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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 '진지전'은 진득하기만 하구나

단테, 2015. 5. 10. 00:18


-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 (거름,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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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필사 작업의 끝에 비로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그람시, 한때는 대학가의 게시판마다 온통 그에 대한 강좌와 도서들로 넘쳐나던 시절도 있었지... 

'진지전'이라는 화두는, 아직껏 유효한 걸까? 잘 모르겠다. (일종의 "Timeline"을 갖는다면 될까?) 

 

무엇보다 '헤게모니'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게 눈에 띈다. 

하지만 이를 혁명세력의 무엇에 대한 장악 노력 따위로 읽히기보단, (오히려 '당해온' 세월 탓인지) 지난 일제시대 때 일본이 조선한테 행한 그 '문화혁명'이 대뜸 떠오른 건 우연일까?... 패전국임에도 자신있게 외쳤다고 한 그 말, "조선은 앞으로 100년간 결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저주의 끝자락에 서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 그리고 내일은 여전히 위태롭기만 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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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감사의 말 
머리말 

|서설| 
초기의 삶 / 지적인 형성과정 / 튜린에서의 사회주의 정치활동 
≪오르딘 누오보≫, '피의 시절', 그리고 PCI의 창설 
보르디가 지도하의 PCI(1921~23) 
이탈리아 당의 공위(空位) 기간(1923~24) / 감옥 

1장|현대의 군주| 
■ 개요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정치학 / 정치의 요소 / 정치정당 
세계에 대한 개념과 실천적 자세 :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 
'경제주의'의 약간의 이론적 · 실천적 측면 / 예측과 전망 
국가의 경제적 · 조합주의적 국면 / 상황의 분석과 세력관계 
관료주의에 대하여 / 고정비례의 정리(定理) 
대의제 통치체계에서의 수(數)와 질(質) / 지속성과 전통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 / 비잔티니즘에 대한 거부 
집단적 노동자 / 주의주의(主意主意)와 사회대중 

2장|국가와 시민사회| 
■ 개요 
유기적 위기의 시대에서 정치정당의 구조가 갖는 몇 가지 양상 
카이사리즘(Caesarism) / 비버의 우화 / 선동과 선전 
시대의 철학 / 정치투쟁과 군사전쟁 
기동전(정면공격)에서 진지전으로의 이행 - 정치적 영역에서도 
정치와 군사학 / 국제주의와 일국(一國)적 정책 
'집단적 인간'과 '사회적 순응주의'의 문제 
사회학과 정치학 / 헤게모니(시민사회)와 권력분립 
법의 개념 / 정치학과 헌법 / 의회와 국가 
자기비판과 자기비판의 위선 / 국가 / 국민적 단체의 조직 
누가 입법자인가? / 종교 · 국가 · 정당 / 국가와 정당 
국가숭배(Statolatry) / 지배계급들의 '공적' 
역사적 미문학(美文學) / 반(反)체제 
'유물론의 물결'과 '권위의 위기' 

3장|미국주의와 포드주의| 
■ 개요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유럽의 인구학적 구성의 합리화 
초(超)도시와 초농촌 / 산업의 재정적 아우타르키 
성(性)문제의 몇 가지 측면 / 여권론과 '남권론' 
'동물성'과 산업주의 / 생산과 작업의 합리화 
테일러와 미국주의 / 양과 질 
테일러주의와 노동자의 기계화 / 고임금 
주식 · 사채(社債) · 정부채 / 미국적인 문명과 유럽적인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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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 |  

 

"... 우리는 여기에서 그람시와 보르디가의 전망 사이의 차이뿐 아니라 유사점도 쉽게 볼 수 있다. 두 전망은 모두 부르주아 질서의 일반적 위기와 혁명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였다. 둘은 모두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을 받아들였으며, 정권 자체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좌익'인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한 투쟁도 똑같이-또는 더욱-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시급히... 폭동을 준비해야 한다. 최근의 정치적 사건들은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이제는 오직 폭동만이 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 1장 현대의 군주 | 

 

대의제 통치체계에서의 수(數)와 질(質) 

"국가의 기관을 선거로 구성하는 체제에 대해, 거듭 되풀이되는 가장 진부하고도 통상적인 비판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그러한 체제에서는 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백치라 하더라도 글자를 쓸 줄만 안다면 (어떤 나라에서는 문맹이라도 상관없다) 그의 의견은, 국가의 정치적 과정을 결정하는 데세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가장 뛰어난 힘을 바친 사람의 의견과 조금도 다름없는 비중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서 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모든 투표자들의 의견이 '정확히'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 경우에서도 수는 단지 척도와 비교를 제공할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부차적인 뜻밖에는 지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수로 인해 측정되는 것은 무언인가? 측정되는 것은 바로 소수의 개인, 적극적 소수, 엘리트, 전위들의 의견이 얼마나 유효한가, 그 팽창력과 설득력은 어느 정도인가, 다시 말해 그들의 의견의 합리성과 역사적 타당성과 구체적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모든 개인들의 의견이 '정확하게'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사상과 의견은 각 개인의 두뇌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전파하며 퍼뜨리고 설득하는 중심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 중심이 사상과 의견을 발전시켜 당대의 현실에 알맞은 정치적 형태로 제기한 것이다. '표'를 센다는 것은 기다란 과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식일 뿐이다. 그리고 긴 과정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장 훌륭한 정력을 바친 자(진짜 그러한 자라면)가 가장 큰 비중을 행사한다. 만약 가치있는 인간들이 되었다는 가설적인 집단이, 자신들이 소유하는 무한정한 물질적 힘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부적격자들이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국민적' 이익의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인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그들이 국민적 이익의 진정한 대표자였다면 국민적 의지와 방향을 이리로 또는 저리로 잡는 데에서 결정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국민의 이익인 양 혼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결정하는 것이 '수의 법칙'이라는 점이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로서는 물론 신의 뜻으로 엘리트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장 비천한 문맹의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고 느끼는 '두뇌가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거리의 인간들'로부터 그들이 국민적 생활과정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의 최소한의 편린마저도 박탈하고 싶어하는, 스스로 두뇌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문제이다... 집단의지가 형성되는 역사과정의 초기국면에서, 유토피아와 혼돈된 합리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니는 중요성. 유토피아 또는 추상적 합리주의(rationalism)는, 일련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세계에 대한 낡은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과 똑같은만큼의 중요성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역사단계를 최초로 대변하는 자들이 낡은 이데올로기적 복합체에 대해 가하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구이데올로기에 포함되었던 여러 요소들이 지니는 상대적 비중에 변화와 분화과정이 생긴다. 이전에는 이차적/종속적이며 우발적이기조차 했던 요소들이 이제는 일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이론적 복합체의 핵심이 된다. 낡은 집단의지는 종속적이었던 요소들이 발전함에 따라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로 해체된다..."   

