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테노트/철학노트

미답의 경지, 칸트...

단테, 2014. 5. 8. 23:27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동서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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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이 책을 꺼내든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큰 철학자 두명을 꼽으라면 

아마도 칸트와 헤겔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둘 다 독일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도다.) 

 

워낙 분량도 만만치가 않고 또 내용도 지극히 어렵다고들 하므로, 이번은 연재의 형태로

요약/정리를 시도해볼까 했다가 뜻밖에 유용한 자료 하나를 얻어 단편으로 정리를 한다. 

 

족히 4센티미터에 가까울만큼 책의 두께도 제법 듬직한데, 빼곡히 적힌 차례부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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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베룰람의 베이컨 「대혁신」 머리말 

프로이센 왕국 국무대신 폰 체틀리츠 남작 각하께 드림 

제1판 머리말(1971년) 

제2판 머리말(1797년) 


서론 

1. 순수인식과 경험적 인식과의 구별에 대해 

2. 우리는 어떤 선험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지성이라 해도 반드시 그런 인식이 있다 

3. 철학은 모든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원리 및 범위를 규정하는 학문을 필요로 한다 

4. 분석적 판단과 경험적 판단과의 구별에 대해 

5. 이성에 대한 모든 이론학문에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원리로서 포함된다 

6.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 

7. 순수이성비판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수한 학문의 의도와 구분 


선험적 원리론 


제1부 선험적 감성론 

§1 서론 

제1절 공간에 대해(§2 공간개념의 형이상학적 규명/§3 공간개념의 선험적 규명/ 

앞에서 말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제2절 시간에 대해(§4 시간개념의 형이상학적 규명/§5 시간개념의 선험적 규명/ 

§6 이런 개념들로부터의 §7 결론/설명/§8 선험적 감성론에 대한 일반적 주해/ 

선험적 감성론의 결론) 


제2부 선험적 논리학 

서론/선험적 논리학의 개념(1. 논리학 일반에 대해/2. 선험적 논리학에 대해/ 

3. 일반논리학의 구분에 관해/4. 선험적 논리학의 구분에 관해) 


제1권 선험적 분석론 


제1편 개념의 분석론 


제1장 모든 순수지성 개념을 발견하는 실마리 

제1절 지성의 논리적 사용 일반/§9 제2절 판단에 있어서 지성의 논리적 기능/ 

§10 제3절 순수지성 개념, 즉 범주/§11 §12 


제2장 순수오성 개념의 연역 

§13 제1절 선험적 연역 일반 원리/§14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의 이행/ 

제2절 순수지성 개념의 선험적 연역/§15 종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해/§16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에 대해/§17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칙은 모든 지성 최고 사용 원리다/ 

§18 자의식의 객관적 통일이란 무엇인가/ 

§19 모든 판단의 논리적 형식의 의미는 판단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에 통각의 객관적 통일을 주는 데 있다/§20 모든 감성적 직관은 범주에 따른다. 범주란 직관의 다양함이 그 아래에서 만 하나의 의식에 총괄될 수 있는 조건 내지 기준이다./§21 주해/§22 범주는 경험의 대상에 적용될 수 있을 뿐이며, 그 밖의 사물의 인식에는 사용되지 않는다/§23/§24 감각기관의 대상 일반에 대한 범주의 적용에 대해/§25/§26 순수지성 개념에 일반적으로 가능한 

경험적 사용 선험적 연역/§27 지성 개념의 이 선험적 연역으로부터 생긴 결론 


제2편 원칙의 분석론/선험적 판단력 일반에 대해 

제1장 순수지성 개념의 도식론 

제2장 순수지성의 모든 원칙 체계 

제1절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고 원칙에 대해/제2절 모든 종합적 판단의 최고 원칙에 대해/ 

제3절 순수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의 체계적 표현 


제3장 모든 대상 일반을 현상적 존재와 본질적 존재로 구별하는 근거에 대해 

부록(경험적 사용과 선험적 사용과의 혼동에 따른 반성 개념의 모호성에 대해/ 

반성 개념의 모호성에 대한 주석) 


제2권 선험적 변증론 

결론(1. 선험적 기상에 대해/2. 선험적 가상의 거처로서의 순수이성에 대해―A. 이성 일반에 대해 B. 이성의 논리적 사용에 대해 C. 이성의 순수한 사용에 대해) 


제1편 순수이성의 개념에 대해 

제1절 이념 일반에 대해/제2절 선험적 이념에 대해/제3절 선험적 이념의 체계 


제2편 순수이성의 변증적 추리에 대해 


제1장 순수이성의 오류 추리 

영혼의 고정불변성에 관한 멘델스존 증명에 대한 반박/심리학적 오류 추리의 해결에 대한 결론/ 

합리적 심리학으로부터 우주론으로의 이행에 대한 일반적 주해 


제2장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제1절 우주론적 이념의 체계/제2절 순수이성의 모순론/ 

제3절 이 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이성의 관심에 대해/ 

제4절 반드시 해결될 수 있어야 하는 한에서의 순수이성의 선험적 과제에 대해/ 

제5절 네 가지 선험적 이념에 의한 우주론적 문제 회의적 표명/ 

제6절 우주론적 변증론을 해결할 열쇠로서의 선험적 관념론/ 

제7절 이성의 우주론적 자기모순 비판적 해결/ 

제8절 우주론적 이념에 관한 순수이성의 규제적 원리/ 

제9절 모든 우주론적 이념에 관한 이성의 규제적 원리를 경험적으로 사용함에 대해 


제3장 순수이성의 이상 

제1절 이상 일반에 대해/제2절 선험적 이상에 대해/ 

제3절 사변적 이성이 최고 존재자의 현존재를 추론하는 여러 증거/ 

제4절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제5절 신의 존재에 관한 우주론적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제6절 자연신학적 증명 불가능에 대해/ 

제7절 이성의 사변적 원리에 의거하는 모든 신학에 대한 비판/ 

순수이성의 이념의 규제적 사용/인간의 이성이 갖는 자연적 변증법의 궁극 의도 


선험적 방법론 

서론 

제1장 순수이성의 훈련 

제1절 독단적 사용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제2절 논쟁적 사용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자기모순에 빠진 순수이성을 회의론으로 만족시킬 수 없음에 대해/ 

제3절 가설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제4절 증명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제2장 순수이성의 규준 

제1절 우리의 이성의 순수 사용의 궁극 목적에 대해/ 

제2절 순수이성의 궁극 목적의 규정 근거로서 최고선의 이상에 대해/ 

제3절 의견과 지식과 신앙에 대해 


제3장 순수이성의 건축술 

제4장 순수이성의 역사 


실천이성비판 


머리글/들어가는 말 

제1부 순수실천이성의 원리론 

제1편 순수실천이성의 분석론 

제1장 순수실천이성의 원칙 

제1절 정의 /제2절 정리 Ⅰ제3절 정리 제4절 정리 Ⅲ제5절 과제 Ⅰ제6절 과제 | 

제7절 순수실천이성의 근본 법칙|제8절 정리 Ⅳ 


제2장 순수실천이성의 대상 개념 

순수실천적 판단력의 전형 


제3장 순수실천이성의 동기 

순수실천이성 분석론의 비판적 조명 


제2편 순수실천이성의 변증론 .. 681 

제1장 순수실천이성 일반의 변증론 

제2장 최고선의 개념 규정에 있어서의 순수이성의 변증론 

1. 실천이성의 이율배반 /2.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의 비판적 해소 

3. 사변이성과 결합할 때의 순수실천이성의 우위 /4. 순수실천이성의 요청인 영혼불멸성 

5. 순수실천이성의 요청인 신의 현존 /6. 순수실천이성의 요청들 일반 

7. 사변적 순수이성의 인식을 확장함이 없이 순수이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확장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8. 순수이성의 요구에 의한 승인 

9. 인간의 인식 능력들이, 인간의 실천적 사명에 현명하게 부합하는 조화 


제2부 순수실천이성의 방법론 

맺음말 


칸트의 생애와 사상 


철학 연구에 바친 생애 

정든 쾨니히스베르크/이름 없는 한 시민의 아들/나의 길, 대학교수/사상편력 스케치/ 

세월과의 전쟁/인간 칸트의 변모 


인간이란 무엇인가? 

비판철학의 과제/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도덕과 자연의 

조화/인간은 무엇을 바라 마땅한가/영원한 평화를 위하여/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실용적 

현실의 성격/인간 지식의 획득 방법/실용적 현실의 여러 모습/실용적 인간학의 총괄/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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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만만치가 않을만한 내용들... 

시간관계상 서둘러 또 책의 딱 절반인 '순수이성비판'만을 정리하고자 하며, 

  

- 아무튼 일단은, 머리말들부터 읽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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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판 머리말 (1791년)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대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성의 자연본성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동시에 그 모든 능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들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이 그 운명인 것이다... / 철학의 의무는 오해로부터 유래된 환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다만 문제는 경험이라는 소재와 도움이 모두 배제되었을 경우 이성만을 가지고 대체 어느 정도의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제2판 머리말 (1797년) 

이성의 기능에 속하는, 인식들을 연구하는 일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확실한 길을 걷고 있느냐의 여부는 그 성과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아무것도 완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 제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철학의 역할'은 오류의 원천을 막음으로써 형이상학에 이롭지 못한 일체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다... 전체는 개별적인 기관을 위해, 개별적인 기관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서론 

순수이성 (주: 경험적 인식과 대립되는)에 있어서 불가피한 과제는 '신' '자유' '불사성'이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갖추어 궁극적으로 이들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가 아닐지라도 역시 '자연적' 소질로서는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 단순한 허영심에 충동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그 경험적 사용이나 거기서 얻은 원리에 의해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문제에까지 끊임없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순수이성이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추궁할 수밖에 없는 물음들이 어떻게 보편적 인간이성의 자연본성으로부터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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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 원리론 

 

제1부 선험적 감성론  


서론 : 어떤 방식, 또는 어떤 수단으로 인식이 대상에 관계하든지 간에, 양자의 직접적인 매개가 되고, 또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 삼는 것은 '직관'이다. 그러나 직관은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 있어서만 생기며, 이런 일은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유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가 대상에 의해 유발되는 방식을 통해 표상을 얻게 되는 능력(감수성)을 '감성'이라 한다. 따라서 감성을 매개로 대상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그러나 대상은 지성에 의해서 '사유되며', 지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그러나 모든 사유는 단적(직접적)이든 우회적(간접적)이든 어떤 징표를 매개로 궁극에 있어서는 직관에 관계하며,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감성에 관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2부 선험적 논리학 

 

서론 : [선험적 논리학의 개념] 1. 논리학 일반에 대해 / 우리의 인식은 마음의 두 근원에서 발생된다. 그 첫째의 근원은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인상에 대한 감수성)이며, 둘째의 근원은 이런 표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개념을 구성하는 자발성)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유발될 때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감성'이라고 부른다면, 이에 대해 표상을 스스로 산출하려는 능력,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라고 부른다. 직관은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이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방식만을 함유하는 것은 우리(인간)의 자연적 본성상 필연적인 일이다. 이에 반해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이 두 가지 성질은 그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감성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지성의 개입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따라서 자기의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 즉 직관에 의해서 개념에 대상을 덧붙이는 일이 필요함과 동시에, 자기의 직관을 지성화하는 일, 즉 직관을 개념에 포섭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런 두 능력, 또는 두 성능은 그 기능을 서로 바꿀 수 없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으며, 감각기관은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이 두 직관과 지성이 결합할 때만 인식이 성립된다. 그렇다고 그 각자가 맡은 일이 뒤섞여서는 안 되며, 그 각자를 서로로부터 신중히 나누어서 구별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성의 규칙 일반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감성론과 지성 규칙 일반에 대한 학문으로서 논리학을 구별한다...      

    

제1권 선험적 분석론 

  

모든 순수지성 개념을 발견하는 실마리 

 

우리가 판단 일반의 모든 내용을 제외하고 오로지 판단에 있어서의 단순한 지성 형식만을 주의해 본다면, 판단에 있어서 표상들을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은 네 항목으로 나뉘며, 그 네 항목이 각각 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1) 분량 : 전칭적, 통칭적, 단칭적 

2) 성질 : 긍정적, 부정적, 무한적 

3) 관계 : 정언적, 가언적, 선언적 

4) 양상 : 개연적, 실연적, 필연적 

 

우리는 이런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범주'라고 부르려 한다. 우리의 의도는, 그 작업의 실현에 있어서는 매우 차이가 있지만,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1) 분량 :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2) 성질 :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3) 관계 : 속성과 실체 (실체와 부수성), 원인성과 의존성 (원인과 결과), 상호성 (능동자와 수동자의 교호 작용) 

4) 양상 : 가능성-불가능성, 현존성-비존재, 필연성-우연성 

 

I. 직관의 공리 : 모든 직관은 외연량 (연장적 부분들의 모음)이다. 외연량은 부분의 표상이 전체의 표상을 가능케 하는 분량을 말한다. 

II. 지각의 예측 : 모든 현상에서 감각의 대상인 실재적인 것은 내표량, 즉 '어떤 정도'를 가진다. 

III. 경험의 유추 : 경험은 오로지 지각의 필연적 결합에 의한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IV. 경험적 사유 일반의 요청 : 1) 경험의 형식적 조건 (직관 및 개념에 관한)과 일치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2) 경험의 질료적 조건 (감각)과 관련되는 것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3)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경험의 일반적 조건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실재해야 한다.) 

   

제2권 선험적 변증론 

 

1) 영혼은 실체다 [관계] 

2) 영혼은 그 성질상 단순하다 [성질] 

3) 영혼은 상이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수적으로 동일하다. 즉 하나다 (다수성이 아니다) [분량] 

4) 영혼은 공간에서의 가능한 대상과 상호적으로 관계한다 [양태] 

 

1) 나는 생각한다 [양상] 

2) 주어로서 [관계] 

3) 단순한 주어로서 [성질] 

4) 나의 사유의 어떤 상태에서도 동일한 주어로서 [분량] 

 

선험적 방법론 

 

우리는 이 의도를 가지고 순수이성의 '훈련', '모범적 표준', '건축술', 끝으로 '역사'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실천적 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성 사용 일반에 관해 연구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또한 선험적 의도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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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직접 정리를 하다가,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유용한 요약본을 하나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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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illox.com.ne.kr/pdata/kant1.htm

  

   

I. 序: 칸트는 왜 "순수이성비판"을 썼는가.

 

 칸트는 왜 "순수이성비판"을 썼는가?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 보이듯이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으로 대표되던 칸트까지의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썼는가? 만약 칸트가 단지 형이상학에 반대하기 위해서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였다면, 칸트는 흄에게만 머물렀어도 충분하였다. 흄은 오직 선험적인 분석 명제와 경험적인 종합 명제만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세계에 대해 의미 있으면서도 동시에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나 명제의 체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를 비판하고 자연에 발언하면서도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들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귀류법적으로- 형이상학적이지 않으면서도 법칙 부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연에 대해 발언하면서도 필연적인 명제들은 왜 있는 것일까?

만약 자연의 통일이 우리 사고의 첫째 원천에서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보편적인 "자연 통일"의 종합적 명제는... 경험적으로만 이끌어내어질 수 있다. 그런 일로부터는 우연적 통일 외의 아무런 통일도 얻어질 수가 없다. 우연적 통일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를 때에 생각하는 바 필연적 연관에는 도저히 이르지 않는 것이다.

 즉, 흄에게 있어서 뉴튼 물리학의 명제들은 '있지만' 기껏해야 귀납적인 것에 불과하다. 칸트에게 그것은 이미 '있고' 그 있음은 설명하여야 할 것이지 정당화되어야할 것이 아니다. 선험적 종합명제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며 이미 받아들이고 가야 하는 것이다. 원자적인- 따라서 경험론적인- 지각 개념과 종합적인 '경험'/'인식' 개념, 칸트적 '객관' 개념, 그리고 인식 밖에 아무 것도 설정하지 않고 그 점에 만족하는 칸트적 '현상' 개념 모두 받아들이고 시작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내가 할 일은 보편성으로서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 근거를 밝히는 데 있고 그런 판단들의 모든 종류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통합하는데 있으며, 우리는 그가 '도대체 선험적 종합 판단은 가능한가?'를 문제삼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며 이 언명을 '선험적 종합 판단이 왜 가능한가?'로 해석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칸트의 모든 '연역'들이 바른 귀류법적 논변이 되며 현존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오히려 현존하는 것의 현존의 근거로 쓰는, 선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저지르는 논변이 아니게 된다. 즉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현존하는데, 이 현존하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현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되는 가를 규명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쓴 것이다.

 

II. 감성의 선험적인 형식

  왜 칸트는 선험적인 것에 집중하는가? 모든 인식론의 근본 문제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먼저 설정하고, 그들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 반영 혹은 무관계의 관계를 설정하여 지금 내가 인식하는 바 그대로를 도출해 내는 것이어 왔고, 그것의 결과는 인식 안에 갇혀 있는 한 인식함으로서의 나는 인식 밖의 인식되는 것을 모른다라는, 극히 회의적인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인식의 문제는 확실성이었고 이 확실성의 기준은 도달할 수 없는 밖에 있었다. 칸트에게 있어서도 중심은 물론 내 앎의 확실성이었으나, 칸트는 밖과 안의 비교를 통한 확실성을 포기함으로써, 즉 '객관' , '진리', '실재 real'의 의미를 모두 바꿔버림으로써 주관 자체가 확실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앎은 확실하다는 식의 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근거에 있을 것인 바, "서문"에서 밝히듯이 칸트는 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처음부터 연역한 것이 아니라 최초에는 하나의 발상, 하나의 가설로서 제시하였다. 그러나 칸트가 "비판"에서 택하고 있는 것은 가설 검증이 아닌 귀류법적인 연역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칸트가 설정하고 있는 갖가지 이론적 존재자들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선험적인 감성 형식을 요청하는 실마리를, 칸트는 "선험적 감성론"의 첫머리에서 인식의 메커니즘을 개관하명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대상 개념을 비판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관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대상에 관계하기 위하여 인식은 가장 먼저 직관을 필요로 하고, 물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심성을 촉발함에 의하여 대상이 얻어진다고 한다. 촉발됨으로써 표상을 얻는 능력이 감성이다. 직관이 개념화됨으로써 비로소 경험적 인식이라고 불려질 만한 것이 성립하게 되나 모든 경험은 직관을, 따라서 감성을 필요로 한다. 감각을 통해서 직관에 관계하는 대상을 현상이라고 하며, 현상 자체는 감각으로부터 얻어진 <재료>와 이것을 일정하게 정리하는 <형식>으로서 되어 있다. 재료만이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는 전제하에서 형식은 결코 경험적인 것일 수 없다. 감성이 현상에 주는 이러한 선험적인 형식을 순수한 직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험 전체 중에서 오성의 개념적 사고를 소거한 나머지, 즉 경험적 직관에서 다시 모든 것을 소거함으로써 남는 것이 감성의 선험적인 형식이다. 감성의 선험적인 형식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까닭은 이러하다. 먼저 이들이 선험적인 까닭은 이렇다. 도대체 시간과 공간은 경험에 의거해 추상한 것이 아니다. 도대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내 바깥의 것과 관계하여야 하는 바 내 바깥의 것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감각들을 서로 분리하고 나란히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리하고 나란히 놓기' 위해서는 이미 공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경험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있다' 혹은 '앞, 뒤로 있다'는 생각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바,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시간을 먼저 전제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경험적이지 않고 선험적이다. 다음, 이들이 형식이 까닭은 이러하다. 공간 없이 내 바깥에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고(그 역은 가능하나) 시간 없이 어떤 현상을 생각할 수 없다(역시 그 역은 가능하나). 따라서 인식에 어떠한 것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시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형식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오성에 속하는 범주가 아닌 감성에 속하는 직관인 까닭은 이러하다. 어떠한 범주라도 그 밑에 포섭하는 종(種)들은 서로 다른 종차(種差)를 가지고 있으나 부분적인 시간들과 부분적인 공간들 사이에서 그러한 질적인 차이는 없다. 이리하여 시간과 공간은 선험적인 형식으로서 직관에 속한다.

  시간과 공간이 이렇듯 항상 평행한 것은 아니다. 공간은 외감(外感)의 형식이고 시간은 내감(內感)의 형식이다. 시간은 외적인 형태나 위치 등에 속하지 않고 우리의 내심 상태의 표상들의 관계만을 규정한다. 그런 반면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순수 형식이면서 오직 외적 현상에만 그 타당성이 제한된다. 그런데 모든 표상은 그 대상이 감각 바깥의 것이던 안의 것이던 표상인 이상 내적 심성에 속하고 이 내적 심성은 내감의 형식에 따른다. 즉 시간에 따른다. 따라서 내적이던 외적이던 어떠한 직관이라고 모두 시간을 선험적 조건으로서 전제한다. 곧 시간이 공간보다 논리적으로 또 선험적으로 직관에 있어 우선한다.

  위와 같은 것이 인식론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근본문제에서 의미하는 바는 이러하다. 공간과 시간은 흔히 인식 바깥의 것 자체 ding an sich 에 속하는 하나의 속성인 것처럼 생각되어 왔으나 기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오직 주관이 현상에 부여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 감성의 주관적 조건을 무시해 버린다면 공간이라던가 시간이라는 표상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공간과 시간은 오직 주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 자체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또한 모든 직관이 공간과 시간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므로 이를 초월하여 어떠한 인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상으로서, 즉 현상으로서 드러나는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시공간이 실재성(객관적 타당성)을 가지지만 현상을 떠난 물 자체를 우리가 고려한다면- 고려할 수 있다면-시공간은 전혀 관념적인 것이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객관성 혹은 실재성은 인식 밖에 있는 무엇 자체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현상으로서 주어지는 한에서 감성-그리고 오성-이 선험적 형식에 의해 매개된 인식 내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현상이 한낮 가상이라는 뜻이 아닌 바,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 대해서 단연코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주관주의, 그러나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주관주의를 의미한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주관으로 인해 중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 자체가 중심이 되며 이 주관은 만인에게 공통된 형식에 따른다. 모든 인간의 인식 내용을 조회해 보지 않더라도 '모든 물체는 연장되어 있다' 혹은 '어떠한 사건이라도 계기적(繼起的)으로 일어난다'는 판단은 만인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이 만인에 대해여 보편적인 까닭은 만인이 이런 식의 판단의 형식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과연 칸트는 주관주의에 따르기 마련인 인식상의 상대주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모든 물체는 연장되어 있다'는 판단은 필연적으로 만인에게 보편적이다'는 판단은 칸트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인가 만인에게 보편적인 판단인가?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현실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명제들이 선험적이며 따라서 보편적이라는 것에 스스로 동의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현대의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달렸다.

 

 II. 선험적인 오성

  본격적인 인식론은 결코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이 단지 감각적 지각으로서 어떻게 주어지는가만을 다룰 수는 없다. 적어도 칸트가 생각하는 경험적 인식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이라고 칭해지는 바의 것 속에는 날 것 그대로의 감각 자료 이외에도 '이 물체는 매우 무겁다', '무엇은 어떠하다'는 식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며, 다른 감각 자료와 나란히 놓아져서 비교 분석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자적인 감각 자료들이 한데 묶이어 지속성을 갖는 '대상'의 관념에 개념으로서 연언되어 명제로서 판단될 수 있다는 것 등이 속하기 때문이다. 현상 자체는 원자적이며 감성은 시공간의 형식을 제하고는 완전히 수동적이라면, 개념적이고 종합적인 이러한 인식을 산출해 내기 위해서는 감성이 아닌, 주관의 무엇인가 능동적인 측면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적 인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진대 두 가지 능력 모두 인식을 이루는데 평등하게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두 가지 성질은 우열이 없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사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인식에 한갖 감각적 직관 이외에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른 표상 (그것이 직관이든 개념이든)을 하나의 공통적인 표상 아래에서 통일하는 작용임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한 이것이 직관 중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므로 순수한 (선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칸트에 따르면 이와 같은 통일을 주는 것은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성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작업은 순수한 개념들을 발견하고 이들 개념의 완벽한 체계를 구축하고 선험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을 연역해 내는 것이다. 즉 어떤 식의 인식으로든 선천적 조건으로서 내포하게 되는 범주들을 연역해 내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모든 판단들이 10개의 범주를 따른다고 하였던 것과 그 동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칸트는, 아무런 선험적 원칙없이 경험에서 추상하여 10개의 범주와 5개의 후-범주를 '주어 모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은 결코 모든 판단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지와 오직 이 범주들만이 근원적 범주인지를 증명해내지 못한다고 한다

  칸트에 따르면, 지금 문제가 되는 개념들은 오직 판단하는데 쓰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판단은 개념과 개념을 연결해 주는 작용이고 -물체는 나누어 질 수 있다와 같이- 개념은 그 아래에 많은 표상을, 따라서 많은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능이다. 따라서 모든 판단은 표상들을 통일하여 다른 표상들과 연결해 주는 함수 작용이다. 칸트에 따르면, 판단은 우리의 표상들 간의 통일 작용이다. 이리하여, 오성은 개념으로 환원되고, 개념은 판단으로 환원되어, 오성의 모든 작용은 판단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판단에 있어서 통일의 유형을 모두 드러낼 수 있다면, 오성의 기능은 남김없이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판단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판단들의

 I. 분량                        II. 성질                    III.관계                          IV 양상

-전칭 판단               - 긍정 판단                -정언 판단                  -개연 판단

-특칭 판단               - 부정 판단                -가언 판단                  -실연 판단

-단칭 판단               - 무한 판단                -선언 판단                  -필연 판단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판단에 있어서 서로 다른 표상- 주어와 술어-에 통일을 주는 오성의 기능이 직관에 있어서 한갖 종합에도 통일을 준다. 즉 단순히 잡다하기만 할뿐인 감각적 직관들에서 인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잡다한 것이 일정하게 종합되어야만 하고, 이러한 일차적인 종합을 행하는 것이 구상력이다. 그러나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상력이 행하는 종합은 전혀 개념화된 것이 아닌 바 오직 오성만이 잡다한 것의 종합을 통일하여 개념화한다. 판단에 통일을 주는 오성이 직관의 종합에도 통일을 주므로, 판단의 선험적인 형식들이 선험적인 통일을 주는 순수한 개념들과 정확히 일치할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선험적 오성론에서 우리가 최후로 도달하여야 했던, 어떠한 존재자라도 어떤식으로든 포섭되어야 할 순수한 개념, 순수한 범주의 표는 다음과 같다.

