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들 남긴 술잔엔
빈잔 위로 슬며시 비껴앉은 석양은
뺨우에 달아오르고 취하지도 않아
비틀거릴 수 있던 자유는 어디에
어눌해진 말솜씨가 자랑이 되는 시대
그만큼 희망을 이야기하진 않아
나빠진 건 아냐
좀 더 진지해졌을 뿐이지
진지하다는 말도 필요없는지 몰라
다만 우리에겐 한갓 치기도 정열도 아닌
무언가 남아서 부여잡고 싶은 게 있지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한대서 뭐 나빠
어쩜 서로 등 다독거리는 기다림은 아닐까
그것마저 낡아버린 시대
그만큼 조급해지지도 않았어
아니 길이 너무 멀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알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은
先輩들을 잃어왔던가......
우리가 늘 비판하고 질시하던 그 노땅들
그들이 남겨논 건 없어
땀냄새나 맡기 위해 모인 건 아니잖아
위로도 필요없지
때론 지겹기도 해 올바르지 않겠지
다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지
저렇게 떠들던 녀석들 이제 보이지도 않아
남아서 잔만 채우면 잔만 들어도 슬퍼지는 걸
누군 안 그렇겠냐며 서로 믿을 수 있다는 힘
그 힘 때문에 사그러진 청춘들도 있었다는 것
그 청춘들 땜에 더더욱 죄의식 속에 살기도 해
살아남는다고 위로받지도 못하는 치열한 시대
서로 바득바득 우겨대던 알리바이는 없어
옆에서 고개를 떨구던 이에게 왜 우린 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는가를 반성하고 있지
며칠전의 안부로 위안삼기엔 괴로운 추억
추억의 한줌 재를 털면 일어서는 얼굴들
불우한 영혼들이여 이제 잔을 비우자
성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성낼 줄 아는
단호함까지 배운 우리들이기에
이깟 슬픔쯤 거두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다가서는 기억들, 그 옆언저리에서
지금 이렇게 어깨처진 육신들은
왜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일까
고단하게 떠나는 자리에서
석양이 남겨둔 속삭임은
그 파리하게 떨고 있는 허공은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 1994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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