  

 

| 2장 국가와 시민사회 | 

 

"진지전과 수동적 혁명 사이에는 절대적인 동일성이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이 두 개념을 똑같은 것으로 여겨야 할 하나의 총체적인 역사적 시기가-진지전이 다시 한번 기동전으로 바뀌는 시점까지-있는가, 또는 파악될 수 있는가?" 

 

"한 사회집단은 통치권력을 얻기 전에 이미 '지도'를 행할 수 있으며 또 행해야 한다(이것은 그러한 권력을 얻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들 중의 하나이다)." 

 

기동전(정면공격)에서 진지전으로의 이행 - 정치적 영역에서도 

"이것은 전후(戰後)의 시대가 제기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확한 답을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정치이론상의 문제인 것 같다... 진지전은 무한한 인민대중에게 크나큰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헤게모니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집중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개입주의적'인 정부가 요구된다. 이 정부는 기회주의자들에 대하여 더욱더 공개적인 공세를 취할 것이며, 내부적 해체가 영원히 '불가능'하게끔-모든 종류의 통제와 함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적인 '진지들'의 정치적/행정적 강화를-도모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정치/역사적 상황의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정치에서는 '진지전'에서의 승리는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포위된 진영에서의 지나치게 장기화되는 저항은 원래 사기를 저하시키게끔 되어 있다. 그러한 저항은 곧 고통과 피로와 휴식의 상실과 병, 그리고 단련시키는 첨예한 위험이 아닌, 오히려 파괴하고 마는 만성적인 위험의 항상적인 존재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K. 마르크스, <동방문제>, 1855년 9월 14일)"" 

  

'집단적 인간'과 '사회적 순응주의'의 문제 

"국가의 교육적/형성적인 기능. 국가의 목표는 언제나 새롭고 더 높은 단계의 문명유형을 낳고, 그 문명과 폭넓은 일반대중의 도덕을 경제적 생산장치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요구에 적응시키며, 그리하여 물리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새로운 유형의 인간성을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하나의 개인이 자신을 집단적 인간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고, 또 교육적 압력을 하나하나의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개인들의 동의와 협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필연성과 강제가 '자유'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 '법'의 문제. 이 개념은 현재로서는 법적으로 중립적이며 시민사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활동들까지도 포섭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제재'나 강제적인 '의무' 없이 작동하지만, 집단적인 압력을 행사하며, 관습이나 사고와 행동의 방식, 도돌들의 진화라는 형태로 객관적인 결과를 성취한다. 이른바 '영구혁명'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1789년부터 테르미도르에 이르기까지 자코뱅의 경험에 대해 과학적으로 의견을 진술한 표현으로, 1848년 이전에 생겼다. 이 정식은 거대한 대중정치적 정당과 거대한 경제적 노동조합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회가, 말하자면 여러 가지 점에서 아직 유동적인 상태에 있었던 역사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영구혁명'이라는 48년주의 공식은 확대되어 '시민적 헤게모니'라는 정식 속으로 극복된다... 곧 기동전은 갈수록 더 진지전이 되며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화로울 때 전쟁에 대해 세부적이고도 기술적으로 준비하여야만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정치에도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조직과 시민사회의 여러 단체들의 복합체에서 모두 볼 수 있는 현대민주주의의 대량적 구조들은, 말하자면 정치기술상 진지전의 전선에 설치된 '참호'와 항구적인 요새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전쟁의 '모든 것'이었었던 기동전의 요소는 이제 단지 '부분적'인 것이 된다..." 

 

헤게모니(시민사회)와 권력분립 

"...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에서 권력분립이 지니는 뜻은 근본적이다. 모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강점과 약점 모두가 바로 권력분립의 원리 속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약점의 원천도 분명해지는 바, 그것은 바로 관료주의, 곧 지도적인 요원의 고착화이다. 이 관료주의는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어떤 시점에 이르면 신분화된다... 권력의 분화 속에서 국가의 통일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의회는 시민사회와 더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사법권은 의회와 정부 사이에 위치하면서 성문법의 연속성을 대변한다(정부와 대립하면서까지도). 당연한 것이지만 세 가지 권력은 모두 정치적 헤게모니의 기관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서로 달라서 입법, 사법, 행정의 순서이다. 사법집행에서의 타락은 공중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나쁜 인상을 미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는데, 헤게모니 장치는 이 분야에서 특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경찰과 정치행정에서의 자의적인 행동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30~32)" 

  

  

| 3장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 

  

미국적인 문명과 유럽적인 문명 

"... 오늘날 이른바 미국주의라는 것은, 상당한 정도로, 마지막에 형성될 새로운 질서로 인하여 사실상 분쇄될 것이며 지금도 이미 사회적 공포와 절망과 햐체에 사로잡힌 낡은 계층들에서 나오는 섣부른 비판이다. 그것은 재건할 능력은 없으면서도 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측으로부터의 무의식적인 반동의 시도이다. 그러나 재건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질서로 인해 '폐기처분될' 사회집단들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노고로서 새로운 질서의 물질적 기초를 창출해야 할 부담을 짊어진 사회집단들에게서이다. 오늘날에는 '필연'인 것을 '자유'로 전화시키기 위해, 미국화되지 않은 독자적인 생활체계를 스스로 '찾아야만 할' 자들은 바로 그 사회집단이다... 술집의 생활이나 로터리클럽이 대변하는 식의 이데올로기로서 이해된 미국주의란, 새로운 형태의 문명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기본적 집단들 사이의 관계나 그 성격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미국적인 기후에 맞추어 새로운 외투를 걸친 것에 지나지 않는, 유럽문명의 유기적인 확장이요 강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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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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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출생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사르디니아
사망1937년 4월 27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인옥사
국적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직업철학자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1891년 1월 22일 ~ 1937년 4월 27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 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유년시절[편집]

여유있는 집[편집]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알레스에서 7형제중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의 민중들은 이탈리아 변두리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이었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알바니아 사람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될때까지 대령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폴리출신으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람시의 어머니도 보카치오시인의 글을 읽을만큼, 보기 드물게 지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다.