I. 분량                  II. 성질                     III. 관계                    

-단일성                  -실재성                     -속성과 실체               

-수다성                  -부정성                     -원인과 결과               

-전체성                  -제한성        

 칸트는 오직 형이상학적 연역으로만 순수한 개념 혹은 범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선험적 연역을 통해 인식을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순수한 범주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선험적 연역의 실마리는 원자적이고 서로 연동 連動,coherence 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지각과 지각으로부터 성립되어 서로 연동되고 통일되어 있는 표상들의 전체인 "인식" 사이의 격차이다. 이 격차가 메워지기 위해서는 지각에, 따라서 현상에 관계하지 않으면서 표상들을 연동 하게끔 하는 선험적인 어떠한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나의 인식 밖에 있는 것이 아닌 한 내 심성의 어떠한 능력에 위치 지워져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 자발적인 능력은 세 가지 종합에서 나타난다: 직관에 있어서 심성의 변양으로서의 표상의 각지 覺知,apprehension, 구상에 있어서의 표상의 재생, 그리고 개념에 있어서의 표상의 재인 再認. 이러한 종합이 인식의 주관적인 원천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오성 개념을 밝혀준다.

 어떠한 직관이라도 다양을 내포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잡다한 것들이 하나의 기준에 견주어져서 하나의 장(場) 위에 놓여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다양이 다양이라고 생각될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직관적 표상 하나 하나가 각기 독자적으로 파악되어, 서로에 비교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다양하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다양을 다양하다고 의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것을 개관하고 개관한 것들을 말하자면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작용이 각지의 종합이다. 각지란 구상력이 지각에 직접 비치는 작용이며 직관의 다양을 하나의 상 像으로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각지는 직관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므로 직관에 속하지 않으면서 선험적인 것임은 확실하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표상들이 연상되고 결합되며, 때때로 재생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과 재생은 언제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일어나는 바, 이는 현상들 자신이 사실상 이러한 규칙에 따른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기준이 없는 나머지 구상력은 '참된' 예측과 기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붉은 모래'가 객관적으로 붉으면서 동시에 모래가 아니라면, 붉은 모래는 때로 붉어지며 때모 검어지며, 때로는 무거워지고 때로 가벼워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구상력은 전혀 참된 연상과 예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들 자신이 따르고 있는 이러한 규칙은 물 자체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은 주관적 표상의 활동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들 스스로를 일정한 질서에 따르게 하여 이러한 재생과 연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물 자체에 있지 않으면서 어디엔가 있어야 하는 바, 어떠한 인식이라도 이러한 재생과 연상의 일관성이 없으면 '인식'이 되지 못한다. 재생과 연상에 있어 물 자체가 배제되고, 게다가 이것이 선험적이라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은 구상력 자체의 선험적인 종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원자적인 지각 각각이 '방금 전에 생각하였던 것과 같다' 혹은 '동일한 "것"에 귀속한다-객관-'는 의식이 없다면 이러한 재생 혹은 연상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통일적인 의식이 없다면 지각적인 표상은 하나 하나 각자로 파악되겠고 표상들의 덧붙임으로서의 재생과 연상은 불가능하겠기 때문이다. 이의 특별한 경우로서, 단위들을 계기적(繼起的)으로 보탬에 의해 발생하는 수(數) 혹은 양(量)이라는 표상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개념적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개념은 다양한 것, 순차적인 것을 하나의 의식 위에 놓여 있는 하나의 표상 위로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표상들 자신이 일정한 패턴으로 연동, 동조 同調, synchronize하게 하고 하나의 '대상'으로서 응고되게 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통일은 물 자체에 기인한 것일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은 물 자체가 아니며 인식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대상 개념이 물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바 모든 인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대상 개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표상에 대응하는 저 X(대상)는 우리들의 표상과는 전혀 다른 것일 터에, 그런 대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없는 것 (無)이다. 때문에, 대상이 필연적이 되도록 하는 바 통일은 표상의 다양을 통일한 무렵의 의식의 형식적 통일 이외의 딴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표상들을 연동하게끔 함으로써 대상 개념을 가지게 하는 것, 즉 표상들을 통일하는 것이 물 자체에 귀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식의 또 다른 요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표상에 수반되는 요소, 즉 나의 의식함-통각 統覺 apperception-일 수밖에 없다. 모든 표상에 '내가 생각하기를...'이 수반됨으로써 비로소 표상들은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고 이 점에서 같은 장(場)위에 놓이게 된다.  칸트적으로 말하면 '통일'된다. 그러나 선험적으로 표상들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의식의 통일 역시 선험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통각은 필연적으로, 또 선험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이 동일하다는 의식이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함을 뜻한다. 실로 자신이 동일하다는 근원적, 필연적인 의식이 동시에 개념들 즉 규칙들에 좋아서 모든 현상들의 종합을 필연적으로 통일한다. 오성은 대상을 개념을 통해 인식하는 능력이고, 개념은 현상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종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개념에 따라 인식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통각의 선험적인 통일이다. 따라서 오성의 핵심적인 영역은 통각의 선험적인 통일에 있다.

 칸트가 현상의 통일에서 곧바로 의식의 통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의 바탕에는 물론 그의 현상 개념과 인식 개념이 있다. 그의 논변이 옳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상, 혹은 현상에 곧바로 연결되는 직관 내지 지각이 원자적이어야만 한다. 그 경우에서만 현상의 통일을 위해 현상 바깥의 무엇인가를 요청할 수 있다. 동시에 이들은 인식 밖에 있는 어떠한 것과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 현상들이 현실적으로 연동하는 그 방식대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는 아니게 연동하는 것을 '세계가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에'를 이유로 삼지 않고 설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왜 특정한 표상들이 특정한 패턴을 따르는 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손안에 든 책의 표상과 손을 놓는다는 표상과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표상사이의 연쇄를, 칸트는 책의 표상에 물체의 범주와 원인과 결과의 범주가 선험적으로 부여되어 책의 표상에 관계된 모든 표상이 이에 따라 정리된 결과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체는 모두 인과의 범주에 따른다는 선험적인 규칙이 있는 듯, 중력이 없다면 밑으로 떨어진다는 특정한 패턴이 귀결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중력 역시 선험적인 범주에 따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현상들을 모두 원자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상들 간의 연결은 오로지 주관에 귀속될 수밖에 없으나, 주관의 한정된 법칙으로 왜 특정한 표상들만이 특정한 패턴을 따르는 지를 설명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이 지점에 와서는 '세계가 스스로 그러함'에 일정 정도 의지하지 않기가 매우 난감하다. 만약 이 지점에서도 여전히 주관주의를 견지한다면 세계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지 않다. 혹은 그가 말하는 오성의 선험성과 필연성은 오직 선험적 종합 명제에서 문제되는 필연성 정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칸트의 주관주의의 범위는 수학, 기하학, 물리학의 범위로 축소되게 될 것이다.

 칸트 오성론의 존재론적 함의는 물론 객관 개념과 대상 개념을 완전히 변화시킨 점에 있다. 직관 내용이 선험적인 12 범주에 따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주관에 의해 구성된 인식은 스스로 있는 세계와 격차가 있는 것이고 가상 Schein 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암암리에 가정하는 인식 밖의 세계는 사실상 우리에게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는 객관 개념이 적용되는 영역이 아니다. 도리에 객관적 세계라는 것 자체가 오성의 선험적인 형식에 따라 구성된 현상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상 개념 역시 인식 바깥에 있는 초월적 transcendent 인 어떤 것이 아니며, 표상들이 통일될 때 하나의 표상으로 귀속되는 그 작용, 곧 대상성 對象性이다. 하지만 이 귀속 작용은 늘 통각에 따르며 일정한 질서를 따르기 때문에 자의적이지 않고 단지 선험적일 따름이다. 이리하여 칸트의 오성론은 인식 밖에 있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상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 그러함 자체를 주관의 작용으로 설명함으로써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인식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IV. 結

 칸트는 인식을 인식되는 것과 인식하는 일체의 작용의 종합이라고 본다. 인식하는 작용은 감성과 오성으로 나누어지며 감성은 개념화와 표상의 연상, 재생, 재인(再認)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단 이전의 감각적인 직관을 다룬다. 그리고 오성은 직관을 재료로 하는 고차적인 인식을 이루어 낸다. 감각에서 얻어지는 직관 그리고 직관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오성 모두 인식을 이루어 내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칸트 인식론의 가장 큰 성과는 초월적이지 않으면서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인식론을 일구어 냈다는 점에 있다. 현상을 이미 인식 안에 들어온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는 인식 밖에 있는 <것 자체>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동시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는 종합적인 인식, 개념적인 인식을 실마리로 삼아 그는 모든 인식을 오성의 선험적인 규칙에 따르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규칙이 기준으로 설정된 이상 인식의 주체마다 자의적인 인식을 가질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객관 자체가 통각이 대상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설명하자, 그는 우리의 인식이 있는 것 자체를 <반영>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없는 가하는, 경험론의 오랜 숙제를 처음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칸트 인식론의 허점 역시 그의 현상 개념과 객관 개념을 자명한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있다. 과연 우리는 세계가 스스로 그러함-퓌지스 physis의 드러남-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가 그러하게 인식됨을 완벽히 설명해 낼 수 있는가? 현상들 자체가 원자적이라면 어째서 특정한 현상들만이 특정한 현상들과 연동/연쇄되는 것인가? 인식의 가장 원초적인 재료가 되는 감각 자료들이 인식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다고 우리는 자명하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회의하여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칸트가 현존하기 때문에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선험적 종합 판단을 과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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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illox.com.ne.kr/pdata/kant3.htm 

 

    

순수이성비판 서론

 

1. 순수 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차이에 대하여

-경험과 모든 감각적 인삭에서 독립된 인식을 '일반적으로' 선험적 a priori 인식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추론과 규칙에 의해 얻어진 인식에 대해서도 선험적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집의 기초를 파내면 집이 무너진다"와 같은 경우. 근거의 무한 소급이 이루어지고. 최종적인 근거는 경험에 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험적 인식 중에서 경험적인 것을 조금도 갖지 않은 인식을 순수 인식이라고 한다.

 

2. 우리는 어떤 선천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상식일 망정 결코 제외할 수는 없다.

-경험은 필연적 인식을 주지 않는다. 만약 필연적 인식이 있으면 그것은 선험적 인식이다.

-경험은 진정으로 보편적이지 않다. 따라서 -----

-판단의 경우:"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 와 "모든 변화는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예. 이것을 칸트는 현존하므로 정당하다고 보고. 이것을 최종적인 방어선으로 삼는다.

-개념의 경우: 공간은 제거할 수 없다. 실체 범주는 제거할 수 없다.

 

3. 철학은 선천적인 인식의 가능성, 원리 및 범위를 규정하는 학 學을 필요로 한다.

-위에서 든 인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인식이 있다.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판단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인식. 순수이성에 있어서 불가피한 과제는 신, 자유, 불사 不死이다.

-하지만 이들을 따지기 전에 오성은 어떻게 이렇게 경험을 벗어나 버릴 수 있는지, 그 타당성은 어디까지 가는 지를 따지는 것이 도리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안 되어 왔는데, 그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러한 선천적 인식의 왕좌를 차지하는 수학적 인식을 전혀 다른 존재 영역까지에도 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학주의의 충동은 무한하다.

-수학적 방식을 포함한 모든 분석적 방법은 결코 새로운 것을 덧붙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불명료한 것을 명료하게 하므로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것으로 보인다. 이성은 여기에 홀려서 분석적 논변으로 보이는 개념간의 자의적 연결까지도 필연적인 논변으로 본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인식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4. 분석적 판단과 종합적 판단의 차이.

-... 선험적 종합판단은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시에 주어 개념에 있지 않은 것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변적 인식의 궁극적 의도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원칙을 밝히는 것이다.

 

5. 이성에 의한 모든 이론적 학에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원리로서 포함되어 있다.

-1). "수학적 판단은 모두 종합적이다"

  - "3+5 =8"      --->"개념 밖으로 나가서 직관으로 매개되어야 한다"?

  - "삼각형의 세 각은 180'이다"

 2). "자연과학(물리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을 원리로서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

-"물체계의 모든 변화에 있어서 물질의 양은 일정불변이다"

-"운동의 전달에 있어서 작용과 반작용은 항상 같아야한다"

 3) 형이상학에도 선험적 종합판단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세계에는 반드시 시초가 없지 않으면 안 된다"

 

6.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

-따라서 순수이성의 본래의 과제는 이것이다. "선천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흄은 명료하지도 않았고 그 보편성을 무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천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이 핵심적으로 요구되는 수학과 물리학의 문제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여러 학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이제 이러한 학문들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학문이 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이 완성된 학으로서 존재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사람은 그 자연적 소질에 의해 형이상학적 질문을 현실적으로 던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인간 이성의 자연적 소질로부터 어떻게 형이상학이 발현되는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형이상학을 제조해 내는 순수한 이성 능력 자체에만 머무로 있을 nt djqat는 바, 형이상학의 [대상]d 대한 것인지 그것을 할려고 하는 [이성의 능력 유무]에 대한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형이상학이 가능하려면 이성이 신뢰될 수 있는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과연 가능한가?"

-이성비판의 학문은 '것들'에 관계하지 않고 참으로 이성 자신을 논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형이상학을 독단적으로 성립시키고자 했던 모든 시도를 무시해야만 한다.

 

7.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특수한 학의 의도와 구분

-순수이성의 <오르가논>이라면 모든 선험적 순수인식이 따르는 원리의 총괄을 가리킨다

-유감스럽게도, 순수이성의 <비판>은 단지 순수 이성의 원천과 한계를 단순히 판단하기만 할 뿐인 예비학이다. 이성의 확장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것이 오류에 빠지지 않기만을 도모한다.

-대상 인식의 선험적 조건을 인식하는 것을 <초월적>이라 부른다. 이러한 제개념의 철학을 <초월적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적 철학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비판은 하나의 오르가논을 위한 준비이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의 성질이라는 무제한한 것이 아니라 오성이며 그것도 선험적 인식에 관계하는 한에서만의 오성이다. "이는 우리가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 없다" 비판을 초월적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선험적 인식 전체를 상세히 분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밖에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자극, 즉 우리를 촉발시켜야만 한다. 외부 사물로부터 촉발된 인간의 감관은 직관작용을 수행함으로써 그 외부사물에 대한 정보(질료)를 수용한다. 주지하다시피(경험적) 직관작용은 감성적이다. 즉,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성질을 지닌다.(물론 순수직관은 그렇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렇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 질료는 아직 혼돈의 상태다. 즉 깔끔하게 질서지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직 이 질료가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완전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론 개념에 의한 지성의 작용이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지성작용의 질료(즉, 대상)가 되기 위해서는 감성작용에 의해서 받아들인 '혼돈한 상태'의 질료로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이 질료를 질서지워줄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혼동스런 잡다에 형식을 부여해주는 일을 감성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이 수행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루고자 하는 칸트의 목표는 철학의 본령인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논리학, 수학, 물리학에서 성취한 절대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인간 지식의 양을 늘려주는 선험적종합판단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첫째 단계로서 인간 인식의 출발점인 감성을 해명하는 것이고, 대상해명이 목표가 아니고, 인간의 인식형식이 목표인 한(물론 인간인식의 형식을 해명하면서 대상도 해명이 되지만),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감성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논증'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단언적인 '주장'이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어쩌면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이며, 더더군다나 그것들의 근거가 '선천적'인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건 칸트의 논의를 따르자면,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먼저 형이상학적으로 구명하고, 즉 일종의 그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나서(본성을 구명함을 말한다), 초월적 구명을 행한다. 즉 여기서 '초월적'이라 함은 그 자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구비되어 있으면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원리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공간"과 "시간"이 없이는 우리의 경험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명의 과정속에서 칸트의 "공간관"과 "시간관"은 라이프니츠의 그것과도 뉴턴의 그것과도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한 "공간"은 외감과 기하학에, "시간"은 내감과 산수학에 관련된다는 칸트의 생각이 보인다. 물론, 시간의 경우는 단지 내감과 관련을 맺는다는 말로 끝낼 수 없다. 이 사정은 B50-B51에 나타난다. "모든 외적 현상은 공간 중에 있고, 또 공간의 관계들에 합치해서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내감의 원리로부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현상 일반은 즉 감관의 모든 대상은 시간 중에 있고, 필연적으로 시간 관계 중에 있다고." 즉 모든 표상은 우리 마음에 곤 내적인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외감을 통해서 얻게 되는 표상도 역시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내외의 현상 전반)의 선험적 조건이다"(B50)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공간" 관념의 형이상학적 구명

  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후험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의 표상 없이는 외적 경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작용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선험적 표상이다.

  공간은 추리된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순수직관이다.(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또, 공간은 개념과 달리 본질적으로 하나다.

  공간은 개념과는 달리 (공간)표상의 군을 무한하게 자기 속에 포괄한다. 이 점에서 개념과 다르고,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공간이라는 근원적 표상은 개념이 아니라 '선험적인 직관'이다.

 여기까지는 재판에 나와있는 것이고, 초판에 있는 형이상학적 구명 중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다음의  에 제시한다.

  모든 기하학적 원칙(명제)들의 절대필연적인 확실성과 그것들의 선험적인 구성가능성은 공간의 이 선험적인 필연성에 기인해 있다.

    

 2. "공간" 관념의 초월적 구명

 여기서 공간은 선험적인 종합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원리로 설명되는데, 이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공간관념에서 선험적 종합인식이 실제로 나온다는 것이고, 선험적 종합인식은 오로지 칸트 자신의 설명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공간"이 선험적 표상이고, 순수직관이며, 기하학에서 다루는 선험적종합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라는 칸트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3. "시간" 관념의 형이상학적 구명

  시간은 어느 경험에서 유도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전제해서만 경험적 표상은 가능하다.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현상(외적 현상과 내적 현상을 모두 합해서)이 실재하는 것은 모두 시간 중에서만 가능하다.

  시간은 일차원만을 갖는다. 즉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시적으로 있지 않고, 계기적으로 있다.(물론 공간은 동시적이다)

  시간은 추리된 개념도 일반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감성적 직관의 순수형식이다.

  시간이라는 근원적 표상은 무제한적으로 주어져 있다. 즉 시간은 무한하다.

 

    4. "시간" 관념의 초월적 구명

 여기서는 형이상학적 구명의  과  을 반복한다. 곧 "시간" 관념이 전제되어야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5. "공간"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 직관의 형식들이다. 이것은 우리에 의해 경험적으로 직관된 것, 곧 현상은 일정한 공간과 시간 관계의 제약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의 규정들이며, 더 나아가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서 현상들의 본질적 규정들이다. 이런 뜻에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 곧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현상하는 객체들과 관련하여 실재적이다.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는 주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현상하는 객체들과 관련해서는 실재적, 곧 객관적으로 실재적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볼 때나 경험적 직관 너머에 있는 어떤 대상, 가령 초험적인 사물과 관련해서 볼 때는 순전히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험적인 직관, 곧 경험적으로 직관함과 경험적으로 직관되는 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공간과 시간의 바로 이러한 성격에 대해 칸트는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 실재성"과 함께 "초월적 관념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다.(B44, B52) "초월적 관념성"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보자. 주지하다시피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 실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공간과 시간은 단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일 뿐, 그것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거나 존재 조건임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사물자체에 속하는 성질들은 결코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이라는 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에서,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과의 관계를 도외시한 대상 그 자체에는 "실체적으로도 속성적으로도 속할 수 없다"는 뜻에서 "초월적 관념성"을 갖는다.(B52)

 칸트의 공간론과 시간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가령 만일 두 공간이 가능함을 입증한다면 어떠한가? 아니면 두 계열의 시간이 논리적 모순없이 가능하다면? 또 러셀처럼 칸트의 형이상학적 구명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론을 감행한다면? 그러나 어떠한 반론이던간에 하이데거적 반론-의미로서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와 칸트적인 공간론과 시간론이 정위되어 있는 위치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 순수이성비판 제 2부 선험적 논리학. 서론: 선험적 논리학의 개념

 

1. 논리학 일반에 대하여

-인식의 두 근원: 인상에 대한 감수성과 자발성으로서의 능력.

-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감성', 표상을 산출하는 자발성을 '오성'이라고 한다.

-직관을 갖지 않는 개념이나 개념을 갖지 않는 직관도 모두 인식을 성립시킬 수 없다.

  내용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순수직관이란 "그것에 의해서 무엇이 직관되는 형식";

 순수개념이란 "전적으로 대상 일반을 사유하는 형식"/

 순수 개념과 순수 직관만이 선천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논리학: 일반적 오성 사용의 논리학 / 특수한 오성 사용의 논리학.

-전자는 "그것 없이는 어떠한 오성 사용도 성립되지 않는 단적으로 필연적인 사유규칙"

-후자는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기 위한 규칙"

-전자는 또한 순수논리학과 응용논리학으로 구분된다. 순수논리학은 이성 사용의 형식적 면에만 관여하는 것. 응용논리학은 일반적이지만 동시에 경험적 원리를 갖는 것.  전자만이 본래의 유일한 學이다.

-1)이 學(순수논리학)은 사유의 단순한 형식 이외에 아무 것도 문제시하지 않는다.

-2_ 순수논리학으로서 이 학은 어떠한 경험적 원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얻어낼 수 없다.

2. 선험적 논리학에 대하여

-일반논리학은 인식 일체의 '내용'을 배제하고 논리적 형식만을 탐구한다. 즉 표상이 경험적으로 주어졌든 선험적으로 주어졌든 상관없이 표상이라면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법칙을 탐구한다.

-선험적이라고 해서 언제나 초월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어떤 표상이 단적으로 선험적으로 적용되고 선험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어떻게 선험적으로 적용되고 어떻게 선험적으로만 가능한지를 인식하게끔 하는 인식이 초월적이라는 말의 뜻"

-초월적과 경험적의 구분은 다만 인식의 비판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식과 그 대상의 관계와는 상관없다.

-순수 직관이든 경험적 직관이든 어떠한 직관도 아니고, 전적으로 사유의 행위로서 대상에 관여하는, 동시에 순수한 개념을 다루는 학이 선험적 논리학이다.

-"인식의 기원 범위 및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학을 선험적 논리학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3. 일반논리학의 구분에 관하여-분석론과 변증론

-진리기준의 문제.

1) 진리가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면, 이 진리로 인해 이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2) 진리의 보편적 기준은 대상의 구별과 상관없이 모든 인식에 타당해야 한다.

2)-1. 즉 이런 기준은 인식의 내용은 일체 도외시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인식의 내용에 관한 한 어떠한 보편적 진리 기준도 요구할 수가 없다.

-오성의 보편적/필연적 규칙이란 즉 논리학이므로 보편적 진리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논리학에 위치지어져야 할 것이다. 즉 "논리적 규칙에 어긋나는 것"은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은 인식의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주어진 한 인식은 형식적으로는 정합적이나 대상과는 모순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일반논리학 중, 이성과 오성의 모든 형식적 활동을 그것의 기본 요소로 분할하고 그것을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리로 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분석론]이라고 한다.

-즉 어떠한 인식도 형식면에서 이러한 규칙에 비추어 음미해야 하나 이것만으로 실질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에는 부족함은 물론이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논리학 밖에서 나오고, 논리는 이것을 결합하는 것.

