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돌베개, 1987)
※ 같은 사이트에서, 포이에르바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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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S on FEUERBACH / Karl Marx
I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사물, 현실, 감성을 대상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감성적인 인간적 활동,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II
대상적 진리가 인간사유로 귀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상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수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III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가지 부분-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은 사회를 초월해 있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적 활동 또는 자기변혁의 변화와의 일치성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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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모든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오도하는 온갖 수수께끼는 인간 실천과 이 실천의 파악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IX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개개인과 시민사회의 관조이다.
X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 civil society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 human society 또는 사회적 인간 socialised humanity이다.
XI
철학자들 The philosophers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단지 해석 interpret하기만 해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 change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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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Feuerbach and the End of Classical German Philosophy / F. Engles
머리말
1859년 베를린에서 출판된 '정치경제학비판'의 서문에서 칼 마르크스는 어떻게 우리 두 사람이 1845년 브뤼셀에서, "우리의 견해"-주로 마르크스가 공들여 만든 유물론적 역사관-와 독일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의 대립을 밝혀내는 작업, 사실상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철학적 양심을 청산하는 작업에 공동으로 착수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 계획은 헤겔 이후 철학을 비판하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19세기 초반 헤겔 자신도 그렇게 말했듯이 '근대철학의 완성'이었던 헤겔철학이 붕괴되면서 이후의 모든 철학은 당연히 '철학의 완성=종점'인 헤겔철학을 부정하고 나섰다. 이 가운데 마르크스의 철학이 나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현상학, 실존주의, 분석철학 등 다양한 갈래의 부르조아철학의 맹아 또한 헤겔철학을 부정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는 동시에 헤겔철학 자체에 그 맹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 글을 출판에 부치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1845~46년간이 낡은 원고 ('독일이데올로기')를 찾아서 검토해 보았다. 포이에르바하를 다룬 절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편, 나는 마르크스가 남긴 노트 속에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열한개의 테제를 찾아내 이 책의 부록으로 실었다. 이것들은 후에 보다 정교하게 다듬을 의도에서 급하게 썼던 것으로 분명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가 담겨 있는 최초의 문건으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1888년 2월 21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I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책은, 비록 시간적으로는 한 세대 정도 이전의 시기에 불과하지만 독이르이 현 세대에게는 마치 백년이라도 지난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시기로 우리륻 되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1848년 독일혁명의 준비기였다. 즉 그때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1848년의 연속이었으며, 혁명의 유언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당시 그 혁명의 대변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은 바로 이 골치아픈 철학의 가장 신랄한 반대자들인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정부도, 자유주의자들도 보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적어도 한 사람, 즉 다름아닌 하인리히 하이네는 보았던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떠한 철학적 명제도 다음과 같은 헤겔의 유명한 진술보다, 편협한 정부에게서는 찬사를, 그리고 똑같이 편협한 자유주의자에게서는 분노를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인 것이다." (헤겔, '법철학' 서문 中) 이것이야말로 명백히 현존하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전제정치, 경찰정부, 전제법정의 소송절차와 검열에 내려진 철학적 은총이 아닐 수 없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그의 신민들은 바로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조건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헤겔에게서 현실의 속성이란 오직 "현실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에만 속한다.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현실성은 필연성임을 입증한다." (헤겔, '논리학' 中) 그러므로 헤겔이 볼 때 특수한 정부조치-헤겔 자신은 '어떤 조세법규'의 예를 인용한다-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필연적인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임을 스스로 입증한다. 따라서 헤겔의 그 명제는 당시 프러시아 국가에 적용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뜻이다. 이 국가는 필연적인 한에서 이성적이며, 이성에 따른다... 이제 헤겔에 따르면 현실은 결코 언제 어떤 사태에나,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어떠한 상황에나 통할 수 있는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므로 발전과정에서 이전에 현실적이었던 것은 모두 비현실적으로 되며, 그 필연성, 존재의 권리, 합리성을 잃는다. 그리고 죽어가는 현실성을 대신하여 새롭고 활력있는 현실성이 나타난다-낡은 것이 투쟁 없이 죽어갈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지성을 지녔다면 평화적으로, 낡은 것이 이러한 필연성에 저항한다면 강제적으로. 이리하여 헤겔의 명제는 헤겔의 변증법 자체를 통해 그 대립물로 전화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멸할 가치가 있다" (괴테, '파우스트' 中)는 명제이다...
II
모든 철학, 특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근본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데카르트에서 헤겔까지, 그리고 홉스에서 포이에르바하까지의 그 오랜 기간 동안 철학자들은, 아무리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단지 순수이성의 힘만으로 나아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반대로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한 추진력은 강력할 뿐더리 갈수록 급속해지는 자연과학과 산업의 진보였다...