집안의 어려움[편집]

부친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급정부관리로 일하다가 공금횡령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진짜 이유는 지방유지들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방유지들의 독재가 만연해 있었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버지는 이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1] 그래서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농사로 가정을 돌봐야 했고 쓰다버린 초의 토막을 다시 썼다. 4살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병약[2]그람시도 하루에 열 시간이상 일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그럼에도 호기심, 상상력, 밝은 성격,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다. 몸이 약하니까 격렬하고 거친 놀이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렸고 독서와 나들이를 좋아하며 고슴도치와 도마뱀을 보고 관찰하였다.

사회주의 입문[편집]

아버지가 석방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람시는 1908년 칼리아리 고등학교에 재입학했으며, 형 젠나로와 동거했다. 젠나로는 토리노에서 복무하던 중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1892년 결성-1994년 해산)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동생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르디니아는 영화 《빠드레 빠드로네》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들이 배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와 가난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학교가 아니라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서 양을 치게 할 정도로 가난한 동네여서, 광부들과 농민들의 민중 운동이 치열했는데,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모두 군대와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이를 보고 자란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생 시절[편집]

1911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람시는 학문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지역 장학생으로 선발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시절 그는 학문(그리스 문학역사,철학언어,법학)을 공부했으며,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산 전공학과(언어학) 교수의 권유와 언어와 철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나쁜 건강탓에 1915년 4월 문학시험을 끝으로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사회주의운동[편집]

1913년 친구 타스카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입당한 그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업도시인 토리노에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하여,가두시위(1904년),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1912년,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75일간 진행됨),금속노조(FIOM)의 지도로 진행된 파업투쟁(1913년,93일간 진행됨)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를 본 그람시는 토리노 노동자들이 북부 자본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단결력과 남부 농민대중을 이끌 수 있는 지도능력이 있음을 알았다.그래서 그는 1915년부터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 토리노판 편집위원회 활동, 사회당 지역주간지 《민중의 외침》(Grido del Popolo)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는데, 그의 관심분야는 사회와 정치,노동운동제 2 인터내셔널의 짐머발트 회합, 반전결의, 문화비평등 다양하였다. 1917년에는 《전진》에 〈자본에 대한 혁명〉(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말함.)을 기고하였다. 1917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대단히 전투적으로 전환되어가는데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몰두, 점차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1919년 토리노 대학교 동창인 안젤로 타스카움베르토 테라치니팔미로 톨리아티와 사회당 내 급진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할 잡지 <신질서 Ordine Nuovo> 를 창간하는데 이 잡지는 후일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가 됐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편집]

배경[편집]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당의 미온성[편집]

1919-20년(붉은 2년)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공장 평의회운동이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의 결탁으로 실패하자 그람시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사회당의 미온적 공장 평의회 지지 및 전반적인 보수주의성향에 있다고 보고 사회당을 이탈, 1921년 리보르노에서 전투적 맑스-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진보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다.

사회당의 무능함[편집]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초에는 두 가지 상극적이지만 중요한 현상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이탈리아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1915년 전직 사회주의자 무솔리니에 의해 시작된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은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거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공산당내 이념논쟁[편집]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아메데오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사회당(PSI)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이탈리아 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도록 명하던 코민테른과 갈등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절감하면서 차츰 보르디가의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에 회의를 갖기 시작,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끝까지 사회당 독자혁명을 고집하던 보르디가는 당내에서조차 차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그람시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체주의의 사회주의 탄압[편집]

사회주의 사냥[편집]

1922년 10월 로마 진군과 자본가,제대군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토양으로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정권은 집권 초기인 1922년과 1926년 사이, 노동운동에 대해 강온정책을 함께 사용해 대응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회진출을 허용하는 한편, 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같은 노동운동은 탄압하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이탈리아내 진보세력을 탄압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편집]

이탈리아 공산당은 1924년 선거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의회에 진입하는데, 이때 그람시도 하원 의원이 됐다. 그람시는1926년 1월,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투옥과 죽음[편집]

무솔리니 정부가 그 해 가을 파시스트 국민당(PNF)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1926년 11월 경찰에 체포됐다.경찰은 불법정당 활동을 구실로 그람시를 체포했으나 실제로는 무솔리니가 명석한 머리로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그람시의 지도능력을 두려워해서 생긴 일이다. 그 증거로 수석검사는 재판에서 그람시는 매우 머리가 좋으니 20년간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로맹 롤랑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은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혔다'고 비판하며, 그람시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람시는 재판에서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됐고 결국 1937년 4월 별세했다. 무솔리니는 사실상 그의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된 후에야 그람시의 석방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상[편집]

그람시는 수감 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기록한 공책을 30개 이상 남겼다. 이 글은 감옥에서 공책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옥중수고》(Prison Notebook)라고 알려졌으며 그람시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의 것으로 인식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비판적 이론과 교육 이론 등이 담겨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사회주의자들과 맑스주의자들에게 당면 과제는 파시즘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반동적 부르주아 운동의 또 다른 운동에 불과하다고 보며 파시즘 운동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라는 면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학자들처럼 단순히 서구문명의 일탈로 보는 것도 아니고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 보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해야할 쁘띠 부르주아(소시민)와 노동자 계급조차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은 정통적 맑스주의자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편집]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옥중에서 공책에 쓴 책이다. 그람시의 중요한 이론적 관심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그람시나 루카치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더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들을 "상부구조의 이론가"라고 부른다. 더욱 중요한 차별성의 하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 결정되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그때 인간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이나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해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변화되긴 하나 필연적으로는 붕괴할것이라고 여긴다. 이에 비해 루카치,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려한 것이다. 루카치의 물화이론도 이런 맥락이며, 그람시는 정치학적 견지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학자는 1871년 파리 꼼뮨을 전후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몰락의 징조로 보았으며,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자본주의 몰락의 징조를 발견하였음에 반해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벗어나 안정화되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또 한 번 전도시켰다고까지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전도시켰다면,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정치와 헤게모니, ⓑ역사적 지배블록,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 ⓔ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강제의 측면과 동의의 측면으로 어떤 사실, 어떤 지배도 100% 강제와 100% 동의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 두 개가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마르스크주의과 다른, 진보된 국가론이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에서는 국가는 강제기구라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수단,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다고 간파했다. 국가가 지닌 기능의 복합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람시는 현실주의적 정치이론을 최초로 정리한 마키아벨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보았다.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이다. 마르크스 시대의 국가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로 시장질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면서 기본적 질서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국가는 경제사회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로까지 확대되었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시키려고 확립하였다.