-오성이 형식을 부여하는 작업은 매우 강력하므로 단지 규준에 불과한 일반논리학이 실질적인 주장을 실제로 산출하는 [오르가논 機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인된 일반논리학을 변증론 dialektike이라고 부른다.

-중세적인 의미에서 dialektike 는 "가상의 논리학"이상이 아니었다.

-일반논리학이 [기관]으로서 사용되는 경우는 항상 궤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역시 선험적 논리학의 일부로 칸트는 넣는 것이다.

 Q: "논리학"?

   예컨대 헤겔. "대논리학"

          훗설 "논리 연구" 등등..

  칸트가 말하는 판단표, 그리고 그로부터 획득한 범주표가 진정 정확한가 하는 문제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의 경우도 그러했듯이, 반드시 해결할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칸트에게는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듯이 우리 지성의 개념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면, "우리의 지성이 왜 범주에 의해서만 또 범주의 이런 성질과 수에 의해서만 통각의 선험적 통일을 산출하는 특성을 갖느냐 하는 근거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왜 바로 저런 판단 기능을 갖고, 그 외의 판단 기능을 가지지 않느냐, 혹은 왜 시공만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그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B146)

   그러나 어찌되었건 칸트는 감성론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해명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초월적 분석론"의 제 1편 '개념의 분석론'에서 범주에 대한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감성론에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구가 '형이상학적 구명'과 초월적 구명'으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듯이, 분석론에서도 이와 대응되게 "제 1장 「지성의 모든 순수한 개념」을 발견하는 실마리"에서 지성에 선험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구명이, "제 2장 지성의 순수한 개념의 연역"에서는 초월적 구명에 해당하는 "초월적 연역"이 진행된다.

  이 발제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초월적 연역이 진행되는 제 2장의 제 2절에 앞서서 예비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 1절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와 '범주가 초월적 연역에로 넘어감'을 다룬다.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연역의 의미, 연역의 과제, 연역 수행의 어려움 등 연역작업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간략하게 다룬다. 또 한가지 덧붙일 것은 특히 '범주가 초월적 연역에로 넘어감'이라는 대목은 이후 본격적인 연역작업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는 것이다.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

 연역은 원래 법학용어로서 권리의 증명을 의미하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적으로 얻어진 개념들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얻어진 약간의 개념들의 사용권한을 밝히는 작업을 의미한다. 개념은 인식을 하는데 필수적인 것, 즉 인식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인식활동에 필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선험적으로 대상과 상관하는데, 이렇게 대상과 상관하는 방식의 설명을 개념의 "초월적 연역"이라고 한다.

  시공이나 범주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연역하려는 것은 전혀 헛된 짓이다. 우리는 비록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일반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기 쉬우나, 선험적 순수개념의 연역은 말 그대로 경험에 앞서 있는 것이므로 경험적인 방법으로는 이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순수한 개념에 관해서는 초월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경험적인 연역이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지성의 순수한 개념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직관의 영향과 관련 없이도 대상일반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의 순수개념이 범할 수도 있는 월권행위를-이 월권행위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무익한 행위이며, 지금껏 많은 형이상학이 범해온 오류이다-방지하고 순수개념 사용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비판"이다.

  "시공은 현상으로서의 대상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순수직관이었고", 따라서 "시공중에서의 종합"은 객관적인 대상과 관게한다는 점에서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지성개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범주는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관계로 지성에는 객관적 대상과 관계맺음 없이도 대상이 현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대단히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순수지성개념인 범주가 -시공이 그러했듯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떤지, 즉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곧, 범주)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느냐, 다시 말하면 대상의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주느냐 어떠냐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온전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직관에 의해서 얻어진 질료에 순수지성개념이 틀을 지워줘야 한다. 이 경우 바로 순수하게 주관적인 지성개념이 객관적인 것에 어떻게 관계맺는가, 어떻게 전혀 이질적인 것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범주가 초월적 연역에로 넘어감>

  위에서도 말했지만, 순수지성개념인 범주가 있어야만 인식이 가능해진다. "범주란 대상일반의 개념이요, 이런 개념을 통해서 대상의 직관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의 하나에 관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아진다." 가령 "실체범주를 통해서 경험에서의 물체의 경험적인 직관은 항상 주어로만 보아지고 결코 한갓 객어로 보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된다"

 초월적 연역은 위에서 제기한 순수지성개념이 지니고 있는 난점을 해소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제 2절에서 상세히 나타나고 있다.

     *"一般(uberhaupt)"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이 용어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개별을 무시한 전체 즉 보편적 추상을 의미한다. 둘째 특수를 부정하지 않은 전체를 즉 구체적 보편을 의미한다. 셋째 '특히'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일반, 대상일반, 경험일반이라고 했을 때, 두 번째 의미의 일반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사물일반이라고 할 때에는 인간의 감성적 직관방식을 무시한 의미에서 추상적 보편을 지시한 것이다.

 

 11. 수학적 범주와 역학적 범주

 범주가 오성의 체계와 그 작용 기능의 요소를, 범주표가 오성의 체계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범주(범주표)는 선천적인 개념에 의존해서 그 성립이 가능한 "학"을 담보해 준다. 결국 범주(범주표)가 칸트의 작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칸트는 범주표의 네 항목을 크게 두 개로 나누어 앞의 두 항, 즉 분량과 성질의 범주를 개괄하여 "수학적 범주"에 귀속시키고, 뒤의 두 항, 즉 관계와 양상의 범주를 개괄하여 "역학적 범주"에 귀속시킨다. 직관이 대상의 양과 질에 대해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이러한 양과 질이 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대상들간의 관계-여기서 주의할 것은 칸트가 "대상들의 실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이라는 칸트의 용어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그 현존성이 의심할 바 없이 타당하게 여겨지는) 사물(실체)보다 더 포괄적이며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를 포착하고 기술하는 것은 역학적 범주의 소임일 테고, 이것이 "관계"와 "양상"의 범주에 귀속됨은 당연하다. 물론 여기서 "양상"이 어떤 식으로 대상들간의 관계를 설명하는지는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4항 12목으로 구성된 범주표에서 각각의 항에 3목씩이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각각의 항에서 셋째 범주는 어느 것이거나 첫째 범주와 둘째 범주의 결합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방식의 싹이 보인다는 것은 칸트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물론 첫째와 둘째를 단순히 결합한다고 해서 세 번째 범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칸트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이제 이러한 주의를 의식하면서, 우리는 이 과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즉 각각의 항에 있는 범주들을 실제로 비교하고 결합해 봄으로써 이 과정을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자.

 

    12. 각 존재는 하나요 참이며 선하다는 명제

 칸트는 전통형이상학에서 하나·참·선과 같은 개념을 자명하게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로 받아들인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인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주지도 못하고 동어반복에 머무를 뿐이라고 말한다.

 인식의 다양을 종합하여 통일함으로써 참된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통일로써 성질적 단일성인 하나(統一), 그리고 주어진 개념에서 참된 결론이 많이 얻어지면 얻어질수록 객관적 실재성의 특징은 더욱더 많아지는데 이것이 곧 성질의 수다성이 되는 것이요, 객관의 모든 인식에는 완전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선하다는 개념의 의미요, 이것이 바로 성질적 완전성이다.

 단일·진리·완전의 선험적 개념들은 칸트의 범주표를 보완하는 성질의 것, 즉 칸트의 범주표에서 빠진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아니라, 인식이 자기 자신과 일치하기 위해 따르는 논리적 규칙에 도달하는 수단임에 불과하다. 칸트는 이런 개념들을 필경 외적 대상에 관계하는 범주로 보지 않고 대상들의 인식에 대한 형식논리적 요구를 표시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 순수오성개념의 선험적 연역

 

15. 종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다양한 것의 결합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작용이다. 곧 감관에 의해서나 직관의 형식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결합은, 그것이 직관의 다양의 결합이든 개념의 결합이든 오성의 작용이다. 즉 표상간의 결합은 대상에 의해서는 주어지지 않으며 다만 주관 자신에 의해서 수행된다.

-1) 결합은 다양과 다양의 종합 이외에 다양의 통일도 수반한다. 결합이란 다양한 것이 종합적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2) 통일이라는 것은 결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통일이 다양이라는 표상에 부가되어 결합이라는 것을 가능케 한다.

 3) 이 통일은 범주표의 "단일성의 범주"는 아니다.

 3)-1 범주는 판단의 논리적 기능에 기초를 둔다.

 3)-2 판단은 이미 개념의 결합, 즉 여기서의 통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4) 우리는 이 통일을 보다 높은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16에 들어가기 전에- 칸트적 의미에서의 '표상'?

 

16.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에 대하여

- "나는 생각한다"는 인식이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표상될 수가 있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 이런 종류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한의 통각을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여 "순수통각"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또한 "근원적 통각"인 바,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표상에 수반되며 모든 의식에 있어 동일한 표상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통각은 선험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명확하다. 직관의 다양은 하나의 의식에 속하지 않는다면 "나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표상은 하나의 전일적인 의식 속에 통합되어야 한다.

-즉: 다양한 표상이 수반하는 경험적 의식은 분산적이어서 주관의 동일성과는 무관하다. 주관의 동일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지 각 표상이 의식되어야 할 뿐 아니라 주어진 다양이 하나의 의식에 결합되어야만 한다. 즉 주관의 동일성의 통각의 분석적 통일을 전제한다.

-표상이 하나의 의식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면 다양한 표상 각각에 따라 각각의 자아가 있게 될 것. (= 분열증은 통각의 malfunction인가!)

-오성은 판단의 능력이고, 판단은 개념의 종합이며 통각의 통일만이 종합을 가능케 해 주므로, 오성은 표상의 다양을 통각의 통일 밑에 포섭하는 능력에 불과하다. 통각의 통일이야말로 모든 인간 인식의 최고 원칙이다.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칙은 모든 오성 사용의 최고의 원리이다.

-16절의 상세화

- 주어진 것의 표상만으로는 "나는 생각한다"는 통각의 작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되지 않고, 그러면 도대체 생각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

-오성은 인식의 능력이다. 인식은 표상과 대상간의 명확한 관계 설정이다. 대상의 개념은 직관의 다양이 결합된 것이다. 이 결합은 종합을 실행하는 의식의 통일이 필요하다. 의식의 통일은 1) 많은 표상을 하나의 의식에 관여시킨다 2) 표상이 "객관적"으로 되게 한다. 3) 이러한 표상이 인식이 되도록 한다. 모든 오성 사용이 모두 그것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최초의 오성적 인식은 통각의 선험적/ 종합적 통일의 원칙이다.

-어떠한 직관도 "객관적"인 것이 되려면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따라야 한다. 객관이란 하나의 의식에 결합되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주어진 직관은 모두 통각 속에 종합적으로 결합된 것으로서 "나는 생각한다"는 보편적인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는 조건에 따라야 한다.

 

18. 자의식의 객관적 통일이란 무엇인가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란 직관에 주어지는 모든 다양을 객관의 개념으로서 결합하는 것이다.

-요컨대 객관이란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필터를 통과해 나온 직관의 다양에 불과하다 ?

-따라서 통각의 선험적 통일은 객관적 통일이며 의식의 주관적 통일과는 구별된다.  의식의 주관적 통일이란 내감에 주어지는 경험적인 의식 내용을 연상에 의해서 결합하는 것. 연상은 우연적이며 자의적이다.

 

19. 모든 판단의 논리적 형식의 의미는 판단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에 통각의 객관적 통일을 주는 데 있다.

-논리학자들의 판단 이론에 대한 불만. 재생적 구상력과 판단을 구분하여 판단을 오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면, 판단이란 "주어진 인식에 통각의 객관적 통일을 주는 방식이다" 모든 판단에서 쓰이는 계사 'is'는 바로 주어진 표상이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 통합이 되었을을 알리는 표지(indicator)이다.

-즉 우리는 "물체의 표상에 무거움의 표상이 연결되고 있다"가 아닌 "물체가 무겁다 a thing is heavy"라고 보통 말한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계사 is로 인해 표현되는 이러한 판단의 객관성은 사실 '내가 생각하기를...'이 수반되어 있는 객관성이다.

-요컨대 [표상이 직관의 종합에 있어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의해 상호 연관되는 것]이 [객관적]의 뜻이다.   

 

20. 모든 감성적 직관은 범주에 종속한다. 범주란 직관들의 다양을 결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 무엇인가가 즉 (잡다한)지각내용이 우리에게 의식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반드시 종합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 이 종합적 통일을 수행하는 것은 오성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성의 순수개념, 즉 범주에 의해서 종합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성적 직관은 범주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감성적 직관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의식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Q :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위에서 "하나의 의식"을 가졌다라는 것은 곧 우리가 "판단"을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의식과 판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1. 주석

---> 이 절에서는 범주가 "하나의 직관에서 주어진 다양의 경험적 의식이 선천적인 순수한 자기의식에 종속한다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비슷한 의미의 표현으로 범주에 의한 경험적 직관의 통일이란, "주어진 '직관일반'의 다양에 대해 指定하는 통일"도 보인다. 오성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것도 인식할 수가 없고 오로지 인식의 질료인 직관을 결합하고 질서지움으로써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오성의 종합이 전제되지 않는 한, 또 이 종합에 독립하여서는 (직관의) 다양이 주어질 수 없는데, "왜 그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아직 미결이다."

 

22. 범주는 사물의 인식을 위해서, 경험의 대상에 적용되는 외에 따로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

---> 범주 단독으로는 오로지 "사고"가 가능할 뿐, "인식"은 불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의 대의중의 하나이며, 지금껏 계속 반복되어 온 생각, 즉 우리가 갖는 (의미있는)인식은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직관에 개념이 적용될 때에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이 여기서 다시금 천명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직관은 순수직관과 경험적 직관의 두 개로 나뉘는데, 사물의 인식은 오로지 범주가 경험적 직관에 적용될 때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범주는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만 쓰이고, 이런 경험적 인식이 바로 (객관적) 경험(Erfahrung)이다.

 

23. 감성적 직관과 비감성적 직관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인식비판 작업의 대의는 인간인식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형이상학이 진정한 학으로써 건립가능한가 어떤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범주는 감관의 대상에만 적용된다는 명제는 지극히 중대하다." 이 절에서도 역시 우리의 진정한 인식은 감성적 직관에 범주가 적용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 동시에 그 숨은 뜻으로 감성적 직관없는 범주의 적용은 오성의 월권행위이며, 진정한 인식이 아닌 단순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24. 감관의 "대상일반"에다 범주를 적용함

--->여기서 우리는 '내감'과 '구상력(생산적 구상력과 재생적 구상력)'과 '오성의 종합'이라는 개념들과 만난다. 우리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내감이 감성의 일종인 이상, 내감 역시 수동적이다. 즉 무엇인가에 의해서 촉발되지 않는 한 내감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감성이 물자체에 의해서 촉발됨으로써만 외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유비적으로 이야기해서 외감에 있어서 물자체에 해당되는 것은 내감에 있어서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자체를 알수는 없고 오로지 그것의 현상만을 알 수 있듯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은 결코 알려지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 자신의 현상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감을 촉발하는 우리 자신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것으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상력에 의해 선험적으로 종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곧 형상적인 것, 즉 형상적 종합을 말한다.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이 없이는 내감의 형식인 시간에 대한 표상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25.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

--->주지하다시피 칸트에게서 인식이란 직관과 개념의 결합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인식(즉, 자기에 대한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다양한 직관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에서는 이러한 다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통각의 근원적 통일에 있어서 우리가 갖는 수반의식, 즉 이것은 인식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 아닌 경우에 우리가 그 대상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경우에 갖게 되는 의식으로써 이 경우의 의식은 "내가 나 자신에게 현상하는 그대로도 아니요, 내가 "나 자체"인 그대로도 아니라 오직 내가 존재한다는 것 만을 의식"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도저히 자기인식은 아니다.

 

26. "오성의 순수한 개념을 경험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의 선험적 연역

--->우리는 여기서 칸트의 논증이 무언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어떻게 경험에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즉 "우리의 감관에만 나타날 수 있는 일체가 선천적으로 오성에서만 유래하는 법칙에 어떻게 종속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 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즉 직관일반이 오성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범주가, 즉 우리의 오성이 자연에 대해서 법칙을 지정하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자연적 대상, 즉 직관 일반이 오성의 법칙에 종속하기 때문에,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경험대상일반에 적용될 수 있다는 얼토당토 않는 논증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문제삼는 것이, 즉 칸트가 논하고자 하는 자연적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러한 현상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오성의 순수한 개념인 범주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시당초 직관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 역시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전제되지 않고서 얻어질 수가 없다고 한다면 애시당초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어떻게 경험적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생각한다면 칸트가 어째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칸트 자신 자신의 논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어느 쪽으로 보나 이 절에서 칸트가 무엇인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7. 오성의 개념(즉, 범주)을 이처럼 연역한 성과

--->이 절에서 칸트는 지금껏 반복해왔던 주장, 즉 우리의 인식은 경험적 인식이고, 그런 한에서 우리의 인식은 직관과 개념의 공동작품이라는 주장을 다시금 반복한다. 그러나 이 절에서 칸트는 다시금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 관한 문제. 즉 순수한 오성의 개념이 어떻게 경험적 대상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판단력의 선험적 사용'의 장에서 다시금 상세히 진술하겠다는 것을 인지시킨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중요한 문제임을 우리도 인식해야 하겠다.

 

선험적 분석론 제 2편 원칙의 분석론

-형식논리학은 사유의 단순한 형식 일반을 논하는 것이므로 그 분석론은 이성을 위한 규준도 논하여야만 한다. 원칙의 분석론은 전적으로 판단력을 위한 규준이 될 것이며, 오성 개념을 현상에 적용하는 방도를 판단력에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서언/ 선험적 판단력 일반에 대하여

-판단력은 규칙 밑에 포섭하는 능력, 즉 어떤 것이 주어진 규칙 밑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만약 일반논리학이 이러한 능력 역시 자신의 범위 내에 포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규칙에 의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이 규칙은 다시 판단력의 지시를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판단력은 배워질 수 없으며 단지 도야될 수 있을 뿐.

-선험적 철학은 순수 오성 개념 속에 주어진 규칙 외에 규칙이 적용되어야 할 경우를 선천적으로 증시(證示)할 수가 있다. 개념과 대상이 합치할 수 있는 조건을 선천적으로 도출해 내어야 한다.

판단력의 선험적 이설: 제 1장 순수오성개념의 도식론

-대상을 개념 하에 포섭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개념이 '동종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 오성 개념은 직관과 하등의 동종적인 면이 없다. 어떻게 순수 오성 개념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을까?  경험 추상에 의해 생기하는 개념의 경우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시간은 내적 직관에서 다양을 순수 직관 안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선험적 시간 규정은 그 보편성과 선험성에서 범주와 동종이다. 그러나 다양한 것의 모든 경험적 표상 속에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한 시간은 현상과 동종의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매개하여 선험적 오성 개념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성이 그 사용에 있어 의거하는 감성의 이러한 형식적 조건을 도식이라고 한다. 오성이 도식을 따르는 작용을 순수오성의 도식론이라고 한다. 도식은 형상과 구분되어야한다. 형상적 종합-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역시 도식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도식은 형상화될 수 없으며 범주 일반에 따른다.

-범주와 결부시켜서:

1) 수: 같은 종류의 다양한 직관을 통일(집적)하는 것. 통일은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 실재성: 감각 일반에 대응하는 것.부정성: 비존재를 나타내는 것. 시간이 충만한지에따름.

3) 질: 실재성이 시간에 있어서 연속적으로 산출되는 것.

4) 실체: 그 자체로는 항상 불변인 시간 자체가 현상에 대응하는 것.

5) 원인 및 인과성: 실재적인 것이 언제나 다른 실재적인 것에 계기함

6) 상호성: 실체의 규정들이 공존함. 7) 가능성: 표상의 종합을 시간제약 일반에 합치시킴

8) 현실성: 일정한 시간 안에 존재함 9) 필연성: 어떤 대상이 언제나 존재함

요컨대 분량의 도식은 "시간의 종합으로 대상이 계시적으로 지각됨";

       성질의 도식은 "지각과 시간 표상의 종합 (시간의 충실)"

       관계의 도식은 "모든 시간에 있어서 지각의 상호 관계"

       양상의 도식은 "대상이 시간에 속하는지 여부와 속함의 방식"

 -도식은 규칙에 따른 선천적인 시간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적 감간에서의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에 귀착되고, 나아가 통각의 통일 일반에 귀착된다.

 -도식은 범주를 실재화하는 동시에 범주를 제한한다. 도식은 본래 "현상일 뿐이다" 제한이 없다면 범주는 공허한 관념일 뿐이다.

 판단력의 선험적 이설: 제 2 장 순수오성의 모든 원칙들의 체계

 -앞 잘에서 선험적 판단력을 고찰한 이유는, 선험적 판단력이 종합판단을 하기 위해 순수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에서는 오성이 실제로 선험적으로 형성하는 여러 가지 판단을 체계적으로 결합하여 제시하는 작업을 행한다. 범주야말로 모든 오성 사용에 있어 일체의 경험에 관여하므로 이것은 범주표를 따라야만 한다. 또한 이 부분은 "범주에 관여하는 것"만 다룬다. 또한, 종합판단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분석판단을 고찰해볼 필요가 있겠다.

  제 1 절 모든 분석판단의 최고 원칙에 대하여

 - 모든 인간 판단의 일반적 조건은, 판단이 자기 모순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모순율을 허위를 불식하는 소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만 보여지나, 분석판단의 경우 진리성을 모순율에 따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합 판단의 경우 이런 진리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율은 결코 시간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다.

  제 2 절 모든 종합적 판단의 최고 원칙에 대하여

 -종합판단에 있어서는, 주어진 개념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것을 주어진 개념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런데 주어진 개념을 다른 개념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총괄자가 필요한 바, 그것은 시간이다. "총괄"이란 시간을 매개한 내감에서의 표상의 종합이며, 이 표상의 종합은 구상력의 작용이며, 표상의 종합적 통일은 통각의 통일에 의거한다. 따라서 내감의 총괄, 구상력의 종합 그리고 통각의 통일이 종합판단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

 -어떤 인식이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는 대상이 주어져야만 한다. 대상의 주어짐이란 대상의 표상을 경험에 관계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이란 현상의 종합적 통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의 기초는 또한 통각의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통일이다. 따라서 객관적 종합판단의 최고 원칙은, 어떠한 대상이라도 경험되는 한 직관의 다양이 통각에 의해 종합적으로 통일된는 조건에 따른다는 것이다.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경험의 대상을 가능케하는 조건이다.

  제 3 절 순수오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의 체계적 표현

 -순수오성개념뿐 아니라, 순수오성개념의 종합적 "사용" 역시 수학적인 것과 역학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수학적 사용의 원칙은 직관으로만 향하며 직접적으로 확실하지만, 역학적 사용의 원칙은 현상일반으로 향하며 추론적으로만 확실하다.

 -(사용) 원칙의 표에 대한 지시는 당연히 범주표에 따른다. 도식이란 범주가 객관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오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선취적 인식

 3) 경험의 유추

 4) 경험적 사유 일반의 공준

 

 1. 직관 intuition, anschaung 의 공리: "모든 직관은 외연량이다"

 -모든 "현상"은 공간과 시간을 따르는 "직관"을 포함한다. 공간과 시간의 존재양식 자체가 분량(quanti)의 개념을 따른다. 다양의 종합 연후에나 공간과 시간이 가능한데 분량이란 다양의 동종의 것을 결합하는 통일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외연량이란 부분의 표상이 전체의 표상을 가능케 하는 분량을 의미한다. 현상은 모두 분량이며 외연량이다. 모든 부분을 순차적으로 집적하여 선의 직관을 그려보지 않고서는 어떠한 선도 표상하지 못한다. 시간 역시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계속적인 진행을 생각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모든 현상에 포함되는 직관은 공간이나 시간을 따르므로 모든 현상은 외연량이다. 산출적 구상력의 이러한 "계속적 종합"에 의거하여 외연의 수학-기하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수학이 경험에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직관은 외연량이다"는 공리에 의거하며, 역으로 모든 직관은 외연량이므로 수학이 경험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수학이 감각의 대상을 기술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감각의 대상을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서 해방하려 하며 대상을 현상 아닌 물자체로 잘못 보는 것이다.

 

 2. 지각 perception, Wahmehmung 의 선취적 인삭 antipation:

 -"모든 현상에 있어서 감각의 대상인 실재적인 것은 내포량, 즉 어떤 정도를 가진다"

 -"지각"이란 "감각"이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다. 지각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공간과 시간처럼 순수직관이 아니다. 반면 감각 자체는 전혀 객관적인 형식을 결여하고 있고, 시간도 공간도 따르지 않으므로 어떠한 외연량도 주어지지 않는 반면, 일정한 정도 즉 내포량이 주어진다. 경험적 직관에서 감각에는 '실재성'이 대응하며 이의 결여에는 '부정성'이 대응한다. 감각은감소되는 것이므로 실재성과 부정성 사이에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이 깔려져 있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양'이지만 부분과 전체가 구분되는 외연량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단일성으로서만 지각되고 부정성에의 근접에 의해서만 수다성이 표상될 수 있는 분량"을 내포량이라 칭한다. 모든 현상일반은 직관으로보면 외연량으로서, 단순한 감각의 면에서 보면 내포량으로서 모두 연속량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변화는 연속적이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현상의 어떤 양태에 관한 것이며 양태를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뿐이다.

