태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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