국가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대표이며 시민사회는 사적인 영역의 대표이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매개로 공식화된다고 보았다. 즉 시민사회가 국가영역을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국가기능이 점차 확대되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된다. 그 시민사회를 통해 국가는 모든 의식과 조직에 침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며, 그런 속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일 수밖에 없다. 강제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은 정치사회이고, 동의를 창출하는 부분은 시민사회이다. 그람시의 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이다.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구의 사회과학속에는 국가(공적 영역)와 사회(사적 영역)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집단,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이런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는 바로 이런 시민사회 영역에까지 침투, 사회 각계 각층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면서 독재(강제)와 헤게모니(동의)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헤게모니 이론[편집]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에 의해 계급동맹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마르스크주의 이론가들에게 헤게모니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런 헤게모니를 그람시는 새롭게 해석했다. 계급적 동맹의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지배질서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 매개로 기본적 집단과 추종집단이 융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수준에서까지 통합을 이루어내고 추종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까지 창출해내는 것이 헤게모니이다. 즉 헤게모니는 정치적 강제와 지적 도덕적 동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의 헤게모니는 계급동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농민계급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융합이라는 완전 통일, 통합된 형태이다. 헤게모니 구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단순히 기본계급의 이익을 추종세력이나 동맹세력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집단의 근본적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범위내에서 추종/동맹세력의 이익을 수용, 융합해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헤게모니지배가 구축될 수 있다. 따라서 헤게모니 집단이 되려면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익(좁은 의미의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집단의 이익을 포괄,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적 지배를 성립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계급(집단)이 될 수 있다.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 공통의 집단의지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이럴 경우에 역사적 지배블록이 형성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 변형주의(Transformism) : 수동적 동의이며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 기본집단들이 동맹집단에 의해 산출되는 능동적요소, 심지어는 적대적 집단으로부터 나오는 요소까지를 점진적으로 흡수,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서 추구.
  • 확장적 헤게모니 :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의 융합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마침내 민족적, 민중적의지로 까지 확장되어가는 헤게모니이다.

기본집단(기본계급)에 대해선 그람시가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계급이란 개념은 경제적 개념이고, 집단이란 개념은 반드시 경제적 개념은 아니다. 기본계급이라고 할 때, 경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계급을 들 수 있다.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이다. 기본집단이라고 할 때, 사회/정치/문화/이데올로기영역에서 공통의 이익을 같은 것을 집단이라고 하기에 이것은 상부구조의 표현이다.

기본집단을 통해 나타나는 헤게모니는 그러므로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토대에서 형성되는 질서와 상부구조에서 형성되는 질서를 어떻게 집중시키느냐의 문제를 그람시는 애매하게 남겨두었다. 기본계급만이 기본집단으로서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람시를 마르스크주의라고 취급하는 것이다.

기본계급이 헤게모니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계급에 대한 확실한 리더쉽을 확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도적 집단(공통이익, 세계관같은 이들의 집단)이 역할을 수행하며 지도적 집단을 매개로 헤게모니질서가 확립된다. 시민사회에서 기본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세력의 이익을 이용/접합함으로써 헤게모니질서를 확립한다. 이때 나타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의 국가이다.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강제기구로서 국가기구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강고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 남아 있는 한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점령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람시는 서구 부르죠와 지배 질서가 얼마나 강고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장고한 기간과 인내가 필요한가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서구의 진지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이들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보았다. 대중운동으로서 노동계급보다는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강조했다. 레닌이나 루카치에게 있어서는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에게서보다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람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기적 지식인[편집]

그람시는 지식인을 크게 두가지로 구분했다.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인간의식, 관념, 사상 등의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인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하부구조가 형성될때에는그것을 옹호하고 전파시키는 그들 나름의 지식인 계급을 배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면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이 가진 집단의지를 결집/확산시키는 특수한 성격의 집단이고 이것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이다.

전통적 지식인은 유기적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창출한 생산양식이 붕괴되었음에도 살아남아 현존하는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예술가작가철학자성직자 등이 그 유형이다. 모든 질서는 지도집단이 나오면 유기적 지식인 집단이 없이 헤게모니적 질서는 창출될 수 없다. 상부구조의 측면에서 기본계급, 지도적 집단의 세계관과 의지를 형성, 결집확대시키는 역할, 즉 계급적 지배가 헤게모니적 지배가 될 수 있게 한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대로의 헤게모니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싸움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쟁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싸움인 상황에서 유기적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할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 집단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기 계급의 새로운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함과 동시에 전통적 지식인을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려 했으며,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의 진정한 존재 방식은 대중과 깊이 연결되어 실천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른 계급의 이익을 포괄할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여 부르죠와적 이데올로기를 파괴시키고 나중에 정치적 부분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그룹의 총체가 "당"이라고 봄으로써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레닌주의적 전통속에 서구사회의 독자성을 추구하면서도 레닌주의의 틀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정[편집]

그람시의 공로라고 한다면, 1920년대, 30년대에 정통적 마르스크주의들의 논리의 밑바탕에서 깔린 경제주의적 해석을 극복하려고 했던 최초의 마르스크주의 이론가이다. 경제주의적 해석의 특징은 무엇인가? 환원주의와 반영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상부구조의 영역(정치문화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경제적 요인에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저항한 인물들이 루카치(계급의식의 중요성)와 그람시(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독자적 자율성을 갖는 영역으로 인식)이다. 반영주의는 국가는부르죠와 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도구적 기구라는 식으로 토대적인 것을 반영하는 기구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고 그 자체는 물질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토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피동적/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기본명제 ①∼④에 주요한 수정을 가한다. 상부구조의 자율성과,이데올로기영역의 상대적 자율성, 물질성등이다.