 -현상 속에는 실재적인 것이 '전혀 없음'을 가르쳐주는 지각이 있을 수 있을까? 감각이 내포량으로서 연속성을 따르는 한 완벽한 '부정성'을 띄는 감각은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완벽한 부정성은 결코 지각될 수 없을 것이며 지각되는 '있는 것'으로부터는 결코 추론될 수 없다.

 -직관의 외연량은 동일하지만 감각의 내포량은 상이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자들이 모든 질을 양으로 환원하는 것은 그들이 혐오하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은 오성이 시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을 제하서도 어떻게 감각 그 자체가 정도를 가질 수 있는 지를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지 의아해 할 것이다: (다음의 논변이 말이 되는 것일까?)

 1) "실재적인 것"은 개념 자체가 존재를 포함하는 어떤 것을 표상한다. 즉 경험적 의식일반에 있어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2) 즉, 내적 감각에 있어서는 경험적 의식은 0에서 "충만한 존재"에 이르기 까지 어떤 정도라도 취할 수 있으며, 일정한 외연량의 현상이 가지는 감각의 크기가 다른 외연량의 총계가 가지는 감각의 크기와 같을 수 있다.

 3) 그렇다면, 외연량을 전적으로 도외시 한 단순한 감각의 경우에서도 그 정도가 0으로부터 주어진 경험적 의식만큼의 실재성에 이르기까지의 종합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이다.

 4) 즉 모든 성질은 어떤 정도, 내포량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3. 경험 Erfahrung 의 유추:

 "경험은 오로지 지각의 필연적 경헙표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경험"이란 "지각"을 통해서 "대상"을 규정하는 인식이다. 경험은 지각의 종합이며 의식 안에 있는 "지각의 다양"-?-을 종합하여 통일한다. 경험은 지각으로부터 '대상'을 인식하며, 현실적 존재가 시간에 있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지각의 다양을 배치하여야만 한다. 시간 자체는 지각될 수 없으므로 대상의 존재는 시간 일반에 있어서 다양의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르는 것이며, 다양의 결합이 늘 필연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합 방식 역시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시간의 세 가지 양상은 상주불변성, 계기, 동시존재이다. 통각의 통일이 시간을 매개로 하므로 세 가지 규칙은 보편적 원칙이다. 이 원칙의 특징은 현상 자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의 "현실적 존재"와 "상호관계"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앞의 두 원칙 (1,2)는 현상의 지각과 현상의 직관이 어떻게 수학적 종합의 규칙에 따라 '산출'되는 지를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를 구성적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현상의 "현실적 존재"는 구성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통제적인 원리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유추는 선험적인 오성 사용의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적인 오성 사용의 원칙으로서만 의의와 타당성을 가지며, 현상은 최초부터 범주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도식 밑에 포섭되어야 한다. 원칙 자체에 있어서는 우리는 범주를 사용하지만, 원칙의 사용에 있어서는 도식을 범주 대신에 사용하는 것이다.

 A. 제 1의 유추: 실체의 상주불변성의 원칙: "현상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실체는 상주불변하며, 자연에서 실체의 분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시간 자체는 상주하며 변화하지 앟는다. 시간은 그 자체로서는 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일반을 표상하는 어떤 기체(基體)가 지각의 대상으로서 현상 속에 있어야 하며 모든 변화 또는 동시 존재는 이 기체에 의해서 지각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의 기체가 실체이다. 시간관계에 있어 상주불변한 것이 현상에 있어서의 실체이며, 언제나 동일한 그대로 있으므로 증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 만약 상주불변한 것이 경험의 근저를 이루고 있지 않다면, 지각만으로는 경험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인지 계시적으로 야기되는 것인지를 전혀 결정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다양의 지각은 언제나 계시적이다. 상주불변하는 시간 그 자체가 "기체"로 정립되어야만 도대체 시간 규정이 가능하다. 변화는 시간 자체에는 관계하지 않으며 시간에 있어서의 현상에 관계하기 떄문이다. 상주불변한 것이야말로 어떤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도대체 이행한다는 것의 표상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기체에 붙어 일어나는 단순한 "양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체에 붙는 규정을 우유성 (accidents)라고 하고, 이런 것에 '현실적 존재'가 부가된 것으로 보면 "속성"이 된다. 이때 실체의 현실적 존재를 '실체성'이라 불러 이를 구별한다. 이러한 분리는 인간 옷어의 조건상 불가피할 것이다. 변화란 동일한 대상의 현실적 존재 방식이 계속 생멸하는 것에 불과. 변화하는 '것'은 모두 항존적이나 다만 그 상태만 변역(變易)하는 것일 뿐이다.

 -무(無)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무에 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전래되어 오는 명제이다. 기독교적으로 앞의 명제를 반박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경험의 분야에서의 현상일 뿐 물자체가 아니다. 만약 어떤 것이 단적으로 무(無)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허한 시간은 지각의 대상이 되지 못하므로 이와 같은 시점은 도대체 고정될 수가 없다. 시간규정의 기체로서의 어떤 실체가 단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하고 단적으로 소멸한다면, 복수의 시간이 나타날 것이며 경험을 통일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의 시간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유일하며 여러 가지 다른 시간은 그 속에서 통합되어야만 한다.

  이 발제문은 순수오성의 종합적 원칙 전체의 체계적인 표시 중 세 번째 원칙인 "경험의 유추"중 둘째 유추와 셋째 유추에 대한 정리이다.   

  *"경험의 유추"의 대원칙 : "경험의 유추"의 원리는 경험은 지각들의 필연적 결합이라는 표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1. 둘째 유추-인과 개념의 객관적 사용 원칙

 1> B판 : 인과성 법칙에 따른 시간적 후속에서 생기는 원칙 :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법칙에서 생긴다. (B232)

 2> A판 : 발생(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상 바로 그에 후속되는 어떤 것을 전제한다. (A189)

 ---> 둘째 유추는 판단에 있어서는 가언 판단과 범주에 있어서는 인과성과 의존성, 도식에 있어서는 시간순서(규칙에 따른 後續)와 관계 맺는다. 결국 둘째 유추는 인과법칙에서 생기는 것이다. 어떤 것도 無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 발생한 것, 즉 변화를 지각한다면 그 변화로 인해 나타난 것과 그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이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태가 있다면 그 사태는 필연적으로 어떤 다른 사태의 후속이 되는 것이고, 이 말은 동시에 반드시 이 후속하는 사태에 선행하는 사태가 있음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주어진 사태는 자신보다 선행하는 어떤 다른 사태를 지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험의 유추"다. 이 때 후속하는 사태, 곧 규정된 것이 결과이고, 선행하는 사태, 곧 규정하는 것이 원인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필시 주관적인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없이는 객관적인 현상을 의미있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원인이니 결과니 하는 개념 역시 요청된 것이고, 이러한 변화를 의미있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체 개념 역시 요청된 것이며, 후속 사태를 규정하며 발생 가능케 해주는 어떤 선행적인 힘 혹은 사태가 있다는 것, 혹은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역시 요청된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원인과 결과 개념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요청된 한갓 주관적 개념으로 치부하지 않고, 실재적 경험 속에 적용함으로써 의미있게 하나의 사태를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 역으로 칸트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 같은 순수지성개념 즉 범주 없이는 애시당초 경험이 불가능하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이미 말했듯이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는 시간순서를 매개로, 즉 도식으로 해서 감성적 경험에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2. 셋째 유추-상호 작용 개념의 객관적 사용 원칙

 1> B판 : "상호 작용 혹은 상호성의 법칙"에 따른 동시존재로 보게 하는 원칙 : 모든 실체는 공간에서 동시적인 것으로 지각될 수 있는 한에서 일관된 상호작용을 하는 중에 있다.(B256)

 2> A판 : 모든 실체들은 그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에서 일관적 상호성( 즉 서로간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A211)

---> 셋째 유추는 판단에 있어서는 선언판단과 범주에 있어서는 상호성과 도식에 있어서는 '공존 즉 동시'와 관계 맺는다. 경험의 셋째 유추는 실체들간에 일관적인 상호작용이 있음을 지시해준다. "상호성"이란 무엇인가? "상호성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상호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상호작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상호성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동시 존재에 적용가능하다. 즉 동시존재가 있어야만 상호성개념은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한 사물에 대한 지각이 다른 한 사물에 대한 지각에 뒤따르고, 이 다른 한 사물에 대한 지각이 저 한 사물에 대한 지각에 교환적으로 뒤따르면, 이 두 사물은 "동시에 존재한다"고 인식된다.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상호작용하고 상호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야만 하는가? 분명히 이 둘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가령 선풍기 옆에 오디오가 있다고 해보자. 이 둘을 우리가 동시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이 둘을 결정적으로 갈라 놓는 빈 공간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 둘은 하나의 공간안에 있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우리의 지금과 같은 일반적인 인식 역시 단일한 공간안에서 가능함을 뜻한다. 또 인과관계에서도 그러했듯이,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에 의해서 인과관계가 가능했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동시존재 역시 상호성이라는 선험적 개념, 즉 범주가 없다면 그 존재가 불가능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인과관계와 상호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연이 하나의 통일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칸트에게서 삼라만상은 종적으로 횡적으로, 시간상 서로 잇따라(선후적으로) 공간상 서로 곁하여(병렬적으로)-바로 시간상으로는 동시적인 바-연결 통일되어 있는 "한 자연"을 이루며, 순수지성개념들은 공간과 시간의 질서 위에서 주어지는 현상들을 "한 자연"이도록 하는 필연적인 연결법칙이다.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

1> 경험의 형식적 조건(직관과 개념에 관한)과 일치하는 것[현상]은 가능적이다[있을 수 있다, 가능적으로 존재한다].

2> 경험의 질료적 조건(감각)과 관련하는 것[현상]은 현실적이다[실제로 있다,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3> 경험의 일반적 조건에 의해서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규정되어 있는 것[현상]은 필연적이다(즉,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순수오성의 종합적 원칙의 체계 중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료", "경험의 유추"를 살펴 보았다. 이제 원칙 중 마지막으로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이하, "요청")을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요청"의 원칙이 양태범주와 관계를 맺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분량, 성질, 관계의 범주들이 대상의 무엇임, 즉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과는 달리, 대상의 존재방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전자의 세가지 범주가 대상의 실질성을 규정하고, 객어로서 객체의 내용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양태범주는 "그것들이 객어로서 보태지는 개념을 객체의 규정으로서 조금도 확대하지 않고, 이런 개념의 인식능력에 대한 관계만을 포함한다는 특성을 가진다."(B266) 이런 생각은 곧 다음과 같은 생각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물의 개념이 그 본질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즉 그 사물의 존재방식-가능적, 현실적, 필연적-을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이 사물의 존재방식을 묻는 물음에 답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답이 그 사물의 실질성을 조금도 늘려주지는 않는다. 존재방식은 단지 인식주관이 대상이 맺는 관계의 방식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존재방식이라는 것이 정말로 한 사물의 실질성, 즉 그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일까? 존재방식은 단지 주관과 대상과의 관계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칸트의 인식이론에서 인식주관과 대상이 관계맺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즉 우리가 대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인식주관과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서-존재방식에 있어서 주관이 대상을 규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주관이 규정한 것일 뿐이 된다. 한 사물이 어떤 특정한 존재방식으로 인식된다면, 그리고 어떤 특수한 경험적 주관만이 그러한 인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늘 강조하듯이 초월적이고 보편적 주관이 그러한 인식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존재방식 역시 사물의 실질성에 해당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다시 칸트의 논의로 돌아가자.

"가능적으로 있음"은 현상이 도대체 현상으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것의 양적인 규정("직관의 공리"를 상기하라.)과 합치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현존의 가능성"은 종래에 생각되던 것처럼 '사고의 무모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율을 어기지 않는다고 해서, 즉 사유가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존재 가능한 것은 아니다.(물론 존재 가능한 것은 사유가 가능하지만 말이다.)

"현실적으로 있음"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것, 사물의 사물임에 속하는 것을 표시해주는 것, 즉 경험의 질료적 조건인 감각과 관련됨이다. 즉, "사물의 현실성을 인식하기 위한 요청은 지각을 요구하고 따라서 의식된 감각을 요구한다."(B272) 여기서 우리는 실질성과 현실성이 동치가 됨을 알 수 있다. 물론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할 경우 동치가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실질을 말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의 (존재의) 현실성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현실성이란 공간과 시간상에 주어지는 감각에서 그 실질이 마주치는 것에 대한 오성과의 관계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칸트는 자기 이전,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관념론을 반박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있음"의 요청은 "현존의 질료적 필연성에 관계해 있고, 개념들의 연결에 있어서의 한갓 형식적·논리적인 필연성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B279) 이러한 요청에 의해서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형이상학에서 언급되어왔던 의미의 필연성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필연성이란 필연적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필연적인 것이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생각 불가능한 것으로, 따라서 그런 것은 반드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칸트가 이 세 번째 요청에 의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제기된 범주와 원칙들에 의거해서, 즉 인과법칙이라든지 상호작용 등에 의거해서 자연계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우연적이지 않으며, 또 필연적이라고 해서 맹목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인 듯 하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세 번째 요청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물의 필연적으로 있음, 즉 현존의 질료적 필연성은, 그 사물의 현존하는 것과의 관련이 역학적인 인과법칙과 같은 경험의 조건들과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됨으로 해서 규정된다."

 판단력의 선험적 이설- 제 3장 모든 대상 일반을 현상적 존재와 본질적 존재로 구별하는 근거에 대하여

 오성에 내포되어 있는 선험적 요소는 모두 경험적 '사용'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논구 과정에서 얻어진 바였다. 그런데 예컨대 오성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유의미하게 개입할 수 있는지 어떤지하는 것을 식별할 수 없다면 스스로의 권역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리라. 개념의 선험적 사용은 개념이 [물자체]에 적용되는 것을, 개념의 경험적 사용은 개념이 오직 현상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오성의 선천적 원칙이 오직 경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 선험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된다면 이는 중대한 귀결을 예상케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상이 없이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대상은 직관을 통해서만 주어지며 어떠한 순수직관이라도 경험적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개념은 오직 경험적 직관에만 관계한다.

 예컨대 수학적 개념, 특히 그 순수직관에서의 수학의 개념을 보라. "공간은 3차원을 가진다", "두 점 사이에는 하나의 직선이 있을 뿐이다"등의 명제는 현상에 있어서 그 의미를 나타낼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량의 개념을 보라. 분량이란 어떤 사물에 있어서 어떤 단위가 몇 번 정립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사물의 규정(한정)이다. 이는 시간과 시간에 있어서의 종합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약 시간에 있어서의 현실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상주불변성을 제거한다면, 실체의 개념으로서 남는 것은 판단의 주어라는 논리적 지위뿐이다. 그러나 논리적 특성만으로 어떤 사물이 이러하다고 과연 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원인의 범주는 하나의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연쇄적인 존재와 비존재에 관계한다. 그러나 시간계열에 있어 계시적인 연속을 표상할 수 없다면 비존재와 존재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다. 상호성의 범주를 포함하여 모든 관계의 범주는 대상 자체와 관계하지 않으므로 실체의 상호관계에 대해 그것만으로는 의미있는 규정을 할 수 없다. 양태의 범주의 경우, 개념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맞바꾸려는 궤책은 다만 기만적일 뿐이다.

 오성은 가능적 경험의 형식을 선취하는 이상은 할 수 없다. 오성은 감성의 한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감성적 직관이 모든 제약이 도외시되는 경우 순수직관만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규정되지 않는다. 개념의 사용 역시 대상을 개념에 포섭되게 하는 판단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실로 사물 일반에 대해 선천적인 종합적 인식을 몇 개의 공리로부터만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자칭하는 존재론 ontologie 이라는 불손한 명칭은 순수이성의 단순한 분석이라는 겸손한 명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순수범주는 선험적 '의미'를 가질 뿐 어떠한 선험적 '사용'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범주는 그 기원에 있어서 감성과 직관형식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관의 모든 대상을 넘어 적용을 확대하는 일이 허용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구별은 원래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직관하는 방식과 대상의 성질 자체-물자체-를 구분한다. 현상으로서의 그러한 대상을 감성체/현상체라고 칭한다면, 감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른 가능적인 사물로서 이를테면 감성체에 대립되는 [것]을 오성체; 가상체라고 칭한다. 오성은 현상체를 떠나서 대상 그 자체라고 자칭하는 또 하나의 표상을 만들어 여기에 대해서도 개념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것 일반]이라고 하는 전혀 불명확한 개념을 감각을 떠난 일종의 지적 직관 intellectual intuition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 자체]-본질체라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적 직관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위와 같은 오성의 분석론은 또한 본질체에 대한 이론이 된다. 즉 현상으로서가 아닌 물자체로서 사유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이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자체를 이렇게 우리의 직관양식과 분리함에 따라 오성은 물자체를 고찰하는 데에는 오성의 범주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범주는 시공간을 통해 직관이 통일된 연후에나 적용가능한 것이다. 시간 통일을 찾아 볼 수 없는 본질체에 있어서 범주는 사용의 여지는 물론 그 의미마저 상실한다.

 대체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개념의 무모순성으로서가 아니라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에 의해 확증된다. 우리가 굳이 본질체를 범주를 통해 인식한다는 것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감성직 직관이 아닌, 예컨대 지적 직관과 같은 별도의 직관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 그리고 개념이 모순을 지니지는 않지만 객관적 실재성은 인식할 수 없는 경우 이를 개연적이라고 칭한다. 본질체의 개념, 즉 감관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로지 순수 이성에 의해 사유되어야 할 물자체로서의 [것]의 개념은 무모순적이다. 게다가 감성적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을 보지하기 위해서 요청되기까지 하는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러한 본질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인지될 수 없다. 즉 오성이 감성의 분야를 넘어선 상태에서 '실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직관을 가질 수도 없고 그러한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개념 역시 없다. [것]을 현상체-본질체로 나누고 세계를 감성계와 오성계로 나누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필요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감성계 mundus sensibilis 와 예지계 mundus intelligibilis라는 용어가 '뜨고' 있다. 현상의 총괄을, 그것이 직관되는 한에서 감성계라고 일컬으며 현상의 관계가 일반적 오성 법칙에 따라 사유되는 한에서 그것을 오성계라고 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변적 천문학은 예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상에 관해서 오성도 이성도 사용되고 있으며, 현상이 아닌 가상체의 경우 오성과 이성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도리어 물어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오성은 대상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 표상한다"고 함은 선험적 의미가 아닌 경험적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 즉 가능적인 경험과의 관계안에서만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예지적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은 이것이 적용되어야 할 일체의 원칙을 결여하고 있다. 개연적 사고를 위해 이러한 대상을 남겨둘 여지는 있지만 이는 경험적 원칙을 제한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며 경험적 원칙의 영역 이외의 대상은 그 속에 포함하지도 않고 지시하지도 않는다.  

 본질체 noumena 와 현상체 phenomena의 부록-  

                            반성개념의 모호성 ambiguity 에 대해서

       ~ 경험적 사용과 선험적 사용을 혼동함에서 생기는~   

 반성 (Reflexio, reflexion)은 1) 대상에 대한 개념을 얻기 위해 대상 그 자체에 관계하지 않고 2) 우리가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주관적 조건을 찾아내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의 상태'이며 3) 주어진 표상과 우리의 상이한 인식 원천 ,혹은 방식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반성개념이 특히 다루어지는 까닭은 그것이 토픽 topik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대립,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의 형식 등의 "표제"는 마치 범주와 같이 대상에 적용됨으로써 쓰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범주와는 다른 토픽이다. 이들은 '대상'이 포함되는 범주가 아닌, '인식'이 포섭되는 "장소"-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이다. 즉 토픽이란

대상을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는 것(분량과 실재성 realitat)에 대해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이 형성되기에 앞서 이루에지는 표상들의 비교를 사물 일체의 다양한 표상에 대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토픽들- 혹은 비교개념 conceptus comparationis-의 위치는 사물이 감성에 속하는 지 오성에 속하는지에 따른다. '따라서' 반성 개념, 즉 주어진 표상이 감성 혹은 오성 어느 쪽에 속하는 지를 인식하는 것이 토픽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논리적 반성에서는 감성과 오성의 구별은 전적으로 제외하고 내감에 주어진 표상은 모두 동등하게 취급되는 데 반해 선험적 반성에서는 인식 능력의 구분을 따지므로 각 토픽이 어떤 위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가 엄격하게 드러난다.

 칸트가 들고 있는 토픽은 다음과 같다.

1) 동일성과 차이성. 성질과 분량이 같다면 대상은 같다고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이 문제될 때에는 성질과 분량은 물론 공간에서의 위치와 장소까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요컨대 공간에서 위치가 틀린 것은 '수적' 차이성을 낳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현상을 물자체-말하자면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오직 성질과 분량만을 현상에 있어서의 동일성과 차이성의 조건으로만 본다. 이는 성질과 분량만을 고려에 넣는 그의 동일자 구별 불가능의 원리- 역으로 하면 속성과 수량이 같다면 두 현상은 동일하다- 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공간은 현상의 조건이므로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2)일치와 대립. "실재성간에는 어떤 대립도 생각할 수 없다" 현상에 있어서 실재적인 것들은 서로 대립하고 상호파괴한다.

3)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자기와 '다른 것' 과의 관계가 전혀 없는 것만이 내적이다. 순수오성의 대상으로서의 실체는 내적 규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순수 오성과 '다르지 않은 것' 즉 사유이외에 내적 감관이 주는 것 중 내적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라이프니츠의 실체는 본질적 실체 substatiae noumena 이고- 현상적 실체 substantia paenomenon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내적인 것만을 실체에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단자만을 실체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상적 실체에서 내적 규정이란 사실상 여러 속성들의 관계에 불과하며 우리는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들 (인력, 저항력, 불가입성)만을 통해 내적 규정을 상정할 뿐이다.

4)질료와 형식- 이는 오성의 모든 사용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질료는 규정되는 것 일반을 의미하며, 형식은 그 규정작용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것을 질료, 종별적인 것을 형식이라고 칭했다. 판단에서는 개념이 질료고 판단 형식이 형식이다. 사물일반에 있어서는 무제한적 indefinite 실재성이 질료요 실재성을 제한하는 부정성이 형식으로 간주된다. 라이프니츠는 어떤 경우라도 질료-실체-가 형식-관계-에 선행한다고 파악하였고 공간과 시간은 단자에 부수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관한다면 이는 맞을 것이다. 주지주의적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이외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은 감성적 직관 형식이며 모든 현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특수한 주관적 조건에 한해서는 형식이 질료에 선행한다.

 라이프니츠는 반성 개념의 이의성- 감성에 관계하는가 아니면 오성에 관계하는가-를 면밀히 살피지 않고, 모든 대상을 다만 오성을 통해 규정하고 비교함으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거대한 오해의 체계을 건설하였다. 그에게 감성은 다만 혼란된 효상의 방식이었고 무시해야만 할 것이었다. 현상은 그에게 곧 [물자체]의 표상이었다.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현상을 지성화하였다. 이는 로크가 오성개념을 경험으로부터의 추상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은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즉 두 영명한 철학자는 모두 인식의 한 원천에만 집착한 나머지 두 원천의 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동일성과 차이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공간안에서의 대상의 위치를 도외시하여 동일자 구별 불가능성의 원리에는 공간이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일까?)

 일치와 대립에 관해서: 실재성은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실로 모순은 주관 내부에서 실재성들이 결합하는 곳에만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대립과 부정은 단지 부정성에의 접근으로만 처리하였다. 제한이나 부정(否定)이야말로 실재성과 모순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라이프니츠는 모순대립만을 알았지 상호파괴라는 대립을 몰랐던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실체 일반은 전적으로 내적이지 않으면 안되며 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사물은 물자체가 아니라 다만 현상이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순전한 관계뿐이다. 물질은 현상적 실체이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물질의 작용과 부분뿐이다. 단적으로 본질적인-내적인- 물질로서 순수오성에 의해 본질이 파악되는 본질체 개념으로서의 물질은 '망상에 불과하다' 만약 '사물의 내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한탄이 '현상이 무엇인지는 오성에 알려지지 않는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런 망상은 해롭기까지 하다.