III
(생략)
IV
우리는 우리 머리 속에서 다시 한번 유물론적으로, 즉 실제 사물을 절대적 개념의 이러저러한 단계이 영상으로 파악했다. 이렇게 되자 변증법은 외부세계와 인간사유 양자의 법칙을 관장하는 일반적 운동법칙의 과학이 되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법칙은 내용에서는 서로 같으나 인간정신이 그 법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할 경우 그 표현에서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자연에서, 그리고 지금껏 인류역사의 대부분에서도 이들 법칙은 끝없이 이어지는 외관상의 사건들 속에서 외적 필연성의 형태로, 무의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리하여 개념의 변증법 자체는 단지 현실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에 대한 의식적 반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이제 자신이 딛고 섰던 머리를 되돌려 발로 서게 되었다. 한편, 몇 년 동안 우리의 가장 좋은 작업도구이자 가장 예리한 무기였던 이 유물변증법은 매우 놀랍게도 우리가 발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와는 별개로, 심지어 헤겔과도 별개로 독일 저술가인 요셉 드치겐이 발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헤겔철학의 혁명적 측면은 다시 받아들여졌으며, 이와 동시에 헤겔에게서 이 측면의 일관된 관철을 가로막았던 관념론적 장식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위대한 근본적 사상, 즉 세계는 만들어져 있는 사물의 복합체가 아니라 과정의 복합체로서, 여기서는 안정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사물도 사물에 대한 우리 머리 속의 심상인 개념처럼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며, 또 온갖 외관상의 우연성과 일시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전진적 발전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그 위대한 근본적 사상은 특히 헤겔시대 이래로 일상적 의식 속에 매우 철저하게 침투되어 일반적인 면에서는 지금 거의 모순이 없다. 그러나 이 근본적 사상을 말로 인정하는 것과 현실에서 각 탐구영역에 상세히 적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또한 필연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피상적인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른바 우연적인 것이 배후에 필연을 숨기고 있는 형태임을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과잉생산과 대중의 빈곤, 이것이 곧 대규모 산업이 빠져든 불합리한 모순이며 이 모순은 필연적으로 생산양식의 변화를 통한 생산력의 해방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 역사에서는 적어도, 모든 정치투쟁은 계급투쟁이라는 것, 그리고 해방을 위한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왜냐하면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므로-결국 경제적 해방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적어도 국가-정치적 질서-가 종속적이며 시민사회-경제관계의 영역-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여기서 국가와 시민사회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국가는 정치적 영역, 국가의지는 우연의 영역이며, 시민사회의 요구는 경제적 영역, 필연의 영역이다.) 그런데 헤겔 역시 경의를 표하는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국가가 결정적 요소이며 시민사회는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 의문을 가진다면 우리는 현대 역사에서 국가의 의지는 대체로 시민사회의 변화하는 요구에 의해, 이러저러한 계급의 지배권에 의해, 궁극적으로는 생산력과 교환관계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에서 서술한 거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약간의 예시를 덧붙여 개략적으로 그려본 데 불과하다. 그 예시에 대한 증거는 역사 자체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저작들에서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자연관이 모든 자연철학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들었듯이 이러한 견해는 역사의 영역에서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어느 곳에서든 우리 두뇌로부터 상호연관을 발명해 내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속에서 상호연관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자연과 역사로부터 추방된 철학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남은 것이 혹시 있다면-순수한 사유의 영역, 즉 사유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이론인 논리학과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노동계급에게서만 독일의 이론적 성향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노동계급에게는 그것이 소멸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출세나 이윤추구에 대한 관심도, 위로부터의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 '공산당선언' 中) 오히려 과학이 가차없이, 또 무심하게 나아가면 갈수록 과학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기대에 한층 일치하게 된다. 사회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은 노동의 발전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새로운 경향은 처음부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으며, 공식적으로 승인된 과학에게서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응을 노동계급에게서 발견했다. 독일 노동계급운동은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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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노트 ::
20년만에 꺼낸 책, 20년전에 읽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기억들은 대부분 잊혀졌을 테지만 (또 이 책을 읽던 대전에서 제일 컸던 그 대형서점 역시 언젠가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불꽃같은 혁명과 양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헤겔의 책을 덮자마자 현대철학을 펼치기 전에, 반드시 징검다리처럼 건너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모처럼 다시 펴든 이 책... 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노동계급이 등을 돌린 이론의 미래에 관해서도 잠시 생각을 해본다. 이 시대의 '진보'는 과연 누구의 편일까, 누가 '진보'의 주체일까?... 끝없는 상념들이 스치고 또 머물고, - 어느덧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P.S. 청계광장 촛불집회 소식을 듣고자 한다. 다시 책을 덮으며...
책의 평점은 별 여덟이다. 마르크스의 '테제' #11을 끝으로,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 the point, is to
chang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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