결정론적 해석을 또한 배격한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배제된 어떤 객관적 힘, 관계,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배격한다. 그람시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투쟁과 노력, 승리와 패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람시는 마르스크주의자이기에 자본주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강고성과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바라보면서 상당한 기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적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긴다. 단순한 기계론적 과학주의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영향[편집]

참고 문서[편집]

저서목록[편집]

그람시의 저술[편집]

  • 감옥에서 보낸 편지 (양희정 역) Lettere dal carcere, Einaudi, Torino 1947.
    •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까 (임미진 역)
  • 옥중수고 이전(김현우, 장석준 역) (1914-1926 사이의 글 모음)
Scritti giovanili. 1914-1918, Einaudi, Torino 1958.
Sotto la mole. 1916-1920, Einaudi, Torino 1960.
Socialismo e fascismo. L'Ordine Nuovo 1921-1922, Einaudi, Torino 1966.
La costruzione del Partito comunista. 1923-1926, Einaudi, Torino 1971.
  • 옥중수고 (이상훈 역) :I quaderni dal carcere
Il materialismo storico e la filosofia di Benedetto Croce, Einaudi, Torino 1948.
Gli intellettuali e l'organizzazione della cultura, Einaudi, Torino 1948.
Il Risorgimento, Einaudi, Torino 1949.
Note sul Machiavelli sulla politica e sullo stato moderno, Einaudi, Torino 1949.
Letteratura e vita nazionale, Einaudi, Torino 1950.
Passato e presente, Einaudi, Torino 1951.
  • 편집본
    • 남부 문제에 대한 몇가지 주제 외(김종법 역) / 이탈리아 남부 문제에 관한 글 모음
    • 대중문학론(박상진 역)
    • 그람시와 함께 읽는 문화(조형준 역)

관련서[편집]

  • 안토니오 그람시와 문화정치의 지형학-일상생활의 사회학적 조망을 위하여(이성철 지음| 호밀밭 펴냄 | 2009)
  • 다시 그람시에게로(칼 보그 지음| 강문구 옮김| 한울 펴냄 | 2007)
  • 안토니오 그람시(김현우 지음| 살림 펴냄 | 2005)
  • 그람시 문화 인류학 (케이트 크리언 지음| 김우영 옮김| 길 펴냄 | 2004)
  • 그람시의 여백 -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르네이트 홀럽 지음| 정철수 외 옮김| 이후 펴냄 | 2000)
  •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페리 앤더슨 지음| 김현우 옮김| 갈무리 펴냄 | 1995)
  • 그람시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샹탈 무페 지음| 장상철 옮김| 녹두 펴냄 | 1992)
  • 그람시(주세페 피오리 지음| 신지평 옮김| 두레 펴냄 | 1991)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이동 살림지식총서《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김현우 지음/살림 p.7
  2. 이동 그람시는 4살때 사고로 등이 굽는 장애인이 되었으며,신경성 질환등의 병들에 시달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장성한 후에도 조그만 과 수의를 준비했다고 한다.하지만 그람시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적 약자 곧 민중의 편에서 생각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게하였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민중들이 자본가와 지배계급의 폭력 곧 억압과 차별로 받는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진 것이다.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D%86%A0%EB%8B%88%EC%98%A4_%EA%B7%B8%EB%9E%8C%EC%8B%9C 

 

  

... 

  

  

우리는 그람시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
[장석준의 '적록 서재'] 그람시의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2012.08.10 17:29:00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 이 사람만큼 다양한 얼굴로 해석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이른바 민주 진보 연립 정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를 들먹이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이들도 그를 추앙한다. 현실에서 전혀 화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서로 다른 정치 노선에 선 사람들이 저마다 다 그람시를 전거로 내세운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다.

가령 1970년대에 그람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바깥에서 주목받기 시작할 때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가장 앞장선 것은 영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유로코뮤니스트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당원 수 200만 명을 자랑하고 30퍼센트 이상의 득표율로 주요 지방자치단체 여당 자리를 석권한 이탈리아 공산당을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좌파가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치켜세웠다. 이들이 보기에 이 당의 성공을 뒷받침한 이론가가 바로 그람시였다. 즉, 이들에게 그람시는 유로코뮤니즘의 창시자였다. 

하지만 그람시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은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했다. 홉스봄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저명한 좌파 이론가이며 역사학자인 페리 앤더슨이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앤더슨은 자신이 편집을 맡은 잡지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작심하고 발표한 정말 긴 논문('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갈무리 펴냄, 1995년))에서 '유로코뮤니스트 그람시'의 이미지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그람시는 분명 이 땅에 살다 간 '한' 사람이었는데, 홉스봄의 그람시가 다르고 앤더슨의 그람시가 또 다른 것이다. 한편에는 혁명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간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로코뮤니즘 선구자 그람시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 흡수되기 십상이라고 경고하는 그람시가 있다. 누구나 과거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도가 좀 심하다. 이게 그람시란 사상가를 둘러싼 전 세계적 상황이다. 

사실 그람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물론 그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람시 사상의 정전(正典) 역할을 하는 저작이 <옥중수고>(<그람시의 옥중수고>(전2권, 이상훈 옮김, 거름 펴냄, 1999년)인데, 이 책은 그가 감옥에서 공책에 적은 메모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도 아닌 메모들이다. 아마 그 자신도 몇 년 뒤에 다시 봤으면 뭘 생각하고 쓴 것인지 알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파시스트 체제의 감옥 안에서 썼기 때문에 검열을 의식해서 암호를 사용하거나 애써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독자가 읽기에 부적합한 물건이다.

암호는 해독되기 나름이다. 메모는 이어붙이기 나름이다. 따라서 암호로 채워진 이 메모 다발은 요란한 해석의 전투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람시 읽기의 근본적 난점이다.

<옥중수고> 이전의 글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옥중수고> 너머로 확장해보면 된다. 그람시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도 상당한 분량의 글들을 남겼다. 그 중 다수는 좌파 정당 활동가로서 당 기관지나 좌파 신문에 남긴 논설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분량의 문예 비평도 남아 있다. 