 질료와 형식에 대해서: 단순한 오성에 의하자면 질료는 형식에 선행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범주-상호작용의 범주와 인과 귀결의 범주-로 환원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시공간을 단자들 간의 관계 범주로 생각했다. 이는 그가 사물 개념에 있어 감성을 도외시하고 대상 그 자체를 지적 직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려지는 것은 이와 같다. 라이프니츠는 오성만을 통하여 네 가지 토픽을 설정하려하였으나 이는 현상에 관계하는 바에 있어서는 잘못이다. 오성은 감성에 대하여 현상에 관계하도록 경고하고 다만 초험적 대상으로서만 대상 자체를 요청한다. 이러한 초험적 대상은 분량이나 실재성으로나 심지어 실체로도 사유되지 않는 것이다.  

 

                          *초월적 변증론 : 들어가는 말

      1. 초험적 가상

「초월적 논리학」의 첫 번째 부문인 <초월적 분석론>에서 순수오성개념인 범주의 분석과 그 범주의 경험적 사용 원칙에 논의를 끝마치고 나서, 칸트는 두 번째 부문인 <초월적 변증론>에서 "초험적 가상"의 문제를 다룬다. 칸트의 말마따나 진리이건 오류이건 가상이건 간에 이것들은 모두 단지 표상이나 직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생각되는 한의 대상에 대한)'판단'에만 있다.(B350) 이러한 오류는 판단의 주관적 근거와 객관적 근거가 뒤섞이는 데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감성과 오성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주는 초월적 반성이 필요하다.

"가상"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물론 칸트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물론 "초험적 가상"이다.) 판단력이 상상작용의 영향을 받아서 생기는 '경험적 가상'(B352), 일반논리학의 규칙에 주의하지 않는 데서만 발생하는 '논리적인 가상'과 범주를 경험대상에만 사용하지 않고, 순수오성을 초험적으로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생기는 '초험적 가상'이 그것이다. 즉 '초험적 가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용되는 '내재적인 원칙'이라는 용어에 대비되어, '초험적인 원칙'이라 불린다. '초험적인 원칙'은 단순히 범주사용의 오용이 아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초험적 원칙'은 애시당초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에 의한 것이요, 범주사용의 오용은 판단력의 과오에 의한 것일 뿐이다.(이 대목의 구분은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초월적 변증론은 초험적 판단이 가상인 까닭을 폭로하고, 동시에 이 가상에 속지 않도록 방지하는"(B354) 것이며, 여기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술했듯이, '초험적 가상'은 "인간의 이성에 고착해 있는 것"(B354)이기 때문이다.

 

    2. 초험적 가상의 자리로서의 순수이성

 A. 이성 일반

"우리의 모든 인식은 감관에서 출발하여 오성으로 나아가고 이성에서 끝장이 난다."(B355)라고 말할 정도로, 칸트는 '이성'이 우리 인간의 "최상의 인식능력"(같은곳)임을 확실히 해둔다. 이성의 사용은 크게 두가지-논리적(형식적)사용과 실재적(실천적 혹은 선험적)사용-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자는 삼단논법과 같은 간접추리의 능력이고, 후자는 개념을 산출하는 능력이다.

 이 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원리들의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이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칸트는 구구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 원리란 "오성의 제약된 인식에 대해서 무제약인 것을 발견하고, 제약된 인식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B364)이다. 물론 오성 역시 통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성이 규칙(원칙)들을 매개로 해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원리들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이다."(B359) 이것이 곧 "이성의 통일"인데, 오성의 잡다한 인식을 개념(이념)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이성에 대해서는 오성의 인식이 '잡다'로 불리우는 것이 재미있다.)

 B. 이성의 논리적 사용

 하나의 명제(대전제)로부터 하나의 판단(결론)이 곧바로 소전제(매개념)의 매개없이 결과되는 직접추리를 '오성추리'라고 한다면, '이성추리'는 삼단논법과 같은 간접추리이다. 칸트는 이성추리를 대전제의 판단의 "관계성"에 따라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는데, 정언적 추리, 가언적 추리, 선언적 추리가 바로 그것이다.(B361) (우리는 여기서 칸트가 이성추리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판단의 관계성'을 삼은 이유를 물어야 할 것이다!)

 또, 이성의 통일성에 대해서 칸트는 다시금 강조를 한다. "이성은 그 추리작용에 의해서 오성의 자못 다양한 인식을 최소수의 원리(보편적 조건)로 환원하고, 이 때문에 오성의 다양한 인식들에 최고의 통일을 주려고 한다."(같은곳)

 C. 이성의 순수사용 [이성의 자체사용]

이 절에서 우리가 수행할 과제는 더 나아가 이 절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수행할 과제는 "이성자체가 즉 순수이성이 선천적으로, 종합적인 원칙과 규칙을 과연 내표하고 있느냐, 또 이러한 원리들의 본질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B363)을 규명하는 것이다.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위의 B절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칸트가 '이성의 논리적 사용'을 언급한 소이이다. "이성추리에 있어서의 이성의 형식적·논리적인 방법이, 순수이성에 의한 종합적 인식에서의 이성의 선험적 원리가 의존하는 근거에 관해서 이미 충분한 인도를"(같은곳) 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오성개념을 오성의 '판단'에서 이끌어낸 것처럼 말이다.

 자기 판단의 보편적 조건을 추구하는 이성은 상향소급적으로 계속해서 판단(피제약)의 조건(제약), 조건의 조건, 또, 조건의 조건의 조건을 추구해 가면서 결국 궁극적으로 "오성의 제약된 인식에 대해서 무제약인 것을 발견하고, 제약된 인식의 통일을 완성"(B364)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인 준칙이 순수이성의 "원리"(여기서 순수이성의 원리가 무엇인지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음에 주목하라!)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제약된 것이 주어져 있으면, 순차로 종속하게 된 제약들의 전계열-이것은 따라서 무제약인 것이지만-도 주어져 있다고 하는-명백히 종합적인 원칙이다.(여기서 "원리"와 "원칙"이 구분되고 있음을 주목하라!) 순수이성의 원리에서 생기는 이러한 원칙은, 물론 모두 경험의 가능성만을 그 주제로 삼는 오성의 원칙들과는 달리, 전혀 내재적으로 사용된다.(B365)

 

  제 1 편 순수이성의 개념들

 

"오성의 순수개념이 범주라고 불렸듯이, 여기서는 이성의 순수개념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서 이것을 선험적 이념"(B368)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다시금 오성과 이성의 차이, 그리고 그 각각의 개념의 차이가 간략하게 언급된다. 순수이성개념은 반성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리를 통해서 얻는다. 순수이성개념은 모든 현실적 경험이 종속되는 인식을 가능케 한다. 즉, 모든 현실적, 경험적 인식이 그것에 기대서 하나의 전체성을 갖을 수 있는 이념이 되는 것이다.

 제 1절 이념일반

 칸트는 여기서 자신이 사용한 "이념"이라는 용어를 플라톤의 저 유명한 "이념(Idee)"를 설명함으로써 또 그 용어와 비교함으로써 해명하고자 한다. 간단히 몇 가지만을 지적해 보겠다. 이 절에서는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절대주의적 윤리의 씨앗이 보이고 있다. 칸트의 철학이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B371, 372, 375) 그리고 도덕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도덕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의미에 대한 칸트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B374: "모든 지정된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

 이념에 대한 단적인 설명을 여기서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수행할 과제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플라통의 목소리로 자신이 "이념"이란 용어로 무엇을 뜻하고자 하는지를 말한다.(물론 칸트가 모든 면에서 플라톤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B372주 참조) "이념들은 최고의 오성에서는 개별적·불변적·일관적으로 규정되어서 사물의 근원적인 원인을 이루고 있고, 또 우주내 사물들의 결합된 전체만이 이념들에 완전히 적합하다."(B374) 따라서 당연하게도 이념은 "경험적 규칙에 의해서 판정"되어서는 안 된다.(B375)

 초월적 변증론 1편 2절 선험적 이념에 대하여

 선험적 이념이란 우리가 삼단 논볍의 형식을 범주와 마찬가지록 직관의 종합적 통일에 적용한다면 산단논법 형식의 특수한 초월적 개념을 포함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초월적 개념을 우리는 순수이성개념 또는 선험적 이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선험적 이념의 구조 이성은 추리에 있어 개념에 따라 인식에 보편성을 주는 것이다. "카이우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오성에 의한 경험적 명제이다. 그러나 이성은 판단의 술어- 죽는다-가 주어지기 위한 조건을 포함하는 개념-인간-을 찾아서, 전칭(全稱)의 형식 밑에 이 개념을 포섭한 다음-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것에 의해 대상-카이우스-의 인식을 마련하는 것이다.- 카이우스는 죽는다. 우리는 삼단 논볍 안에서 술어를 미리 대전제 안에서 일정한 조건으로 그 전 범위에 걸쳐 고찰한다.

상기한 완전한 외연의 분량을 보편성/총체성 univeralitas 라고 한다. 직관의 총괄에서 이것에 대응하는 것은 전체성 univeristas, 조건의 총체성이다. 따라서 선험적 이념이란 주어진 한 피제약자에 대한 조건의 총체성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무제약자만이 조건의 총체성을 가능케 할 수 있고 역으로 조건의 총체성은 그 자체가 무제약적이다. 따라서 순수이성개념은 무제약자의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조건들의 종합에 있어서의 전체성이라는 순수이성개념은 오성의 통일을 무제약자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간이성의 본성에 뿌리를 둔 것이다.

범주에 있어서 관계의 종류가 존재하듯 순수이성개념의 종류도 존재한다. 즉 하나의 주관에 있어 정언적 종합의 무제약자, 계열에 포함된 제항(諸項)의 가언적 종합의 무제약자, 마지막으로 체계에 있어 모든 부분의 선언적 종합의 무제약자가 그것이다. 첫째 양식은 술어가 될 수 없는 주어로 향하고, 둘째 양식은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전제로 향한다. 셋째 양식은 개념 구분의 완전성을 위해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는 구분된 것들의 집합으로 향하는 것이다.

 절대성 조건의 전체성, 무제약자 외에도 순수이성개념을 표현하는 다른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절대성이다. 절대성은 1) 흔히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고찰되는 경우 내적으로 타당함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거나 2) 어떤 것이 모든 관계에 있어 무제한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칸트]는 절대성을 2)와 같은 의미로 쓸 것이며 절대적 필연성과 내적 필연성은 아주 다른 것임을 주지시키려 한다.

어떤 것의 반대물이 내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모든 면에 있어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내적 필연성은 매우 공허하다.

 선험적 이성 개념의 초월성 선험적 이성개념은 조건의 절대적 전체성을 목표하고, 무제약적인 것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성은 오로지 오성의 사용에만 관계한다. 범주에 의해 이루어진 종합적 통일을 무제약자까지 미치도록 하는 이러한 통일을 이성의 통일 vernunfeinheit라고 하자. 이는 오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통일이다. 따라서 순수이성개념의 객관적 사용은 언제나 내재적- 경험에 한정된다는 의미에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초월적이다. 그것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성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무릇 사변적인 사용이란 개념에 상응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의도하는 바이므로 대상을 갖지 못하는 개념에 접근하는 것은 마치 선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는 것과 같다. 즉 "그것은 한낱 이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오로지 규칙에 따른 실행만이 문제가 되므로 실천이성의 이념은 사실상 구체적으로 주어질 수가 있다. 도리어 이념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결여될 수 없는 조건이다. 그 실행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으나 그 한계는 규정할 수 없으며 절대적 완전성의 개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므로 실천적 이념은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는 이성의 사변적인 사용만을 다룬다.

 상승하는 이성 -변증법? 여기서 우리는 이전에 범주의 연역에서 하였던 것과 동일한 것을 하여야 한다. 즉 이성 인식의 논리적 형식을 고려하고 이것이 이성 자신에 의해 종합적, 선험적으로 규정된 것인지를 봄으로써 이성이 개념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성은 추리의 능력이다. 즉  가능한 판단의 조건을 주어진 판단의 조건에 포섭하는 능력이다. 주어진 판단이란 일반적 규칙, 대전제를 말한다. 가능한 판단의 조건을 주어진 판단의 조건에 포섭함은 소전제이다. 규칙의 주장을 표명하는 실제적인 판단은 결론이다. 즉, 규칙은 어떤 것을 어떤 조건 밑에 보편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건의 계열을 거쳐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조건의 계열은 지표 exponent가 주어져 있는 한 한계가 없이 계속 연쇄되게 된다. 이는 전-삼단논법에 의해 조건의 면에서의 연쇄이거나 후-삼단논법의 의해 피제약자의 면에서의 연쇄이다. 전 삼단논볍의 연쇄는 이성추리의 상승적 계열이다. 이 경우 최후의 피제약자는 '끝'으로 주어져 있으므로, 전제의 연쇄가 이미 완결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가 아니면 이성에 의해 이러한 결론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반면 후 삼단논볍의 경우 최후의 결론은 '끝'이 아니라 단지 생성하고 있는 계열의 마디로서 잠재적인 진행만이 사유되는 것이다. 이성은 결론에 대해 완결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론의 총체성이 가능한지는 이성이 무관심한 문제이다. 이렇듯 이성 추리의 상승의 계열과 하강의 계열은 이성 능력에 대해 그 태도를 달리한다.

 상승하는 계열에 있어서 상승은 무제한이므로 조건의 전체성을 포함하여야 한다. 우리가 결코 이것을 파악할 수 없더라도 그러하다. 결론이 참되다면 그 전계열은 무제약적으로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성의 요구이다. 필연적으로 참인 인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험적 분석판단이요 하나는 무제약적으로 참된 전제에서 파생된 결론이다.

 

 선험적 변증론 1편 3절 선험적 이성의 체계

 우리는 잘못된 가상을 폭로하려는 논리적 변증론이 아닌 선험적 변증론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순수오성의 능력 밖에 있는 추론된 개념의 기원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이성의 임무는 오성이 구속되어 있는 제약된 종합으로부터 오성이 도달할 수 없는 무제약적인 종합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우리의 표상이 가지는 모든 관계는 1) 주관에 대한 관계와 2)객관에 대한 관계이다. 객관은 현상이던가 사유 일반의 대상이던가이다. 따라서 표상의 관계는 1)주관에 대한 관계 2)현상에 있어서 객관의 다양에 대한 관계 3) [것] 일반에 대한 관계로 정리된다. 그런데 모든 순수 개념은 일반적으로 표상의 종합적 통일을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표상의 관계의 분류에 따라, 선험적 이념 역시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유 주관의 절대적 통일을 포함하며, 두 번째 것은 조건의 계열의 절대적 통일을 포함하며, 마지막의 것은 사유 일반의 모든 대상 조건의 절대적 통일을 포함하는 것이다.

 사유하는 주관은 심리학의 대상이며, 모든 현상의 총괄-세계-는 우주론의 댓아이며, 사유되는 일체의 것을 가능케 하는 최고조건을 포함하는 것은 신학의 대상이다. 따라서 순수이성은 선험적 심리학, 선험적 우주론, 선험적 신학에 이념을 준다. 이성은 정언적 이성추리의 기능을 종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사유 주관의 절대적 통일성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언적 이성추리의 논리적 절차는 절대적 무제약자의 이념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선언적 이성추리의 단순한 형식은 일체의 존재자의 본질이라는 최고의 이성개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선험적 이념에 있어서 객관적 연역은 불가하다. 주어질 수 있는 대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선험적 이성은 조건계열의 상승에만 되므로 만약 우리가 결론 계열의 전체성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이념을 구상한다면 그것은 임의로 생각된 것에 불과하다. 조건이 부여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의 총체성이 전제되지만 결과의 총체성은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이 자기 자신의 이성으로부터 세계의 인식을 향해, 나아가 근원적 존재자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이는 이성의 삼단논볍적 진행 자신과 매우 닮아 있다. 실제로 논리적 절차와 선험적 절차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지는 앞으로 상론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에서 이미 우리의 목적은 달성하였다. 즉 오성과 이성을 구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범위를 확정하였으며, 체계를 부여하였고 순수이성만의 특수한 영역을 설정하고 제한할 수 있었다.    

 

 *초월적 변증론

 

        제 2 편 순수이성의 변증적 추리

 선험적 이념을 이성의 근원적 법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도출했으나, (한편으로) 그러하기에 이러한 이념은 이성의 요구에는 합당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그러하기에 오성과는 관계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념들에 대해서는 직관이 주어질 수 없고, 그럴 경우 오성개념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망각하고-이러한 망각은 이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지만-이성은 궤변적인 추리를 감행하는데, 이러한 추리는 이념의 수와 같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선험적 오류추리', 둘째, '이율배반', 셋째, '순수이성의 이상'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첫째의 오류추리인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를 다룬다.

 

          제 1 장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여기서 칸트는 근대형이상학의 비조인 일급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명제에서부터 발원한 "영혼(정신)은 실체다"라고 하는 근대형이상학의 주요한 근본적인 명제를 오류추리로 간주하고서 철저하게 비판한다. 『순수이성비판』의 A판이 좀 더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오류추리를 4가지로 명확히 나누어서 다루고 있고, B판에서도 역시 4가지 오류추리에 대해서 비슷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그러나 좀 더 간략하게 비판을 수행한다. 오류추리는 분명 4가지를 언급하기는 하나 이 모든 오류추리의 근저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식을 살펴보건대, 근원적으로 하나의 오류추리라고 한다고 해서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B404 : "네 개의 오류추리의 근저에 우리가 둘 수 있는 것은 자아라는 단순하고도 그 자신 전연 무내용인 표상임에 틀림없다.") A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바로 "실체성의 오류추리"(A348)인데, 이러한 오류추리는 "사고의 항존적인 논리적(형식적)주어를 속성의 實在적 주어의 인식이라고 사칭"(A350)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사고하는 자아, "규정하는 자기"(B407), 혹은 무언가를 사고할 때마다 틀림없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수반되지 않고서는 사고 불가능한 자기의식(순수통각)을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인)실체로 파악함으로써 발생하는 오류추리이다. 그리고 나머지 오류추리들은 앞의 오류추리를 통해서 도달한 오류적 결론인 실체의 여러 가지 속성들을 역시 오류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칸트가 이 '오류추리론'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데카르트) 근대형이상학자들이 '자기의식'을 (이념인) 실체적 영혼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비판의 준거점이 있어야 하는데, 칸트의 비판의 준거점은 무엇보다도 칸트 자신의 독특한 자아론이다. 그의 자아론에 대한 선행적 이해 없이는 오류추리론에 대한 이해에도 또 결론에도 쉽사리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칸트의 자아론'을 살펴 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칸트에게서 자아는 세 가지로 대별된다. "물자체로서의 자아"와 "현상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가 그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외계대상은 감성적 직관에 주어진 질료를 직관의 형식에 따라 정리하고 다시 그것을 순수오성개념에 의해서 사고된 것이다. 이때 저 질료를 주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어떤 것=X'이다. 유비적으로 말해서 내감의 대상인 자아를 인식할때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을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자체로서의 자아"로부터 질료가 내감에 주어지고 그것을 "초월적 자아"가 종합하고 통일하고 정리함으로써 인식이 성립하는바 그것이 바로 "현상적 자아(경험적 자아)"가 되는 것이다.(B156을 보라. "만일 우리가 외감에 관해서 우리가 외적으로 촉발되는 한에서만 객관을 인식하는 것을 용납한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내감에 관해서 우리는 내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촉발되는 그대로만, 우리 자신을 직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물자체로서의 자아"부터 살펴보자. 이 "물자체로서의 자아"는 "'물자체'로서의 물질현상의 근저에 있는 것(물자체)"(B428)과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A385를 참조하라!) 즉 "물자체로서의 자아"와 소위 우리가 경험적 인식에서 자주 거론한 "물자체"는 같은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물자체' 개념의 신비성과 광범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물자체로서의 자아"를 그저 "초월적 대상"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이 자아는 불가지의 것이며, 인식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의식되지도 않으며, 감각의 제약을 받지 않는(즉 감성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는) 초월적, 세계초월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물자체로서의 자아"가 바로 데카르트가 생각한 "영혼적 실체"이다.

 이와 비교해서 "현상적 자아"를 살펴보자. "현상적 자아"는 우리의 경험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그리고 아는 자아이다. 이 자아는 우리에게 대상적으로 객관화되는 것이다.(그렇기에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자아는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경험계에 속해 있는 한 "현상적 자아"는 세계내적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인과율에 지배를 받는다. 현상적 자아는 끊임없이 변하며, 그 수 또한 대단히 많다.

 "초월적 자아"는 "내가 생각한다"는 명제를 명사화 한 것이다. 이 "초월적 자아"는 "모든 개념일반의 운반구요, 따라서 선험적 개념들의 운반구이기도 하다."(B399) 이 "초월적 자아"는 "모든 사고에 수반하는 나 개념에서 추리되는 것임에 틀림없는"(B400) 자아이다. 따라서 이 자아는 인식의 형식과 그 형식이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요, 세계한계적이다. 이 자아가 바로 사고할 때마다 수반되는 수반의식인데, 다음과 같은 칸트의 진술은 이러한 초월적 자아의 성격을 보여준다. "사고를 통해서 내가 나를 나에게 표상하는 나는 자체적 나도 아니요, 현상적 나도 아니며, 나는 나를 마치 단지 객관 일반인 것처럼 생각하며, 객관을 직관하는 방식을 도외시한다. 이때에 나는 나를 사상의 주관으로 혹은 사고작용의 근거로 표상하거니와[……]단지 생각할 무렵의 "자기의식"에 있어서는 자기는 존재자체이되, 자기의식에 의해서는 이런 존재자체를 사고하기 위한 것(직관)이 주어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B429) 이러한 수반의식은 우리에 의해서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 "초월적 주관은 그것의 객어인 사고에 의해서만 인식되고(칸트가 여기서 거침없이 모순을 범하고 있다. 아마도 '의식되고'로 고치는 것이 합당할 듯 하다),

 이런 사고를 떠나서는 그것에 관해 최소의 이해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월적 주관의 주위를 늘 헛되게 빙빙 돌고 있다."(B404) 그리고 "초월적 자아"는 '경험적인 것'과의 연관성 없이는 그 자체로 실재할 수가 없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즉 '경험적인 것'과의 연관 없이는 한갓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적 관념론'이라는 명칭의 함의를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이 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경험적인 명제다."(B422주 : 여기에 오류추리론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주의깊게 읽을 것을 주문한다. 특히, "Aktus"개념을 중심으로.)라는 말의 의미이다. "초월적 주관"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오류추리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우리는 간략하게 칸트의 자아론을 살펴 보았다. 이 세 자아의 차이를 잘 기억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오류추리에 대한 논의로 뛰어 들어가 보자.

 칸트가 비판하고 있는 학문은 "내가 생각한다"가 유일한 주제인 이성적(합리적)심리학이다.(B401) 그리고 비판의 표적을 명확하고도 크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이성적 심리학의 모든 개념이 발원하는 네 가지 항목(B402)을 제시한다.

 

   1. 마음[영혼]은 실체다. (관계)

   2. 성질상 단순하다.  (성질)

   3. 마음은 그것이 있게 되는 시간이 달라도 숫적으로 동일하다. 즉 단일이요,      (수다성이 아니다.)  (분량)

   4. 공간중의 가능한 대상들과 관계하고 있다.  (양상)

 이것을 바탕으로 영혼실체에 대한 몇 가지 규정이 내려지는데,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불후성, 인격성, 정신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제 이 표를 바탕으로 해서 A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오류추리를 전개한다. 첫째, 실체성(비물질적)의 오류추리. 둘째, 단순성(불후성)의 오류추리. 셋째, 인격성(동일성)의 오류추리. 넷째, (외적관계의)관념성의 오류추리. 이 네가지 오류추리는 칸트 자신이 각각 삼단논법을 구성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삼단논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대전제는 모두 참인데, 소전제는 모두 거짓이 됨으로 인해서 결론 역시 모두 거짓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사용할 경우에만 참이라는 진리치를 가져올 수 있는 개념을 대전제에서는 선험적으로 사용하고, 소전제에서는 같은 개념을 경험적으로 사용하는 "매개념 다의의 오류"에 의해서 그러하다. ("매개념 다의의 오류"에 의해서 이성적 심리학이 오류추리를 하고 있다고 논증하는 점에서는 A판과 B판이 똑같다. : A402-403, B410-411, B411의 각주 191번 참조)

 이제 B판에 새로이 첨가된 표(B419)를 위의 표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1. 나는 생각한다. (양상)

   2. 주어로서 (관계)

     3. 단순한 주어로서 (성질)

       4. 내 사고의 모든 상태에서 동일한 주어로서 (분량)

 이성적 심리학에 있어서 칸트가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것(즉, 칸트의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과 그 오류추리를 논파하는 방식은 A판과 B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표(즉, A판에는 위의 표만 있었다. 따라서 이하 우리는 위의 표를 A표라 하자.)와 아래표(이하, B표)를 비교하면서 칸트가 비판하고 있는 이성적 심리학의 오류와 그에 대해서 자신이 제시하는 참된 이성적 심리학 혹은 자기의식에 대한 참된 규정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표는 각각의 항이 이끌어져 나오는 방식과 관계하는 범주의 순서가 다르다.(이 점에 대해서는 B416, 418, 419를 참조하라!) 칸트가 지적하듯이 A표가 (=즉, 이성적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 곧 오류적인 것)"종합적으로 서로 연관"된 "종합적 명제"들이라면, B표(=칸트가 제시하는 참된 이성적 심리학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양상명제, 존재를 그 안에 분석적으로 함축한 명제를 보여주고 있다. A표에서는 관계-성질-분량-양상의 식으로 진행하였고, B표에서는 양상-관계-성질-분량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명제가 나의 실재를 그 안에 이미 포함하는 명제이기에 우리는 나의 현존을 분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양상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B418) 그리고 B표에서 "나"라는 "주어개념은 단지 형식논리로서 생각되어 있고, 그것이 실체를 의미하느냐의 여부는 결정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분석적 방법으로 칸트는 자기의식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고 있다. 이 설명을 통해서 칸트는 "자기의식"이 지니는 "주어로서, 단순한 주어로서, 동일한 주어로서"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것이 칸트가 생각하는 올바른 의미의 자기의식이다.(A표가 자기의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런데 이러한 (올바른 의미의)자기의식을 이성적 심리학자들이 오해한 나머지, "여러 범주들의 근저에 있는 '의식의 통일'은 이성적 심리학에서는 '객관으로서의 주관'의 직관이라고 해석되고, 이런 직관에 실체 범주가 적용되어 있다."(B421)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리고 이것이 칸트가 오류추리론에서 하고 싶은 말이며, 또 왜곡된 이성적 심리학에 대한 반박이며, 바로 이것이 초월적 주관에 대한 설명이 될 터인데) "의식의 통일이란, 단지 사고 작용의 통일일 뿐이요, 단지 사고작용의 통일에 의해서는 객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통일에는 실체-범주는 적용되지 않는다. 범주는 항상 주어진 직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위 주관은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B422)

 이제 다음으로 또 하나의 문제거리를 언급하고자 한다. 제 4 오류추리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흔히 심신상호작용의 문제가 운위된다는 점이다. A판에서 제4오류추리는 "(외적관계의) 관념성의 오류추리"라고 불린다. 실제로 이 절의 설명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관념론 논박과 그다지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이 부분을 길게 쓴 것은 바로 데카르트가 신체의 현존을 의심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정신과 신체가 명확히 구분되며 전혀 이종의 것이라는 논변을 펼침으로써 심신상호작용의 문제를 거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자기 특유의 이원론, 즉 초월적 관념론을 바탕으로 데카르트류의 관념론이 지니고 있는 오류를 논박함으로써, (즉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우리에게 실재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신체는 의심될 수 없고, 따라서 동시에 심신문제와 같은 것은 한갓 사이비 선험적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하고 제4오류추리를 해소시킨다. 이 제 4오류추리는 B판(B409, B428. 앞에서도 B428을 언급했지만,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에서는 보다 간략하게 표현된다.(B판에서는 4가지 오류추리가 모두다 A판에 비해서 지나치게 간략하게 논의되고 있다. 아마도 A판에서의 설명을 의식하고 그런 것 같다. A판의 논의는 분명 다소 장황하고 일관성에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B판의 오류추리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유효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B판에서 칸트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내 자신의 실재를 나 이외의 딴 사물(나의 신체도 이 딴 사물 중에 들어간다.)에서 구별한다고 하는 판단"(B409)은 분석적 명제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런 자기의식은 그것에 의해서 나에게 표상이 주어지는 외물이 없이 가능한 것이냐, 따라서 내가 인간이 아니고 한갓 생각하는 존재로서 실재할 수 있는 것이냐, 이런 일을 분석적 명제에 의해서 나는 조금도 아는 바 없다."(같은곳) 따라서 저런 분석명제에서 데카르트 같은 이가 성급하게 종합적 명제를 이끌어 낸 것은 명백히 오류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부분과 관련지어서 앞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그친 "내가 생각한다"라고 하는 명제가 '경험적인 명제'라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다. 초월적 주관, 자기의식, 순수통각을 우리는 수반의식이라고 한다. 즉 그것은 그 자신만으로는 활동하지 못하고 무엇엔가 수반되어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수반되는 것일까?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생각함에 대해서 질료를 주는 어떤 경험적인 표상"(B422주)이다. 따라서 이 표상에 의해서 "내가 생각한다는 작용(der Aktus)은 발생한다." 또,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를 '경험적인 명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명제에서의 자아가 경험적인 표상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이런 점에서 앞에서 초월적 주관이 감각의 제약을 받는다고 말한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영혼실체의 개념은 '구성적(konstitutiv)'은 아니더라도, 즉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든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더라도, 중요한 '규제적(regulativ)' 또는 방법론적인 기능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적 심리학의 분야에서 사변적 이성에다 넘어서서는 안되는 한계를 설정하여, 한쪽에서는 마음을 부정하는 유물론에 굴복하는 것을 방지하고, 딴쪽에서는 이승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근거없는 유심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B421) 바로 이렇게 데카르트적 영혼이 '규제적 유용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원리는 "실천적 사용에 필수적"이며 동시에 "도덕법을 의식"하는데 중요하다.(A366, B431)

 

                        * 선험적 변증론

       

              제 2 장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세 가지 종류의 변증적 이성추리로부터 세 가지 종류의 순수이성의 선험적 가상이 도출됨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순수이성의 오류추리"에서 정언적 추리와 상관된 선험적 이념인 "실체"의 문제를 다루었고, 이제 여기서는 가언적 추리와 상관된 '현상들의 종합에 있어서의 절대적 전체성'(B434)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제약된 것'이라는 모든 현상들에 전체성을 부여하는 절대적 전체성, 곧 무제약자를 찾고자 하는 작업, 즉 우주론적 이념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작업은 '세계전체'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는 "인간이성의 새 현상이 나타난다."(B433) 이 새 현상이 곧 우리가 여기서 다룰 '우주론적 이율배반'이다.

 

           제 1 절 우주론적 이념들의 체계

 무제약자를 찾는 작업은 범주표에 의지해서 이루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이성은 아무런 개념도 산출하지 못하는 것이고, 오로지 오성만이 순수개념을 산출한다. 그래서 이성과 관계맺는 개념(즉, 이념)도 역시 오성개념을 경험적인 것과 관계 맺으면서도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 사용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B435-B436참조) 이에 우리는 범주가 필요한데, 12범주가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종합들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게 되는 범주만이 유용하다."(B436)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주어진 현상들을 하나의 계열로 정리하고 체계를 지어주는 무제약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에로 내려가는 線이나 이 결과에 대해 병렬적 제약들의 집합"에 관한 것은 전혀 우리의 관심 밖이다.(B436)

 그런데 이런 종합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배진적(역진적regressive)종합"과 "전진적(progressive)종합"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전제에서 전제로 진행하고, 후자는 귀결에서 귀결로 진행한다."(B438) 우리는 물론 배진적 종합만을 수행한다. 현상의 근거를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 현상의 계열에서 그 결과를 찾는 것이 목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 범주표에서 도출된 이념표

 1. 분량 범주에 관계함 : 시간의 경우 자신의 계열을 형성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제약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현재로부터 배진적으로 소급해 올라가 무제약자를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물론 미래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간과 더불어 "근원적 量"(B438)인 공간은 시간과 달라서 그 자신 계열을 형성하지 않는다."(B439)왜냐하면 "공간은 부분적 공간들의 집합이요, 계열을 이루지는 않기 때문이다."(같은곳)그러나 우리가 "공간의 다양적인 부분들의 종합이 계기적"(같은곳)으로 이루어짐을 인정한다면(물론 이 경우 공간의 부분은 먼저 주어진 전체로서의 공간을 분할해서 얻어낸 것임은 초월적 감성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이다.)공간에 대해서 한계지어진 것(제약된 것)과 한계짓는 것(제약)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도 "시간 중에서" 생기는 "하나의 계열을 포함하고 있다"(같은곳)고 말할 수 있다.

 2. 성질 범주중의 실재성(Realitat)에 관함 : 성질 범주 중에서는 실재성만이 문제시된다. "실재성 즉 물질"(B440)에 있어서 이 물질이 곧 제약된 것이요, 그 내부의 부분, 그 부분의 부분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천착된]제약들"(같은곳)을 이룬다. "따라서 여기서도 제약들의 계열과 무제약자의 진행이 있게 된다."(같은곳)

 3. 관계 범주 중의 원인성에 관함 : 관계 범주 중에서는 원인성만이 문제시된다. '실체-속성 범주'나 '상호성 범주'는 계열을 따지는 우리의 작업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속성은 모두 실체에 내속하는 것으로 서로 동위관계요, 실체는 "자존하는 대상일반의 개념"(B441)이므로 현상들을 문제시하는 여기서는 관심 밖이 된다. 상호성 중에 있는 실체들은 계기없는 집합일 뿐이요 서로 병립한 항들의 수다성일 뿐이므로, "계열의 지표를 가지지 않는다."(B441) 따라서 역시 우리의 관심 밖이다. 그러나 "인과성 범주"에서는 "'제약된 것'으로서의 결과에서 '제약'에로의 원인에로 캐올라 갈 수 있다."(같은곳)

 4. 양상 범주 중의 필연성에 관함 : 양상 범주 중에서는 필연성만이 문제시된다. 현존하는 것 중의 '우연적인 것', 즉 가능적인 것이 제약된 것으로 보아진다면, 그것은 당연히 제약으로서 '필연적인 것'을 지시한다. 이에 우리는 필연성을 문제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범주의 강목과 개수가 같은 네 개의 "다양의 종합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계열을 초래하는 우주론적 이념들"(B442) 네 개를 아래에 제시한다.(B442-B443)

 

 1. 분량-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주어진 전체의 합성의 절대적 완전성[의 이념]

 2. 성질-현상에서 주어진 전체의 분할의 절대적 완전성[의 이념]

 3. 관계-현상[일반]의 발생의 절대적 전체성[의 이념]

 4. 양상-현상에 있어서 가변적인 것의 [우연적]존재의 의존성의 절대적 완전성[의 이념]

 첫째 주의 : 절대적 완전성의 이념은 "현상"들의 해명 이외의 딴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둘째 주의 : 제약들의 종합은 계열로서 배진적 진행을 하되, 이성이 이런 종합에서 구하는 것은, 원래 무제약자 뿐이다.(B443-B444)

 

 * 무제약자의 구분

1. 모든 항이 예외없이 제약되어 있고, 제약들의 전부만이 단적으로 무제약이다. 이 경우 계열에 있어서의 배진은 가능적으로 무한하나, 계열 전체는 주어져 있는 것이다.-ex)"시초가 없다"와 관계(B445-B446)

2. 단지 계열의 한 부분이요, 자신은 어떤 딴 제약에도 종속되지 않는 절대적인 무제약자-ex)"시초가 있다"와 관계

 * "세계"(Welt)와 "자연"(Natur)-(B446-B448) : 흔히 우리는 엄밀한 구분없이 세계와 자연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보통 '세계'라는 말로 이 둘을 모두 의미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세계"는 그저 넓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1. 세계 : 만상의 수학적 전체로서 합성과 분할의 방법으로 도달하는 무제약자이다. 따라서 수학적 이율배반이 관계한다.

2. 자연 : 역학적 전체로 보아지는 경우의 세계. 발생과 원인, 자유, 필연성, 우연성의 문제가 관계한다. 자연이라는 말로 물론 사물의 성질을 의미하는 경우로도 쓰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역학적 전제로서의 자연에 있어서 "현상들의 현존에 있어서의 통일에 주목한다."

 

         제 2 절 순수이성의 배반론

 "배반이란 반대되는 단독적 주장들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타자보다도 낫다고 하는 요구에 찬동함이 없이, 외관상으로 독단적인 두 인식(정립과 반정립)간의 항쟁을 의미한다."(B448) 이제 우리가 수행코자 하는 선험적 배반론의 과제는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그것의 원인 및 결과 등에 관한 연구다."(같은곳) 이성의 사용은 그것이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을 경우 그 正否의 판단을 내릴 시금석을 경험에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성의 "궤변적 주장"은 그 안에 자신과 모순되면서 같은 진리치를 주장할 만한 정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은 이 둘을 서로 맞세우는 것이다. 이 경우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를 확정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서로 싸우는 대상이 단지 환영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그러나 어찌되었건 인간의 소질상 가상을 박멸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것은 바로 선험철학에 특유한 회의적 방법이나, 이율배반의 분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B451-B452)

 이율배반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할 것이 있다. 우리가 문제삼는 변증론은 "단지 이념에 있어서의 이성통일에 상관한다는 점이다."(B450) 다음의 문장은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념의 제약은 그것이 이성통일에 적종하려면 오성에 대해서 과대하고 그것이 오성에 적종하려 하면 이성에 대해서 과소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피하려고 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 선험적 이념의 첫째 모순[이율배반]

@정립 :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며 공간상으로도 한계지어져 있다.

@반정립 :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시간·공간에 있어서 무한하다.

 증명은 두 경우 모두, 주어진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나타난 결론이 모순임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장이 참임을 보이는 간접증명으로 진행된다. 정립 측이 플라톤주의에서 연원하는 합리론(독단론)자들의 주장이라면, 반정립 측은 에피쿠로스주의에서 발원하는 경험론자들의 주장이다.

@정립의 증명 : 세계가 시간상 시초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현재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 경우 현재에서부터 배진적으로 계기적인 종합이 불가능하다.(왜냐하면 한 쪽 끝이 열려 있으므로.) 따라서 세계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시초는 있다.

 공간상 한계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세계는 무한한 전체다. 이런 세계의 성립을 보기 위해서는 역시 무한계열을 따라서, 배진적으로 종합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간상 한계를 가져야 한다. (시간, 공간의 경우에 있어서 모두 증명방법이 같다.)

@정립에 대한 주석 : 칸트는 여기서 정립의 증명을 진행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개념, 곧 이것 없이는 증명이 되지 않는 두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두 개념은 바로 "무한성"과 "전체성"이다. "무한성의 참(선험적) 개념은, 어떤[주어진] 양을 다 측정해 버리더라도 단위의 계속적 종합이 완료될 수 없다는 것이다."(B460) 또, "전체성의 개념은 전체에서 부분의 일정한 양에로 진행할 수 없고, 반대로 전체의 가능성을 부분들의 계속적인 종합에  의해서 증시해야 한다."(같은곳)

@반정립의 증명 :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시초 앞에 공허한 시간이 있게 된다. 그러나 공허한 시간에서는 아무 것도 발생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세계 자신은 시초를 가질 수 없으며, 과거의 시간은 무한하다. 공간이 한계지어졌다고 하자. 그러면 세계는 공허공간안에 있는 것이고, 공허한 공간과의 관계는 전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세계는 연장에 관해서 무한하다. 이 증명은 공허시간과 공허공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정립에 대한 주석 : "무릇 현상은 그것의 외부에 있는 공허한 공간에 의해서 한계지어질 수는 없다."(B459)그러나 공허공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상계와 관련을 맺는 것이요, 감성계와만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또 공허공간에 대한 비판의 회피로 '한계' 대신에 '제한'을 주장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회피하나, 그러한 생각은 오히려 감성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야기할 수도 있다.

 

                   * 선험적 이념의 둘째 모순[이율배반]

@정립 : 세계내의 합성된 실체는 그 어느 것이나 단순한 부분들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한 것이거나 단순한 것에서 합성된 것만이 실재한다.

@반정립 : 세계안의 그 어떤 합성물도 부분들로써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단순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역시 간접증명이 이루어진다.

@정립의 증명 : 합성된 실체가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합성을 사유에서 제거하자. 그러면 단순한 것도 없고, 복합적인 것도 없다. 이 세계에는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합성을 제거할 수 없다. 합성된 실체를 이루는 부분들로 계속 쪼개어보자. 이러한 부분들은 당연히 복합적이지 않다. 그러나 가정에 의해서 이러한 단순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가정이 잘못되었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있다. 이 단순한 존재, 이 실체가 바로 모든 합성에 선행하는 것이다.

@정립에 대한 주석 : 여기서 칸트는 Kompositum(실체적인 성질들의 부분들로 된 전체, 즉 각각 단독으로 존립할 수 있는 부분들로 된 전체)과 Totum의 구분을 하고 있다. 공간과 같은 것이 Totum이고, 그것은 관념적 합성물이다. 칸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실재적 합성물이다. "자체상 자존하는 사물에 대해서만" "합성된 것에서 단순한 것을 추리"하는 것이 "타당하다."(B468)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단순한 것(원자)이 라이프니츠의 단자가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고 또 그것이 순전히 경험적인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정립명제를 "선험적 원자론"이라 칭한다.

@반정립의 증명 : 복합적 대상이 단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자. 단순한 부분들은 각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간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복합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단순한 것이 곧 실체적 합성물"이라는 말이 되고, "이것은 자기모순이다."(B463) 따라서 복합적인 것은 단순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 논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파괴적인 논증으로 나아간다. "단적으로 단순한 것의 실재는 내외의 어느 경험 혹은 지각에 의해서도 표시될 수 없고, 그러므로 단적으로 단순한 것은 한갓 이념이요 그것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 어떠한 가능한 경험 중에서도 표시될 수 없다. 따라서 단적으로 단순한 것은 현상들의 해명에 있어서는 적용될 수 없고, 그 대상을 발견할 수 없다."(B463-B465) 이 명제는 앞에서 단순한 것을 합성물의 직관으로부터 추방한 것에 더해서, 이 단순한 것을 전자연계에서 추방시킨 것이다.(B465)

@반정립에 대한 주석 : 반정립의 증명이 "공간"의 성질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반정립 증명의 논거는 수학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 반정립의 반대자들은 수학적 점을 물리적 점으로 의도적으로 오해함으로써 가장 단순한 것이 마치 실재하는 냥 주장한다. 수학적 점은 무한히 분할되며 공간을 메꾸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오류추리에서 다루었던 단순한 실체인 영혼의 문제를 다시금 언급한다. 그러나 이미 영혼을 단순한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 명백한 오류추리임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자기의식이 자신을 나눌 수 없음은 명백하다 하더라도, 이런 주관이 외부적으로 직관의 대상으로 놓일 때는 역시 합성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B471) 순 오성적으로는 모든 합성물에 대한 단순한 부분들이 생각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현상에 나타나는 실체가 중요한 것이요, 그런 한에서 직관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Ⅲ. 세계의 사상들을 그것의 원인에서 도출할 적에 이런 도출의 전체성에 관한 우주론적 이념의 해결

 이 절에서는 제 3이율배반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수학적 이율배반이 정립과 반정립측이 모두 거짓이라고 설명되어야 하는데 반해서 역학적 이율배반은 양측이 모두 참이라고 설명됨으로써 이율배반이 해소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절의 시작도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도출되는 원인성으로 두 가지가 있다는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발생하는 일에 관해서 두 가지 원인성만이 생각될 수 있다. 자연에 의한 원인성과 자유에 의한 원인성이 그것이다."(B560) 전자는 주지하다시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의 발생법칙과 그것들 사이의 인과법칙을 의미한다.("여기서의 인과 법칙이란 물리-화학적인 필연적 계기 관계뿐만 아니라 심리-생물학적인 필연적 계기 관계까지도 포함한다."--->『철학논설』,211쪽.) 우리가 사는 자연세계[감성계, 현상계]는 이러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이는 칸트가 이미 초월적 분석론에서 입증한 바이다.(그러나 원인에로의 소급에 있어 인과관계중의 제약들의 절대적 전체성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절대자로 나아가는 경향의 이성은 "자유인 원인"을 만든다.) 후자, 즉 "자유에 의한 원인성"에 관해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칸트는 이 절 전체 곳곳에 걸쳐 많은 규정을 내리고 있다.(물론 그 규정내용이 한결 같이 비슷비슷해서, 별 내용이 없다.) 일단 칸트는 "자유라는 말에 의해서 우주론적 의미에 있어서는 한 상태를 자기에서 개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B561)고 말한다. 따라서 이 자유에 의한 원인성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즉, 현상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자유는 "순 초월적 이념"(같은곳)이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빌려온 것을 포함하지 않고, 그것의 대상은 어떠한 경험에서도 규정된 것으로서 주어질 수 없"(같은곳)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의 초월적 이념에 자유의 실천적 개념이 기인해 있"(같은곳)다. 곧 "초월적 자유의 폐기는 동시에 실천적 자유를 폐기"(B562)하는 일이다. "실천적 의미의 자유란, 결의가 감성의 충동에 의하는 강제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같은곳)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실천적 의미의 자유는 "자연적 원인의 강제력과 영향력에 반항하기도 해서, 그 어떤 것을 산출"(같은곳)한다. 이렇게 우리가 현상의 두 가지 원인성을 인정한다면, 당장 다음과 같은 난관에 봉착함은 자명하다. "자유가 과연 가능하냐, 가능하다면 그것은 원인성이라는 자연법칙의 보편성과 조화할 수 있느냐?(B564)하는 문제다. 인과적인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필연적인 현상계에서 "사건의 계열을 전혀 자기에서 개시하는"(B562)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인과법칙의 사슬을 파괴하고 자연계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칸트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주의를 준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철저하게 현상계로만 파악해야지, 마치 초월적 실재론자들이 그러하듯이 혹은 대부분의 상식인들이 그러하듯이 "현상의 절대적 실재"(B564)를 고집함으로써 "현상이 「물자체 그것」"(같은곳)이라고 주장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현상들은 '현상들이 아닌 근거들'을 가"(B565)질 필요가 없게 되어, "그것의 원인성에 관해서는 현상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 "가상적 원인"(같은곳)은 설자리가 없게되므로 동시에 자유의 자리도 사라지는 것이고, 따라서 자연과 자유의 통일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a] 자유에 의한 원인성이 가능함

                  -자연 필연성이라는 보편적 법칙과 조화하는-

 위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겠지만, "자연과 자유를 서로 조화시키"(B565)려는 칸트의 작업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구분-"현상/물자체", "감성적/가상적", "경험적 성격/가상적 성격(예지적 성격intelligiblen Charakter)", "존재/당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물론 칸트의 독특한 "초월적 관념론"에 기인하는 것이요,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간종의 이중적 성격-한편으로 감성적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가상적인 성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중적 성격을 지닌 주체는 당연히 그 행위에 있어서 두 가지 원인성을 가지는데, "경험적 의미의 원인성과 예지적 의미의 원인성"(B566)이 그것이고, 이 "각 기동적 원인은 하나의 성격을 가지"(B567)는 바 "경험적 성격"과 "가상적 성격"이 각각 대응한다.("성격이란 원인의 원인성의 법칙을 의미한다."-B567) 먼저 행위를 일으키는 주관을 "경험적 성격에서 보면"(B568), 이 주관은 철저하게 자연법칙의 예속을 받는 것이요, 그의 행위 역시 그렇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음으로, 행위를 일으키는 주관을 그것의 "가상적 성격에서 보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경우 원인성은 그것이 가상적이므로 감성계에 있지 않고(B568참조), "감성과 현상에 의한 규정과의 모든 영향을 받지 않는"다.(B569) 따라서 이 "가상적 성격은 확실히 직접 알려질 수 없"(B568)고, "경험적 성격에 적합해서 사고되어야만 한다."(같은곳) 그리고 또 무엇보다 주의할 것은 "가상체는 감성계에서 생기도록 하는 결과를 스스로 개시하되, [결과적]행위는 자신 안에서 개시하는 것이 아니다."(B569) 즉 감성계에서 펼져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자유와 자연과는 동일한 행위에 있어서, 행위를 사람이 가상적 원인에 대조시키느냐 혹은 경험적 원인에 대조시키느냐에 따라, 동시에 또 아무런 모순도 없이 어느 것이나 완전한 의미에서 발견"됨을 알 수 있다.(B569)

       [b] 보편적인 자연필연성과 결합된 자유라는 우주론적 이념의 해명

 칸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환기시키면서 이 절의 논의를 시작한다. "발생하는 일체는 원인을 갖는다. 이런 '원인의 원인성' 즉 작용은 시간상 결과에 선행한다.[……]모든 사건은 자연적 질서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B570) 이렇게 만일 "모든 사건의 전 계열에 있어서 자연필연성만이 인정될 때, 그러면서도 동일한 사건이 한쪽에서는 한갓 자연의 결과로 보아지고 딴쪽에서는 자유로부터 생긴 결과라고 보아짐이 과연 가능하냐? 혹은 이 두 종류의 원인 간에는 정면으로 모순이 있는가?"(B571) 칸트의 대답은 "물론 가능하며, 모순은 없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상들이 자유의 원인성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해서, 이 자유의 원인성이 "시간성의, 계열의 절대적인 시초"가 아니며, "원인성에 관한 절대적인 처음의 시초"로서, "한 계열의 절대적인 처음 개시"(B478참조)이지, "단적인 최초의 개시로 될 수 없다."(B582)또 비경험적 가상적인 원인성이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자연적 설명의 행진을 파괴하지 않으며"(B573), "가상적 원인의 현상에 있어서의 작용은 경험적 원인성의 모든 법칙에 적종하고 있다."(같은곳) 이렇게 칸트는 자연과 자유가 모순없이 조화됨을 다시금 설명하고, 또 경험적 성격은 "인간의 활동에서 나타나는"(B574) 것이요, "감성적 제약을 받는 것"(같은곳)이고 따라서 현상계에서의 인간을 알 수 있으며, 또 "순 통각"(즉, 오성능력과 이성능력의 근원적 활동성-각주 240번)에 의해서 가상계에서의 인간을 알 수 있다.