투옥되기 전에 쓴 글들은 <옥중수고>를 손에 든 독자들을 숨 막히게 하는 새롭고 낯선 개념어들의 중구난방 실험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글들은 당원이나 노동조합원을 독자로 하여, 아주 구체적인 정치 쟁점들을 간명하게 다루고 있다. 좌파 정당의 젊은 지도자이자 무솔리니 집권 초기에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의 문제의식이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옥중수고> 이전 논고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옥중수고>의 어지러운 숲 속을 헤쳐 나갈 지도와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옥중수고> 이전 글들의 명료한 언어를 통해 투옥 이전 그람시의 고민을 날것으로 확인한 뒤에 <옥중수고>로 뛰어들면 뭔가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저런 해석가의 그람시 말고 감옥 밖 숙제를 감방에 끌고 들어와 씨름하는 그 사람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그람시를 읽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1990년대에 한국에도 적지 않은 수의 그람시 소개서나 연구서가 소개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옥중수고> 이전의 그람시는 <옥중수고>의 전사(前史) 정도로 간략히 언급될 뿐이었다. 더 나아가, 마치 알튀세 학파가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을 이야기하듯이, 초기 그람시(공장평의회 운동 시기)와 후기 그람시(<옥중수고> 시기)를 나눠 둘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다루는 책들도 많았다. 

이에 대한 불만 때문에 나는 2000년대 벽두에 지금 진보신당 녹색위원장으로 있는 김현우와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갈무리 펴냄, 2001년, 이하 <옥중수고 이전>)이라는 책을 번역했다. 영국의 그람시 연구자 리처드 벨라미가 투옥 이전의 정치적 논설들을 골라 모아 놓은 선집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이 책의 번역에 뛰어든 것은 만용이었다. 그람시 정도의 거장의 저작을 번역하는 일은 아무나 손대서 될 게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는 이탈리아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영어본을 중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감히 번역에 나섰다. 그만큼 <옥중수고> 이전 글들을 소개하는 게 그람시의 이해에 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번역 과정에서 이를 더욱더 절감했다. 그람시가 20대 초부터 쓴 짧은 글 한 편 한 편을 세밀히 읽고 우리말로 옮길 때마다 계속 <옥중수고>의 난해한 공식들, 그람시 사상의 전체상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특히 번역자들이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이란 글을 강독할 때는 어떤 개안(開眼)의 환희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논했던 그람시와 <옥중수고>는 모두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느낌이었다. 

<옥중수고 이전>이 나온 지 3년 뒤에 한국의 독자들은 바로 이 글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더 정확한 우리말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김종법이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책세상 펴냄, 2004년, 이하 <남부 문제>)라는 제목의 작은 선집을 낸 것이다. 이 책은 <옥중수고> 이전 그람시의 글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요령 있게 모아놓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영어본을 통한 중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원전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그람시의 정치 저작 중에서 이탈리아 원전으로부터 직접 우리말로 번역한 책은 이것이 유일하다. 비록 얇은 문고판 선집이지만, 한국의 그람시 소개·연구사에서 한 획을 그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남부 문제, 이탈리아 자본주의 그 자체 

▲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흔히 그람시 일생에서 최초로 주목받은 논설로 꼽는 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두 달 뒤에 발표한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이다(이 글은 <남부 문제>에는 없고 <옥중수고 이전>에 실려 있다). 이 글의 발단은 이탈리아 사회당 내의 참전 논란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전쟁 초기에 이탈리아 정부가 중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과는 달리 전쟁 찬반 문제로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나라 좌파 정당보다 더 원칙적이어서 전쟁 지지의 오명에서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냥 상황 덕분이었다.

그런데 당의 저명한 좌파 논객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른바 '효과적인 중립'론을 들고 나오면서 파란이 일어났다. '중립'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참전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무솔리니는 당을 떠나게 되고, 결국 파시스트당의 두목이 된다. 아무튼 그람시의 글은 무솔리니가 불러일으킨 사회당 내 참전 논란에 대한 논평이었다.

그런데 이 글에는 전쟁 문제라는 본 주제 외에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그것은 글 첫머리에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탈리아 역사의 현재 국면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의 역할(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일반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바치고 있는 사회당은 이탈리아의 사회당, 즉 인터내셔널을 위해 이탈리아 국가를 장악해야 할 과제를 떠맡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그 지부이기 때문이다. 이 직접적 과제, 이 일상적 과제는 당에게 특수한, 국민적 성격들을 부여하며 이탈리아의 생활 속에서 특수한 역할, 독특한 책임을 떠맡도록 한다." (<옥중수고 이전>, 63~64쪽. 강조는 원저자) 

이 인용문에서 젊은 그람시는 '이탈리아'라는 말을 몇 차례나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이탈리아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 실천 과제를 끌어내는 일을 중요시했다. 그람시가 세상에 말문을 연 첫 번째 글의 서두에서 이 과업을 힘주어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3세의 청년 사상가가 자신 평생의 과제를 선포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는 혁명 일보직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특히 그람시가 활동하던 공업 도시 토리노에서는 피아트(Fiat)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공장 평의회 운동이 불붙었다. 1920년 여름, 한창 점거 파업을 벌이던 피아트의 공장 평의회는 경영진 없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초유의 실험을 펼쳤다. 당시 <새 질서(L'Ordine Nuovo)>라는 사회주의 신문을 발간하던 그람시와 그의 젊은 동지들이 이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를 통해 일약 이탈리아 좌파의 새 지도자군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1년 뒤, 사회당의 리보르노 당 대회를 앞두고 그람시는 <새 질서>에 논설 하나를 발표했다. 이것이 <남부 문제>에 수록된 '리보르노 전당 대회'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람시는 이탈리아 자본주의가 남부 농촌 지역에 대한 북부 도시들의 수탈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거대한 대중 투쟁이 성과 없이 끝난 게 불과 몇 달 전인 상황에서 사회당이 당 대회를 통해 확인해야 할 도전 과제가 바로 이 문제임을 그람시는 강조한다. 

사실 이탈리아 남부 농업 지대의 저발전에 대해서는 그람시 이전에도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남부 문제'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람시는 이것을 단순히 남부만의 문제로 따로 떼서 바라보지 않았다. 이것이 남부 문제를 강조한 다른 이들과 그람시 사이의 차이였다.

그람시는 남부 문제를 북부와 남부 사이의 불균등 결합 발전의 문제로 보았다. 즉, 북부의 발전이 남부의 저발전에 바탕을 두고 이뤄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남부 문제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와는 별개로 존재하거나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모순들 중 단지 하나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탈리아'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발전 노선을 좇아 권력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농촌을 산업 도시에 예속시키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를 북부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탈리아 부르주아 국가에서 도시와 농촌 간의 문제는 단순히 대규모 산업 도시와 같은 지역과 그 도시에 직접 예속된 농촌 사이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에서의 한 지역과, 이 지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채 세부적인 특징에 있어서 구별되는 다른 모습을 가진 지역 간의 문제를 함께 나타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를 통해 지배와 착취를 수행한다. 즉,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직접 작용하고, 국가 안에서는 가난한 농민들과 반프롤레타리아들로 구성된 이탈리아 노동 민중을 포함해 보다 광범위한 계층들에 작용한다. 분명한 것은 산업 노동 계급이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손아귀에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쟁취할 때에만 이탈리아의 국민적 삶의 중심 문제, 즉 남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부 문제>, 43쪽)

그람시는 북부의 자본가, 은행가들과 남부 농업 블록의 반동적 지배층 사이의 동맹이 이탈리아 지배 체제의 중심 기둥이라 보았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배 세력들 사이의 동맹은 남부 문제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북부 산업 노동자 계급과 남부 농민이 이 동맹의 하위 구성 요소로 포섭될 때에만 남부 문제는 완성된다. 달리 말해, 대중이 지배 체제에 '끼워 맞춰져야만' 지배는 최종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그랬다. 북부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남부 농민들에 대한 북부 자본가 계급의 수탈 덕분에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 수준을 유지하는 셈이었다. 레조 에밀리아 같은 북부 공업 지대에 뿌리를 둔 사회당 및 노동조합 내부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문제에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북부 제조업 호황의 이득을 나누는 데 골몰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거들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남부 농민들은 북부 노동자들을 '노동 귀족'으로 질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분열이 지배 체제의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데 화룡정점 역할을 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 운동의 단절적 자기 혁신이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이제까지 개혁주의자들은 대중의 분열을 극복하기는커녕 그것이 작동하는 데 부속품 역할을 해왔다. 반면 새 시대 사회주의 운동은 무엇보다도 북부 산업 노동자 계급과 남부 농민들 사이의 동맹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심장에 육박해 들어가는 도전이다. 

"리보르노에서 있을 공산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 사이의 단절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혁명적 산업 노동 계급은 국가 기생주의 안에서 타락해버린 사회주의의 경향들과 절연할 것이다. 혁명적 산업 노동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귀족주의를 창조하기 위해 남부에 대한 북부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경향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귀족 정치란, 부르주아 보호 무역주의 관세 제도에 밀착해 협동조합적인 보호 무역주의를 수립했으며 노동 대중 대부분의 지원으로 노동 계급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국가의 다른 생산력에 대한 산업 및 금융 자본주의 지배의 합법적인 형태다.

(…) 노동자 해방은 오직 북부의 산업 노동자들과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의 연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이 연합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분쇄할 것이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농업에 필요한 산업 생산의 새로운 제도를 건설할 것이고, 이탈리아의 후진적 농업을 산업화하고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될 산업 생산의 새로운 기구를 건설할 것이다." (<남부 문제>, 43~44쪽)


'역사적 블록' : 그람시의 분석의 목표이자 실천의 출발점 

리보르노 당 대회에서 사회당은 결국 둘로 쪼개졌다.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당 내 좌파들은 공산당을 새로 만들었다. 그람시도 새 당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람시는 1926년 파시스트 정부에 검거돼 이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은 1926년 투옥되기 직전에 쓴 글이다. 그람시의 체포로 인해 이 글은 4년 뒤에야 공산당의 망명 기관지에 발표되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옥중수고> 이전에 쓴 논설들 중 마지막이자 <옥중수고>의 사색이 시작될 시점의 그람시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수고(手稿)다. 이 글이야말로 <옥중수고>의 난삽한 원고 더미를 실로 꿰어주는 역할을 하는 서문이다.

이 글에서 그람시는 남부 문제를 다시 한 번 그리고 더 정교하게 다룬다. 그 요지는 리보르노 당 대회 시기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남부 문제가 작동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한 분석이 더욱 상세해졌다. 이 분석은 '국가-시민사회', '헤게모니', '전통적 지식인-유기적 지식인', '수동 혁명', '기동전-진지전' 같은 <옥중수고>의 개념어들을 예시하는 착상들로 가득하다. 감옥 안 그람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게 미발표 원고인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의 내용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리보르노 당 대회를 앞둔 그람시가 북부의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남부 문제의 작동에 한 몫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에서는 남부 지식인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람시가 보기에 남부의 주류 지식인들은 반동 지주층과 교회를 중심으로 한 남부 농업 블록이 지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때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남부 출신 지식인 베네데토 크로체도 이런 관점에서 매섭게 비판한다. 

"남부에서는 농업 블록 위에서, 지금까지 농업 블록의 균열이 너무 위태로워지거나 블록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는 상황을 예방하는 데 실제적으로 봉사해온 지식인 블록이 작용하고 있다. (주스티노) 포르투타토와 크로체가 이러한 지식인 블록의 대표자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한 반동적 인물들이라고 여겨진다. 

(…) 이러한 의미에서 크로체는 매우 중요한 '국민적' 기능을 완수했다. 그는 남부의 급진적 지식인들을 농민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들이 국민적이고 유럽적인 문화에 참여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문화를 통해 이 지식인들이 국민적 부르주아 계급에 그리고 결국 농업 블록에 동화될 수 있게 만들었다." (<남부 문제>, 98~100쪽)
 

그만큼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지식인'이란 크로체 같은 대학자만 지칭하는 게 아니다. 크로체 식의 사고가 대중에게 스며들어 일상의 관계들에 시멘트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람시가 말하는 '지식인', 후에 <옥중수고>에서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이들이다. 이들의 일상의 고투가 없다면, 지배 블록에는 금세 금이 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는 노동자 계급과 농민 사이의 동맹에 대한 고민도 지식인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동맹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부 농민들 내부에서 성장한 새로운 지식인 집단이 북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대변자들과 만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목한 게 <자유주의 혁명>이라는 저널을 통해 남부 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주창하던, 그람시와 동년배이자 남부 출신 지식인인 피에로 고베티와 그 주위의 그룹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당 동지한테서 <자유주의 혁명>의 사상적 조류에 맞서 투쟁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곤 했다. (…) 우리가 고베티에게 대항해 싸울 수 없었던 것은, 적어도 그가 운동의 주요 노선에 있어서만큼은 반대해서는 안 될 운동을 지향하고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인 문제와, 지식인들이 계급 투쟁에서 지향하는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베티는 실제로 우리를 다음과 같은 계층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 그는 북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남부 문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좀 더 총체적인 연결을 통해 전통적 다른 영역 위에 남부 문제를 상정했던 일련의 남부 지식인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남부 문제>, 102~103쪽)

안타깝게도 고베티 역시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 정권과의 투쟁 과정에서 순교했다. 하지만 그람시의 기대대로 이들 그룹('행동당'으로 발전한다)은 이후 반파시즘 투쟁에서 공산당과 더불어 양대 축 역할을 한다.