 칸트는 가상계에서의 인간이 자유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임을 "당위"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더 자세히 부연한다. 주어진 대상들을 한갓 이념들에 준해서만 고찰하는 이성은 현상계를 넘어서서 "당위"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의욕에 대해서 기준과 목표를 뿐만 아니라 금지와 권위를 제시한다."(B576) 이성은 완전한 자발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념들에 따라서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상에 관해서 실제로 원인성을 갖는다."(B577)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현상계에서의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의 경험적 성격으로부터 또 그와 동시에 참여하는 딴 원인들로부터 '자연의 질서'에 좇아서 규정되어 있다."(같은곳) 계속해서 칸트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우리의 행위를 이성과 특히 실천이성과 관련해서 본다면 "자연적 질서와는 전혀 다른 규칙과 질서"(B578)를 발견할 거라고 말한다. 즉, 자유의 원인성에 의한 행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다음과 같은 주의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무릇 행위가 그 원인으로서의 사고적 성질[가상적 성격]에 귀속해야 하는 한, 행위는 이런 성질로부터 경험법칙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즉, 행위에 선행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조건'이 아니라 내감의 현상중에 있는 '순수이성의 조건의 결과들' 뿐이다."(B579) 순수이성은 시간계열에 메어있지 않기 때문이요, 또 그러한 한 "가상적 성격으로서의 '이성적 원인성'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B580) 이렇게 시간계열을 벗어나 역학적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성은 "전 의지적 행위의 지속적인 조건이다."(B581)그리고 "이 조건 아래서 인간의 활동이 나타나는 것이다."(같은곳) 이렇게 "가능한 인간의 의지적 행위는 그 어느 것이나 그것이 발생하기 이전에 그의 경험적 성격 중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같은곳) 이런 칸트의 설명은 "경험적 성격"이라는 말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연과 자유가 모순없이 통일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칸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위 인용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칸트는 "경험적 성격은 가상적 성격의 한갓 '감성적 도식'일 뿐"이라고 말한다.(B581) 곧 자발적 원인으로서의 이성은 그 자신 시간계열에서 벗어나 있으나, 그 자신이 원인이 되어 일으킨 현상은 자연법칙의 종속을 받는 것이요, 또 이렇게 현상들의 원인의 원인성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현상계로의 진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도식인 "경험적 성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그런 의미에서 위의 인용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성은 현상을 자연법칙에 따라서 필연적이게 하는 감성적 조건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B584)는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는 "가상적 원인이 자유라는 것, 다시 말하면 감성에서 독립하여 행위를 규정하고 이래서 감성적으로는 무조건적으로 현상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는 있으나, 가상적 성격이 "왜" 이럴 수 있는가는 우리의 인식능력을 초월해 있음이 자명함을 알 수 있다. (물자체계를 인식할 수 없음은 순수이성비판 전체에 걸쳐서 누누히 강조되는 내용이다.) 또 자연필연성과 자유와는 서로 독립적으로 또 서로 방해함이 없이 존립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알았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이율배반은 생기지 않는다.

 

    Ⅳ. 현상의 실재 일반에서 보아진

                 '현상 의존의 전체성'에 관한 우주론적 이념의 해결

 이제 여기서는 "어떤 한 실체 자신의 무제약적인 현존여부"(B587)를 따진다. 즉, 넷째 이율배반이 어떻게 해소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넷째 이율배반의 반정립 측의 주장은 "감성계 현상들의 실재를 제약하는 것으로의 필연적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B588)는 것이었고, 정립측의 주장은 "제약이 제약된 것과 함께 하나의 경험적 계열을 반드시 형성할 필요는 없으며","필연적으로 실재하는 실체 자신에서 우연적 존재를 도출하는 것이다"는 것이다.(같은 곳) 이러한 두 주장은 "서로 다른 의미에 있어서 동시에 참일 수 있다."(같은곳)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이 무제약적인 필연존재는 가상적인 제약으로서 모든 현상의 근저에 있게 되는데 이것이 앞에서 다룬 경험적인 제약이 없는 원인성(자유)와는 다르다. 이에 대한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에 있어서는 사물 자신이 원인으로서 제약들의 계열중에 들어갔고, 그것의 원인성만이 가상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는, 본항에 있어서는 필연적 존재는 (초세계적 실재로서)감성계의 계열의 외부에서 생각되고 또 가상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이렇게 생각함에서만 이 필연존재는 그 자신이 일체 현상의 우연성과 의존성과의 법칙에 종속하지 않을 수 있다."(B589) 이런 무제약자는 이성의 통제적 원리로서,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요, 이런 것을 통해서 오성의 경험적 사용이 함부로 물자체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요, 또 가상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단순히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게끔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모든 자연물과 그것의 [경험적인] 일체 제약을 꿰뚫고 있는 우연성이, 가상적이기는 하되 필연적인 제약을 임의로 전제하는 것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B590) 이 넷째 이율배반도 정립과 반정립이 모두 참일 수 있다는 식으로 해소되고 있는데, 즉 정립은 가상적인 것, 물자체에 관해서 참이고, 반정립은 현상계의 감성적·경험적인 것에 관해서 참이다.

 

                    * 순수이성의 전 이율배반을 끝맺는 말

 이성의 개념, 즉 이념들을 우리는 감성계의 제약과 전체성과 관련 맺을 때는 선험적·우주론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그것을 가능한 경험의 외부에 세울 때 이념들은 초험적이게 된다. 이렇게 "이성은 [한편으로] 경험적 사용의 길을 걷는 것이요, 선험적[초험적] 사용에서는 특수한 길[통제적 이념의 길]을 걷는 것이다."(B591) 이성이 경험적 사용의 길을 걷는다 함은, 곧 이성의 이념을 통제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이념이 초험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관념물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며, "감성계의 개념을 일체의 가능한 경험을 넘어서 확장하기 위한 <이성의 구성적 원리>"(B537)가 된다.(이성의 '구성적 원리'와 '통제적 원리'의 구분은 B536-B543을 참조할 것.) 특히 이 중에서도 넷째 이율배반에서 다루어진 절대 필연적인 무제약자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존재를, 즉 (현상계의)"우연성을 종결시키는 '가상적인 대상'을 찾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B594) 이에 우리의 앞으로의 과제는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다.

 

                           제 3 장 순수이성의 이상

 제 1 절 이상 일반

  이 절에서 칸트는 이념과 이상을 구분한다. 앞에서(B377) 칸트는 "오성의 순수개념에서 생겨서 경험할 수 없는 개념을 이념이라고 하고, 이성의 개념이라고도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영혼, 우주, 절대자(하나님)"이 있다고 말한다. 또 칸트는 "순수이성의 이상"을 "한갓 선험적 개념에 의해서 아는 바 없는 사물에서 출발하여, 모든 존재자의 본질[하나님] 같은 것을 추리"(B398)하는 "변증적 추리"(같은곳)라고 설명한다.

  이념이 "범주보다도 한층 더 객관적 실재성에서 멀어져 있"(B596)음은 주지의 사실이요, 이상은 "이념보다도 더욱 더 객관적 실재성에서 떨어져 있는 것"(같은곳)이다. 이념과 이상의 이러한 구분에 더해서 칸트는 좀 더 확실해 보이는 듯한, 그러나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듯한 구분을 덧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이상은 한갓 구체적인 이념인 것이 아니라, 개체적인 이념 즉 이념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개체요, 혹은 이미 규정된 개체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념을 구체화시켜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의 이념을 개체화한 그 결과가 이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말 돌릴 것 없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순수이성이 자신의 이념을, 특히 절대자의 이념을 개체화한 것이, 곧 그 이념에 꼭 합당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요, 그것을 "이상"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 이념의 실현체이자 구현체가 이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덕과 순수한 인간 지혜"가 "이념"(B597)이라면 이 이념에 합치하는 "현인"은 이상이다. 이 이상은 "현상 중의 모든 모상의 원 근거"(B596)요, "(통제 원리들로서의) 실천력을 가지며, 혹종 행위의 완전 가능성의 근저에 있"(B597)으며, "이성의 필수적인 규준을 주는 것이다."(B598) 즉, 이성은 자신의 이상에 의해서 "선천적 규칙에 따라서 일관된 규정을 하"(B599)고자 하고, 따라서 동시에 "규칙으로 되고 원형으로 되는 것이다."(B598) 이 절의 끝 부분에서 칸트는 "이상"과 "구상력의 (산물로서의) 이상"을 구분한다. 이 후자는 그저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는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 "감성의 이상"(B598)이요, 따라서 이러한 이상은 저마다 다르기에 "설명되고 음미될 수 있는 규칙을 주지 않는"(B599) 것이다.

 

제 2 절 선험적 이상 (선험적 원형)

 개념의 규정은 그 개념에 속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속하는 것만을 귀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모순율의 원리에 따른 것이요, 다분히 형식적인 규정이다. 또 이러한 "개념의 가규정성은 서로 대립하는 두 술어 사이의 중간을 배제하는 배중율의 '보편성'에 종속되어 있다."(B600)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사물을 규정할 때는 이렇게 오로지 형식적인 원리에 따라서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물을 규정한다 함은 그것의 내용[즉, 질료]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모든 것은 전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라는 말을 타당성을 지니고서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두 대립하는 술어들 중 하나가 그것에 속한다는 식의 형식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물 일반의 모든 술어들의 총괄로서의 전체 가능성"(B600)을 담지한 "모든 가능성의 총괄이라는 이념"(B601)이 실체화를 거쳐서 나타난 "선험적 의미에서의 하나님"(B608)인 "순수이성의 이상"(같은곳)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제 이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대체 모든 가능성을 총괄하고 있는 이념에 의해서 각 사물들이 규정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한 사물의 규정은 전체성에 즉 모든 가능한 술어의 총괄에 종속되어 있다."(B600) 라는 말이 무슨 뜻이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한 사물이 전체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가?

 한 사물을 규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물을 인식함을 뜻하는데, 우리가 만일 "한 사물을 완전하게 인식하려면, 모든 가능적인 것을 인식해야"(B601) 한다. 가령, "맥주가 시원하다"라는 규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이미 "시원함"의 원본이 되는 것을 어떻게든 알고 있는 것이요, "시원하지 않다"라고 규정할 때도 역시 "시원함"을 알고 있어야 만이 "시원하다"라는 규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논변일터다. 이렇게 모든 사물에 대해서 어떠한 규정(즉, 긍정적인 규정이건, 부정적인 규정이건)을 내리든 간에 그 규정의 원본이 담지된 것, 즉 "모든 가능성의 총괄"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요, 그것으로 "인해서 그 한 사물을 긍정하건 부정하건 간에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B601) 칸트의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경험적 실재성의 총괄을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전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것도 우리에 대한 대상이 되지 않는다."(B610)고 할 수 있다. 이 인용문에서의 "조건"은 바로 모든 규정의 "근저"에 있는 것이요, 이것[즉, "모든 가능성의 총괄이라는 이념"(B601)]을 우리는 "선험적 기체"(B603)라 하고,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온 사물의 가능적 술어들을 죄다"(같은곳) 얻을 수 있다. 곧, 이 선험적 기체는 "제약으로서 각 사물의 전반적 규정의 근저에 있는 것"(B601)이다. 각 사물의 규정이 이 이념에 기대어서만 이루어지고, 이 이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즉 "모든 술어를 그것의 선험적 내용에 좇아 자기 아래에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 속에 포괄하는 개념"(B605)이기에 이 이념은 "제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이념에 기대서 사물이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칸트는 "각개 사물을 완전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실재성의 전체를 제한하는 데에 기본한다."(B605)라고 말한다.(이 대목에서 칸트는 이러한 방식은 선언적 삼단논법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과 흡사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체계성을 어김없이 과시한다.) 여기서 우리 인간의 이성은 그것의 "실재 여부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 있지 않은 것"(B607)을 이러한 이념을 담지한 선험적 이상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존재자를 "근원적 존재", "최고 존재", "일체 존재 중의 존재"(B606)라고 하면서, "만물의 원형"(같은곳)으로 삼는다. 이렇게 간주된 근원적 존재를 제한함으로써 우리는 파생적 존재들에 대한 규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제한"이라는 표현은 우리 인간의 언어의 한계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B607), 최고 실재성을 제한하거나 분할함으로써 각 개물의 규정성을 얻는다고 해서는 안된다. "최고실재는 총괄로서가 아니라 근거[원리]로서 만물 가능성의 근저에 있고, 또 만물의 다양성은 근원적 존재 자신을 제한하는 데에 기본하지 않고 근원적 존재의 완전한 결과에 기본하겠"(B607)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이제 이 이념을 실체화함으로써 이러한 모든 규정성을 담지하는 존재자로서 "순수이성의 이상" 곧 하나님을 상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사물 일반의 전반적 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이런 규정에 사소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B608)즉, 사물 일반을 전반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상을 상정할 필요가 없고, 다만 "이념만으로 족했다."(같은곳) 그렇다면 인간 이성은 어째서 이러한 일을 저질렀을까? 이것이 바로 칸트의 문제이다. "나의 문제는 「어떻게 이성은 만물의 가능성을 그것의 근저에 있는 유일한 가능성, 즉 최고 실재성의 가능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간주하고, 또 이런 최고 실재성을 특수한 근원존재 중에 포함된 것이라고 전제하기에 이르는가?」라고 하는 것이다."(B609) 물론 칸트가 늘 말하듯이 이러한 일은 사변이성의 "자연스러운 착각에 의한 것이다."(B610) 오성이 현상의 다양을 통각에 의해서 통일하는 것에 비추어, 그와 유비적으로 각각의 경험이 하나의 무제약자에 의해 통일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B611 주 참조.)

 

제 3 절 사변이성이 최고존재의 실재를 추리하는 논거

 사변이성은 어찌해서 최고존재의 실재를 추리하는가? 인간의 모든 경험, 모든 사물의 규정은 "절대필연자라는 부동의 바위 같은 것 위에 있지 않다면"(B612)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경험에서 만나는 것은 모두 '제약된 것'이요, '제약된 것'은 자신을 제약하는 '제약'을 소급지시하고, 이러한 "근거를 캐올라가는 제약들의 계열"(같은곳)은 무한히 성립하는 바, 이러한 계열을 종식시키는 것은 단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에서 만나는 것은 모두 우연적인 것이요, 우연적인 것은 역시 자신을 있게 한 하나의 우연적인 원인을 지시하고, 이러한 소급과정은 절대 필연적인 원인을 만나서야 만이 끝이 나기 때문이다.(B612 참조.)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사물의 규정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모든 가능성의 총괄"이라는 이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최고실재성을 갖는 존재라는 개념은 가능한 사물들의  모든 개념 중에서 절대필연적 존재라는 개념에 가장 적합하겠다."(B614) 그리고 또 이 "필연적 존재에서 무제약적 실재를 인식한다."(B615) "이러한 사태가 바로 인간이성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B614)

 이것이 비록 사변이성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어떤 필연적 존재의 현존"을 강요받지 않고, 자유롭게 비평할 수 있다면(B615참조), "실재성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제한된 존재의 개념은, 그런 까닭에서 절대적 필연에 모순될 것이라고 추리할 수 없다."(B616) 이렇게 해서 우리는 최고존재이자 절대필연적인 무제약자를 인정하지 않아도 좋은가? 거부해버려도 괜찮은가? 이제 이런 존재는 우리의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리는가? 또 우리에게 전혀 무의미한가? 물론 칸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가 "왜?"라고 묻는다면 칸트의 대답은 뻔할 것이다. 그의 전가의 보도인 "실천법칙"을 들먹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부과된 "책무들을 가정하고"(B617), 이 책무들은 "실천법칙에 영향과 추진력을 줄 수 있는 한 최고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도 실재성이 전혀 없는 것"(같은곳)이라고 말한다. 즉 최고존재의 실재는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고 입증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변이성이 최고존재의 실재에 대해서 결단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때, "의무를 택한다는 것이 사변의 무결단을 실천적 입장의 보탬에서 다시 결단하도록 하는 것이 되겠다."(같은곳)

 경험중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우연적인 것은 그 자신의 원인을 지시하고, 이렇게 원인을 소급적으로 물어가다보면 최상의 원인성을 만나게 되고, 이 "최상의 원인성"은 "최고의 원인성"이라는 자리에 놓인다. 이 때 우리는 이 "최고원인"은 단적으로 필연이라고 생각한다.(B618 참조)

 

         *사변적 이성이 하는 "하나님 실재"의 증명방식에 세 종류만이 가능함.

 여기서 칸트는 하나님 실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논증이 모두 한갓 무용함을 입증하고자 한다. 어쨌든 칸트는 이러한 증명 방식에 오로지 세 가지가 있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첫째 자연신학적 증명, 둘째 우주론적 증명, 셋째 존재론적 증명이다. 앞의 두 가지는 "경험적인 길"이요, 마지막 존재론적 증명은 "일체의 경험을 도외시하고 전혀 선천적인 순 개념으로부터 최고원인의 현존을 추리"(B618)하는 "선험적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증명부터 검토할텐데, 그 이유는 존재론적 증명은 인간 이성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순수한 개념과만 상관하는 것이기에,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로 자기를 확대하여 가는 이성이 취하는 순서"(B619)를 따르기 위함이다. 이것은 곧 이러한 증명들이 그릇됨을 보여주는 자신의 논증의 "증명력의 강화"(같은곳)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 칸트의 변이다.

 

 제 4 절 하나님 실재의 존재론적 증명의 불가능성

 "절대적인 필연존재라는 개념은 이성의 순수한 개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험안에서 지시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전혀 갖지 않는 이 순수개념으로부터 이 개념에 상응하는 현실적인 존재자가 있다고 착각을 한다. 즉, 어떤 개념이나 판단이 무제약적으로 필연성을 띤다고 해서 사물이 절대적인 필연성을 띠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B621), "선천적으로 개념을 작성한 뒤에 자기의 억견대로 실재를 이 개념의 외연안에 동시에 포함시킴으로써"(B622) 절대적인 필연존재라는 순수한 개념에 대응하는 사물(대상)이 현실적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 바로 칸트에 의해서 "존재론적 신증명"이라고 불린다. 이 "존재론적 신증명"을 삼단논법의 형식에 따라 구성해 보자.

  <대전제 : 신은 그 개념상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다.

   소전제 :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개념에는 실재가 속한다.

   결 론  : 그러므로 신은 실재한다.>

(이 논증의 구성은 마르틴 하이데거/이기상 옮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59쪽에서 인용. 하이데거는 이 책의 제 1 부 제 1장에서 "칸트의 논제 :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칸트의 "존재" 개념을 다룬다. 물론 하이데거의 주요 목적은 존재론적 신증명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문제에 놓여 있다.)

  위의 논증에서 칸트가 비판하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소전제이다. 즉, 칸트는 "[그 무엇이]있다(Sein)함은 분명히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비판을 전개한다. 즉, 칸트의 비판의 중심에는 이 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있다"라는 것은 어떤 사물을 규정하는 본질, 사물성에 참여하지 않는다. 즉, "있다"라는 개념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개념의 본질은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저 유명한 예인 "100탈러"의 비유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의 백탈러는 가능적인 백탈러보다도 조금도 더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B627)라는 칸트의 말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이 백탈러라는 개념의 실제성을 조금도 늘려주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존재론적 신증명"에 대한 칸트의 논박은 간단하다. 개념으로부터-그것이 최상의 개념으로서 모든 가능한 실제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가능성의 총괄"을 담지하는 개념이라 할지라도-는 그 어떠한 현실적 실재성도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있음"이라는 것이 실제적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칸트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건 동조하기 위해서건 혹은 비판하기 위해서건 "있음은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칸트의 논제에 생각하는 것이 이 절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의 전부이다.

  백탈러의 비유와 더불어 칸트는 또 자신의 논제를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대상과 개념의 내용은 꼭 같아야 한다."(B627) 즉, 우리가 '사과'라는 개념을 머리속에 떠올려 보자. 그러면 그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사과의 여러 가지 본질[사물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분명히 이 사과의 개념 속에 "있음"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사과의 개념 중 어디에도 "있음"은 귀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개념에 합당한 사과를 경험중에서, 즉 현실에서 찾는다. 찾았다! 어떤가 그 사과 어디에 "있음"이라는 본질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머리속에 떠올린 개념에 합당한 대상을 찾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념에 "있음"은 없었으니까. (즉 사과의 본질에 "있음"은 없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의 "있다"란 무엇인가? "'있다'고 함은 사물의 정립일 뿐이요, 혹은 사물의 어떤 규정 자체의 정립일 뿐이다."(B626) 즉,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를 정립했을 따름이다."(B627) "실로 대상의 개념은 경험 전체의 내용과 결합하더라도 조금도 증가하는 일이 없다."(B629) 칸트가 이미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에서 지적했듯이 "양상의 범주들[가능성, 현존성, 필연성]은 그것들이 객어로서 보태지는 개념을 객관의 규정으로서 조금도 확대하지 않고, 이런 개념의 인식능력에 대한 관계만을 포함한다."(B266) 어쨌든 그래도 사과의 개념으로부터 사과는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위의 이야기에서 드러났듯이 "개념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개념의 외부로 나와야 한다."(B629) 즉 우리는 머릿속의 사과라는 개념으로부터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런 일은 감관의 대상에 있어서는 대상이 경험적 법칙에 따라 나의 어느 지각과 연결함에 의해서 가능하다."(같은곳)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어떠한가? 일단 개념에는 "있음"이 규정성으로 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은 "순수사고의 객체"이기 때문에 "그것의 실재를 인식하는 수단이 전혀 없다."(같은곳) 즉,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이런 객관에 관한 인식이(사과와는 달리) 후천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B628) 이런 이유로 칸트는 "지금 당면해 있는 곤란의 원인도 이 점에서 나타난다."(같은곳)고 말한다. 따라서 결국 어찌되었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정립할 수 없다. 즉, 결론적으로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개념의 실제성에 현실성이 귀속되지 않는다는 칸트의 논제는 다음과 같이도 설명된다.

 만일 사물의 개념속에 현실성 개념을 넣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그 사물이 실재한다고 하자. 그것은 한갓 동어반복이지, 사물이 실재한다는 적극적 증명이 되질 못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칸트는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자신의 논제가 절대적 참임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의 논증을 부정할 수 있는가? 즉, 개념에 실재가 귀속된다면 그 개념에 합당한 대상은 당연히 실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부분은 B625-B626에 나오는데 결국 이 부분도 자신의 논제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칸트의 "존재론적 신증명"에 대한 논박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있음은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고 하는 칸트의 논제를 "과연그럴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한 번 바라보자 !!

 

 선험적 변증론 2편 3장 순수이성의 이상

  5절 신 존재의 우주론적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우주론적 증명은, 적어도 그 개념상으로는 존재론적 증명과 같이 최고의 실재성 realitat 으로부터 그 존재자의 필연적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자의 이미 주어진 필연적 존재에서 무제약작인 실재성을 추론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세계의 우연성에 의한 증명이라고 칭하였다.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의 기본 구도는 다음과 같다.

 1) 만일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 역시 실제로 존재하여야 한다. 그런데 적어도 나 자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2) 필연적인 존재자는, 모든 대립되는 술어 쌍에 관해서 모든 긍정을 술어로 갖는 방식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필연적 존재자는 자기의 개념에 의하여 '철저하게'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을 '철저하게' 규정하는 개념은 하나의 사물에 대해 오직 하나 이외에는 없다. 즉,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 entis realissimi"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존재자는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이다. 필연적인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실재한다.

 1)에 관하여: 소전제는 경험적인 것이고 대전제는 경험적인 것을 전건으로 가진 가언명제이다. 따라서 이 증명은 결코 선험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험의 모든 대상을 세계라고 부르므로 이러한 증명을 우주론적 증명이라 하며, 세계 전체가 아닌 특수한 경험들을 기반으로 하는 자연신학적-목적론적- 증명과는 구분된다. 우주론적 증명은 경험을 단지 필연적 존재자로 향한 실마리로서만 이용할 뿐이며, 이 필연적 존재자가 어떤 속성을 가지는지를 가지는 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주론적 증명은 이 순간에서 경험과 작별을 고하며, 최고의 실재적 존재라는 개념으로 변증적으로 나아갈 뿐이다.