아무튼 그람시가 바라본 남부 문제의 전체상이 이러했다. 이 그림은 역사 유물론의 전통적 도식인 '토대/상부 구조' 틀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남부 문제는 '토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덧씌워진 '상부 구조'의 문제도 아니다. 흔히 그람시를 '상부 구조'의 사상가라고 하는데, 남부 문제와 대결한 그람시는 결코 '상부 구조'만을 강조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옥중수고> 시기의 그람시는 '토대와 상부 구조의 통일'로서, 사회를 이들이 통일된 구체적 양상으로 파악한다는 요청으로서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 개념을 제시한다. 이후 <옥중수고>의 해석가들은 '시민 사회', '헤게모니', '진지전' 등의 개념에 비해 '역사적 블록' 개념을 상대적으로 가볍게만 다루곤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었다. 

그람시는, 굳이 말하면, '역사적 블록'의 사상가였다. 나머지 개념 실험들은 모두 다 '역사적 블록'의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람시에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과제는 우선 자신이 속한 사회를 '역사적 블록'으로서 포착하는 일이었다. 즉, 한 사회가 지구 자본주의에 끼워 맞춰져 있는 특정한 조건에 바탕을 두고 다시 그 사회의 대중이 자본의 운동에 끼워 맞춰지는 구체적 양상(=역사적 블록)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본'의 추상적 운동을 파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사회'가 이에 결합되어 있는 양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간파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 분석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수동혁명' 등의 개념들이었다. 역사적 블록에 끊임없이 응집성을 부여하는 힘이 곧 '헤게모니'다. 그리고 일상의 노동을 통해 이 헤게모니가 지속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세력이 곧 지배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이다.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는 이런 유기적 지식인들의 활동이 대중의 혁명적 분출을 다시 지배 체제에 끼워 맞추는 '수동혁명'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탄생 

그럼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기존 '역사적 블록'의 타파와 새로운 건설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람시에게 이 길의 출발점만큼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것은 자본의 지배에 대중의 생활이 끼워 맞춰진 바로 그 지점에서 대중들 스스로(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가) 이제까지의 관성을 과감히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적 블록'의 중심에 위치한 대중 내부의 분열 및 포섭의 지점에서 이러한 외침이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하지 않겠어!" 

그래서 1920년 토리노 파업 당시 조반니 졸리티 총리의 자유주의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과감한 양보 조치(임금 대폭 인상에 노동 시간 단축, 게다가 경영 참여 권한까지!)를 제시했을 때, <새 질서>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이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졸리티 정부의 제안은 결국 토리노의 투쟁과 동시에 들끓던 남부의 민심은 짓밟으면서 반면 북부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북부 자본의 지불 능력으로 포섭해보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실제로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 계급조합주의는 승리를 거두겠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와 안내자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이며, 농민 대중에게도 부르주아와 같은 수준에 있는 착취자로 인식될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언제나 그랬듯이 농민 대중에게, 그들의 고통과 비참한 빈곤의 유일한 원인으로 여겨질 핵심적 특권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를 소개하려 들 것이다." (<남부 문제>, 86~87쪽)

그렇다. 처음에는 어떤 집단적 '행위'가 필요하다(<파우스트>). 1920년의 이탈리아 상황에서 그런 '행위'란 곧 북부의 노동자들이 남부의 수탈과 결합된 일체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유기적 지식인들이 여기에 달려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원초적 '행위'를 해석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며 이를 확산시켜야 한다. 그럼 이제 이 '행위'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사회관계들의 원형이자 지속적 참조점이 된다. 이러한 반복과 확산의 과정이 곧 대항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이며, '진지전'이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지적, 도덕적'이란 수식어를 즐겨 사용했다. 이 용법에 따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지배 대중 측의 '지적, 도덕적' 행위다. 그런데 여기에서 '도덕적'이란 말이 막연한 윤리적 행위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기존 '역사적 블록'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대중의 분열과 포섭을 낳는 그 사회관계들을 뒤집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만들어내는 실천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자본'의 지배를 '사회'의 자기 통치로 대체할 그 주역, 즉 '사회'를 새로이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지배 대중이 기존 '역사적 블록'의 반복을 끊는 행위에 착수하고 이 행위를 씨앗 삼아 구성할 새로운 관계들은 곧 '자본'을 대체할 '사회'의 실체, 그것이다. '자본'의 운동에 결박되어 있던 '사회'가 드디어 스스로 그 결박을 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람시의 사상 전반은 '자본'을 대체할 '사회'를 어떻게 실체화할 것이냐는 '사회주의'의 가장 심층에 자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이기도 하다.

흔히 그람시를 '정치 이론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치'의 이미지와 범위에 따라 그람시를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람시에게 '정치'란 분명한 자기만의 맥락과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피지배 대중의 집단적인 윤리적 '행위'를 이끌어내려는 일체의 노력이다. 여기에서 주어는 어디까지나 대중들 자신이며, 그 포부는 몇몇 정책적 지향을 넘어선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가 이런 것이다. 그람시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북부 도시와 남부 농촌 사이에 작동하던 모순이 어찌 보면 노동 계급 내부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현직-실직, 남성-여성 등의 분열로 작동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정치'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람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대화해야 할 사상가이자 우리 실천의 선배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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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저자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출판사
거름 | 2006-12-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그람시의 옥중수고』 제1권 《정치편》.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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