 2)에 관하여: 2)는 사실상 존재론적 증명으로 환원할 수 있다. 2)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필연성"에 요구되는 필요조건이 되는 속성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2)는 그 답을-[아마도 범주착오에 의해]-"최고의 실재성"에서 찾는다. 즉 최고의 실재성을 가진 존재자라는 개념에서 현실적 존재의 절대적 필연성이 추론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최고의 실재성"이 "현실성의 필연적임"에 유일하게 적합한 개념이라고 보는 것은 "최고의 실재성"에서 "현실성의 필연적임"이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모두 존재론적 증명에서 수행되었던 바이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명제가 옳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환위(環圍)해 보면 약간의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런데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끼리는 '구별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런데 이 명제는 존재론적 증명의 결론이다. 따라서 우주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으로 환원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우주론적 증명의 난점은 다음과 같다. 1) 인과율을 예지계에까지 확장하나, 인과율은 오직 감성계에서만 타당하다. 2) 인과율은 최초의 시발점에서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부당전제하고 있다. 경험적인 이성사용으로서는 이러한 전제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에 눈을 감는 이성의 그릇된 자기만족이 있으며 4)존재론적 증명과 마찬가지로, 실존을 하나의 속성으로 보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필연적 존재의 실존에 관한

                 모든 선험적 증명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가상의 발견과 설명

 지금까지 진술한,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두 증명은 모두 선험적 증명이었다. 따라서 도대체 이념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을 실재화하고 실체화하는 변증적인, 그러나 자연적인 가상의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인과율에 있어서는 두 원칙이 있음을 우리는 살핀 적이 있다. 한편은 인과 연쇄의 끝에 필연적으로 자존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한 쪽은 경험적인 세계에 있어 필연적으로 자존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역시 계열의 소급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세계에 있어 어떤 필연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세계에 있어 어떤 것도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오성은 발견한다. 따라서 필연성이나 우연성은 사물 자체에 관계되는 원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우리는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두 원칙-인과 연쇄의 두 원칙-은 객관적 원칙이 아니며 통제적인 원리에 머물러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원칙은 충분히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경험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우리는 제 2 원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제 1 원리에 따르자면 필연적으로 자존하는 존재자를 세계의 '밖'에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두 원칙은 양립가능할 뿐 아니라 양립하여야만 한다. 이런 고찰에 따르면, 최고의 존재자라는 이상은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결합을 하나의 충분한 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려는-잡다를 통일하려는- 이성의 통제적 원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적 원리를 구성적인 것으로 표상하고 통일을 실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이 이 절의 해답이 되겠다. [왜 불가피한지를 칸트는 상세히 밝히지 않는다.]

 

 6절 자연신학적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남아있는 단 한가지의 방법은 특수한 경험들로부터 최고 존재자의 현실적 존재자를 추론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증명을 자연신학적 증명이라고 칭하도록 하자. 칸트가 정리하는 바, 자연신학적 증명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정한 의도에 의하여 큰 지혜로써 완성된 하나의 질서의 명확한 지표가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내용을 가지는 글로서는 그 다양성, 그 무한함을 다 형용할 수 없다.

 2) 세계의 이 합목적적인 질서는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다만 외재적으로 이 [것]들에게 부착된 것이다. 즉, 여러 가지 것들의 본성은 만일 그것들이 질서를 주는 이성적 원리에 의해서 근저에 있는 이념을 따라 그것에 합치되도록 선택되고 배치된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이렇게 다양한 결합방법으로 명확한 궁극 목적에 일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3)따라서 단지 '산출'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전능한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에 의한 예지로서 세계의 원인일 수밖에 없는 숭고하고도 현명한 원인이 실재한다.

 4) 이들 원인의 통일성은 교묘한 건축물의 여러 부분처럼 세계의 여러 부분의 상호관계의 통일로부터 추론된다. 우리의 관찰이 미치는 부분은 확실하게 추론되고, 그 이상은 유비의 원칙에 따라서 개연적으로 추론된다.  

  이 추론에 의하면, 자연의 합목적성과 제일성은 단지 형식의 우연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질료의 우연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신학적 증명이 밝힐 수 있는 것은 소재가 목적에 얼마나 적합한지에 따라 제한을 받는 세계'건축사'이지, 세계창조자는 아니다. 또, 자연신학적 추론은 전혀 우연적인 조직으로부터 출발하여 상응하는 원인의 현실적 존재로 추리해 나아간다. 이 원인의 개념은 최고로 실재적인 존재자의 개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고의 실재성이란 실재성의 전체라는 개념 가운데에서만 비로소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경험적 방법으로는 실재성의 절대적 전체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자연신학적 증명은 이 단계에서 당황한 나머지 우주론적 증명으로 도피해 버리고, 이는 다시 존재론적 증명으로 환원 가능하다. 자연신학적 증명은 경험에만 의한답시고 순전히 순수이성에 의해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7절 이성의 사변적 원리에 의거하는 모든 신학에 대한 비판

 모든 신학은 이성에 입각한 신학 theologia rationalis 거나 계시에 의한 신학 theologia revelata여야만 한다. 이성에 의한 신학은 오로지 선험적 개념을 매개로 하는 것과 자연으로부터 나온 개념에 의해 그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 전자를 선험적 신학이라 하며 후자를 자연적 신학이라 한다. 그리고 전자를 옹호하는 자를 이신론(理神論)자 Deist, 후자를 주로 하는 자를 유신론자(有神論者) Theist 라고 한다. 이신론자의 신은 다만 세계원인이며 유신론자의 신은 다만 세계창조자이다. 선험적 신학은 우주론적 신학, 존재론적 신학, 자연적 신학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적 신학에서의 최고존재자는 자연 질서의 최고 담지자이거나 도덕 질서의 최고 보증자이다. 첫째를 자연신학  phisikotheology 라하며 후자를 도덕 신학 Moraltheologie 라고 한다.  

 신학에 있어서 사변적으로만 이성을 사용하려는 시도는 전혀 무익한 것이며 무의미하다. 이성의 자연적 사용으로는 결코 어떠한 신학에도 이르지 못하므로 오직 도덕 법칙으로만 이성을 통한 신학이 가능하다. 선험적인 문제는 순수한 개념에 의거한 해답만을 허용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신학의 문제는 종합적인 것은 물론 경험의 한계를 넘어 인식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오직 선험적 종합판단으로만 해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 종합 판단은 경험의 형식적 조건을 수반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증명한 바이다. [어디서?] 따라서 선험적 종합 판단은 경험의 대상 혹은 현상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신학을 사변적 이성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다. 그러나 도덕 원칙-그것은 실재하는 것인데-로부터 출발하는 이성적 신학은 필요할 뿐 아니라 유용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필연적이고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을 옹호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이 하잘 것 없음을 보여주는 논변은 또한 하느님에 반대하는 모든 주장의 무효를 증명하는 데에도 충분하다. 최고 존재자의 객관적 실재성은 물론 사변적 방법으로는 증명되지 않지만 반박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반면 도덕 신학이 있다면 이성적 신학은 자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틀림없다.

 

선험적 변증론 부록

[A} "순수이성의 이념들"의 통제적 사용

 순수이성의 변증적 시도를 살펴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선험적 분석론에서 증명하였던 것을 다시 확인한 것뿐이었다. 즉 가능한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는 모든 변증적 추리는 기만적이요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선험적 이념은 한갓 가상을 낳을 뿐이면서도 이성으로서는 항거할 수 없는 가상을 낳는다. 그러나 변증적인 것은 이성 자신이 아니요 이성의 사용이 이성에 대응한다고 잘못 생각된 대상 그 자체에 향하게 되느냐 아니면 대상에 대한 오성사용 일반에 향하게 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B671] 오성이 노리는 것은 범주에 좇는 현상의 결합이다. 이성의 할 바는 오성의 종합을 통일하는 뿐이다. 오성의 종합적 결합이 개념에 의하듯이 이성의 오성통일은 개념의 다양을 이념에 의해 결합한다. [B672] 따라서 칸트는 주장한다: "선험적 이성은 결코 구성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즉 그것에 의해 어떤 대상의 개념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불가결적으로 필연인 "통제적" 사용을 갖는다." [B672]

이성이 개념의 다양을 통일한다고 할 때 이성이 구체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인식의 체계성임을 우리는 안다. [B673] 그런데 이 체계성은 하나의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것과는 또 다른..?] 이념, 인식 전체의 형식이라는 이념을 요구한다. 이 이념은 부분적인 인식에 선행하여야만 하고 인식의 부분이 각 부분에 대하는 관계/ 위치 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이념은 자연 속에서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이념에 의하여 자연을 연구하고, 이 이념에 인식이 합치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인식에는 결함이 있다고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B674]

 칸트는 인식 전체의 형식이라는 이념은 두가지 양태(mode)로 발현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듯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인식 전체의 형식이라는 이념에서 이성의 두 가지 사용으로 넘어가는 부분의 연결이 전혀 비약적인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칸트는 이성의 절대 확실한 사용과 이성의 가언적 사용을 구분한다. [B675] 그리고 이 구분이 도입되는 이유는 이성이 보편을 어떻게 구현하는가라는 문제에 관련한 것이다. 이 문제는 전체적인 인식이라는 이념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라는 설명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다. 이성의 절대 확실한 사용이란 보편으로부터 특수를 도출해 내는 사용이며 가언적 사용이란 특수로부터 보편을 도출해 내는 사용이다. 칸트가 결국 논하고자 하는 내용이란 가언적 사용 역시 구성적 사용이 아닌 통제적 사용이라는 점이다. 귀납추리에서 도출되는 보편이란 결코 경험적으로 확증된 보편이 아니지만 이성은 이를 보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675]

 칸트는 계속해서 전체적인 인식, 혹은 인식의 전체성이라는 이념은 선험적인 것이며 논리적-형식적이라는 논지를 강조하고 싶다. [왜 칸트는 이런 것을 강조하는 걸까..?] 예컨대 "실체의 원인성" 이라는 범주로서 인력(人力), 축력(畜力), 풍력(風力) 등등의 갖가지 잡다한 힘들-경험으로부터 곧바로 추상된 힘 범주들-을 환원하는 것을 들면서 칸트는 이 환원이 이성에 의거한 형식적인 통일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객관 자신이 이러한 환원적 질서를 가지게끔 하는 선험적인 원리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러한 형식적 논리적 원리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는 논변을 펴 가며 [B678] 인식의 전체성이라는 이념이 어떻든 선험적이라는 것을 강변한다. 왜 칸트는 전체적인 인식이라는 이념이 이렇게 선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아니하였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왜 칸트는 인식 전체의 형식이라는 새로운 이성의 이념을, 더군다나 변증론의 부록 부분에서, 도입하지 않았으면 안 되었을까...?

 이 이념은 세 가지의 법칙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B681-691] 첫째는 동일성[유사성]의 법칙이고, 둘째는 다양성의 법칙이며 마지막은 연속성의 법칙이다. [여기서는 법칙. 원칙. 원리. 라는 개념들이 서로 혼재되어 있다. 번역의 문제인지 칸트의 거침없는 전개인지 모를 일이다...] 첫째는 개념의 다양을 동질적인 유(類)로 환원하는 법칙이고, 둘째는 동질적인 유(類)안에서 다양을 남김없이 포착하기 위해 이를 갖가지 종(種)과 아종(亞種)으로 분화시키는 법칙이며 마지막은 하나의 유(類)안에서 각 종사이의 내포적 간격은 연속적이어야한다는 법칙이다. 종 사이에 공허가 있다면 다양을 남김없이 포섭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법칙은 "시원은 근거없이 다수로 해서는 안된다. (오컴의 면도날)"라는 격률로 표현되고[B680] 두 번째의 법칙은 "존재하는 것의 다양은 이유없이 감해져서는 안된다"[B684]로 표현된다. 세 가지 모두 선험적 이념에 불과하다. 유(類) 즉 "같음"의 법칙이 전제되지 않으면 개념에 따르는 경험 일반이 불가능하다. [B682] 종(種) 즉 "다름"의 법칙이 없다면, 상위 개념은 늘 하위 개념에 대하여 인식되기에, 논리적 법칙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B685] 그리고 경험의 영역에서 우리는 언제나 종(種) 들간에 불연속성을 발견한다. [B689] 따라서 이 세 법칙은 모두 순수 이성의 선험적 이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법칙들이 한갓 이념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경험적 사용에 관계한다는 점이다. 이 이념들은 선험적 종합명제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이념 일반이 그러하듯 선험적 연역은 불가하다. [B691-692] 칸트는 인식의 전체성 이념이 역학적 이념과 수학적 이념과 분명히 다르다[B692]는 것을 간접적으로 언명한다. 즉 통제적 이념이었던 역학적 이념 역시 경험에 대해서는 구성적인데 이 순수이성의 논리적 원리는 경험적 개념에조차도 구성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경험적 사용에 갖는 이 논리적 원리의 통제적 의미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며 통제적 원리란 어떤 맥락에서의 의미냐는 것이다. [B692]

 이성의 원리가 오성에 어떻게 적용되는가가 문제이니만큼 칸트는 오성이 감성에 관계한 방법을 꺼내든다. 즉 일종의 도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논리적 원리 역시 감성적 도식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 바 그것은 오성 인식의 분할과 결합의 최대한도라는 이념이다. [...?] 칸트는 어째서 이것이 도식이 되고 어떤 식으로 도식이 되는 지는 설명하지 아니한다. 단지 감성적 도식과 이성적 도식의 차이를 설명할 뿐이다. 그것은 감성적 도식은 대상 자신의 인식에 관계하는 반면 이성적 도식은 모든 오성사용의 체계적 원칙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왠 삼천포인가...? 또한 칸트는 이 도식은 "경험의 대상에 관해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 틀림없다" [B694]면서도 단지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성의 관심에 따르는 이성의 준칙이며 "사고 방식"의 차이에 따르는 것이라고 아귀가 맞지 않는 논변을 편다. 도대체 이 이념은 선험적으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념인가 아니면 그의 말 그대로 준칙에 불과할 뿐인가..?  

   [B] 인간이성의 자연스러운 변증성의 궁극 의도

 인간이성의 본성에 의해서 단지 우리에게 '과해진' 것일 뿐인 이성의 이념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 이념이 가상으로-예컨대 영혼실체가 실재한다는 생각, 우주의 시초를 따지는 일, 절대필연적인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생각-뒤바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념 자체에는 위와 같은 어떠한 변증적 가상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념이야말로 우리 경험적 인식에 체계성과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전체성을 보증하여 완결짓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변증적 가상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념의 오용'에서 올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덮어놓고 이념의 정당한 "통치를 비난하고 규탄할 수"(B697)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이념 사용의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이 이념들의 권리를 증명하는 일, 곧 '연역' 작업이다. '연역(Deduktion)'이라는 용어는 이미 앞에서 두 차례-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의 초월적 연역, 분석론에서 범주의 초월적 연역-나왔다. 이 작업은 모두 '연역'의 대상이 되는 개념의 "합법성에 관한 것"(B117)으로서, 즉 합법성이 있음을 보이려는 작업이다. 이 때 '연역'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선천적으로 사용되기로 정해져 있는 (모든 경험에서 전혀 독립인) 약간의 개념"(B117)이다. 따라서 이 연역의 작업은, 즉, "선천적 순수개념의 연역은 로크의 길[경험적 연역]을 통해서는 이룩되지 않"(B119)고, "선험적 연역"(같은곳)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물론 여기서 '연역'을 설명할 때, 분석론에 나온 '연역'을 인용했다고 해서 분석론에서의 '연역'과 여기에서의 '연역'을 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칸트도 이점을 분명히 언급한다 : "물론 그것들[이념들]의 연역은 범주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연역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가정하지만."B698)

 이제 '연역'이 이곳에서 '이념'과 관계할 때의 목표는 이념이 "공허한 관념물"이 아니라 "객관적 타당성"(B698)을 갖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이런 일은 순수이성의 비판적 사업의 완성을 의미한다."(B698)

 그렇다면 순수이성이 자신의 비판적 사업을 "어떻게" 완성하는가? 단지 이념만 몇 개 세워 놓는다고 경험적 인식의 체계적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필요한 것이 바로 '도식'이다. '범주의 도식론'에서 살펴보았듯이 '도식'이 없이는 '범주'는 작동되지 않고, 따라서 당연히 그것의 '객관적 실재성'도 증시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순수이성비판』전체에서 범주의 도식론이 자리하는 위상을 再考하고 또 提高할 필요가 있다.) 이 절에서 칸트가 말하는 '이념의 도식'을 우리는 '범주의 도식'과 같은 것으로,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도식과 이념의 관계에 관한 칸트의 설명은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다. 먼저 칸트는 "도식은 딴 대상들을 이념에 대한 관계를 매개로 해서 체계적으로 통일하는 면에서, 따라서 간접적으로 우리가 표상하기 위한 것이다."(B698)라고 말한다. 이 문장만 보면 우리는 도식과 이념은 다른 것이요, 이념이 수행하는 통일 작용에 있어서 매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최고예지[하나님]의 개념을 한갓 이념이라고 한다."(같은곳) 그리고 나서 곧바로, "최고예지라는 개념은 <사물일반의 개념>의 도식이요, 최대의 이성통일의 조건에 따라 조성된 도식일 뿐이다."(같은곳)라고 말한다.

 이런 겉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말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이성은 통일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성은 이념을 갖는다. 그러나 이념이 직접 통일의 대상[제약]과 관계맺을 수 없다. 왜 이념이니까. 그래서 그 둘을 관계 맺는 도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념 중의 대상"(B698)이요, 이것이 바로 "도식"이다. 그런데 "이념 중의 대상"은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념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이념이 어떻게 둘 이상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념 중의 대상" 즉 도식이 이념과 같은 것으로 보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그 기능면에서 엄연한 차이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도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만나게 되는데, "도식은 [……] 우리 이성의 경험적 사용에 있어서의 최대한 체계적 통일을 얻기 위한 것이다."(같은곳)"이래서 이념은 원래 발견적 개념이요 명시적 개념은 아니다."(B699) 이 발견적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경험일반의 대상들의 '성질과 결합'을 탐구"(같은곳)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인간 이성은 이념의 지도에 따라서, 그리고 이념의 도식의 방향잡음에 맞춰서 움직이는데 이렇게 "이념에 따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성의 필연적 준칙"(같은곳)이요, "사변적 이성의 전 이념의 선험적 연역"(같은곳)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념의 권리를 확보하고, 그것의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이념에 대해서 한 번 더 강조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이념이 "경험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대상에 관해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구성적 원리들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 인식일반의 다양을 체계적으로 통일하는 통제적 원리"(같은곳)라는 것이다.

 우리 이성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이념-영혼, 우주, 신-에 대해서 우리는 각각 다음과 같은 기대를 해볼 수 있다. 영혼에 의해서 "첫째로 우리 심성의 모든 현상·작용·감수성 등을 내적 경험이라는 길잡이에 의해서 연결하려고 한다."(B700) 둘째로 우주에 의해서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서 사유하며 "모든 현상의 외부에 있는 한갓 가상적 근거, 모든 현상의 최초 근거를 부정하려고는 하지 않는다."(같은곳) 셋째로 신에 의해서 일체 현상을 총괄하면서 "일체를 충족시키는 유일의 최상 근거를 현상계의 외부 영역에 갖는 듯이"(같은곳) 본다.

 이 때, 영혼과 하나님을 "객관적이며 실체적이라고 상정해도 방해될 것이 도무지 없다."(B701) 그러나 우주론적 논의에서의 이념을 실체화시킬 경우 우리는 여지없이 "이율배반에 빠진다."(같은곳) 물론 영혼과 하나님의 경우도 "대상 자신 그것으로 상정"(B702)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 중의 대상'으로서 "그런 대상의 실재성은, 온갖 자연인식에 체계적 통일을 주는 통제적 원리의 도식의 실재성으로 타당할 뿐이다."(같은곳)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이념 중의 대상과 같은 이 어떤 것[무제약자]을 "이 어떤 것이 자체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나, 그러나 우리는 이 어떤 것과 현상들 전체와의 관계를 생각한다."(같은곳) 이에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이념은 체계적 통일에 대한 도식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요","이 체계적 통일을 통해서 가능한 경험의 '경험적' 통일을 확장할 뿐이"고, 따라서 "체계적 통일은 구성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통제적 원리로서 타당하다."(같은곳)

 그런데 이런 체계적 통일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오직 절대필연자이자 "모든 가능성의 총괄"인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준다.(물론 칸트는 세 가지 이념을 제시하고, 이 이념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이 있지만 말이다.) 우리 이성은 하나님에 기대서 체계적 통일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체계적 통일의 근거가 무엇이며 혹은 원인으로서 이런 통일이 의거해 있는 존재의 내적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도 없다."(B703) 따라서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신론적"(같은곳)으로만 신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신을 가정할 때, 그것은 "이성의 사변적 관심"(B704)에 의한 것이요, "이성의 통찰"(같은곳)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칸트는 중요한 구분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무엇을 절대적으로 상정하는 권리는 없으나 그 무엇을 상대적으로 상정하는 근거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같은곳)라고 하는 '절대적 상정'과 '상대적 상정'의 구분이다. 즉 우리는 "필연성의 원천에 대한 최상근거를 상정"하되, 그것의 현존을 절대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즉, "한갓 이념의 대상을 비록 그 자신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와 상관해서 상정할 수는 있다."(B705) 경험의 통일 작업을 최대한으로 수행하다 보면 이러한 이념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바, 따라서 이념을 실재화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념의 실재화란 이념에 대응해서 현실적인 대상을 '정립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칸트가 의미하는 것은 "이런 대상을, 내가[칸트가]자체적으로 아는 바 없는 '어떤 것 일반'으로서만 정립"(B706)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계속해서 이런 이상, 즉 하나님에 대해서 그것이 "자체상 무엇이겠는가에 관해서 인식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또 요구할 권한도 없다"(B707)고 하면서 하나님과 같은 "자립적 이성"(B706)의 상정은 "'다양의 체계적 통일'과 이런 통일로 인한 '이성의 최대한 경험적 사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념을 제한하는 일체의 제약을 제거"(B706)하기 위한 것이요, 또  "이성을 최대한 경험적으로 사용할 무렵의 '통제적 원리의 도식'으로 삼기 위"(B707)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칸트가 이념에 대해서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 보자.(이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칸트 자신이 이 부분에서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성개념에 의해 통일되는 것은 "오성인식들, 즉 원리에서의 연관에 의해 통일되기 위한 오성인식들"(B708)이요, 이때 이념은 "경험적 인식에 통일 작용을 미치기 위한 주관적 준칙"(같은곳)으로 쓰이는 것이요, 동시에 이런 "체계적 통일의 원리는 객관적이기도 하나 그러나 규정함이 없는 방식에서 객관적이다(미규정의 원리이다)." 또 이념은 "대상을 직접 규정하기 위한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한갓 통제적인 원칙이다."(같은곳) 그런데 이러한 체계적 통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성은 경험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는 "한 대상을 자기의 이념에 주지 않을 수 없"(B709)다. 그리고 "이 선험적인 사물[이념의 대상]은 '통제적 원리의 도식'일 따름이다."(B710)

 이러한 이념의 대상은 이념이 세 개인만큼 세 가지이다.

첫째, '나 자신'이다. 우리는 "모든 사고작용의 경험적 통일"(B710)을 위해서, "단순한 자립적인 예지"(같은곳)라는 정신적 실체를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설정한 이러한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함은 당연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을 다만 상정할 뿐이다. 이런 상정의 이익은 이미 언급했다. 주관을 이렇게 실체인 양 생각하는 것은, "주관이 가능한 한에서 그것에 관한 여러 설명 근거를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는 것"(B711)과 같은 일이 "주관이 마치 현실적 존재인 듯한 도식에 의해서 가장 잘 수행되고, 심지어는 이런 도식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터"(B712)이기 때문이다. "실로 심리학적 이념은 통제적 개념의 도식 이외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같은곳)

둘째, "순 사변적 이성의 둘째의 통제적 이념은 '세계개념 일반'이다."(같은곳) 이성의 통제적 원리를 필요로 하는 유일의 주어진 객관은 자연인데, 이 때의 자연은 물체적 자연이 아니라, 사고적 자연으로서 "자연 일반과 '자연에 있어서의 제약들의 완결'"(B713)이다. 이러한 제약들의 완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준칙이 있어야 하고, 그 준칙이 바로 "절대적 전체성"이라는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도 역시 구성적이 아니라, 통제적으로 사용되는 한에서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으면서 규칙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순수이성의 셋째 이념은 '일체의 우주론적 계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원인'으로서의 한 존재를 오직 관계적[상대적, 상관적]으로만 가정함을 포함한다."(B713)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이성 개념이다."(같은곳) 여기서도 역시 위에서 강조했던 사항이 반복되는 바,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고립적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고, 다만 "세계에 관계해서만 최고 완전자의 가정은 필연적일 수 있다."(B714) 여기서 칸트는 모든 이념의 목적을 간략하게 설파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의 온갖 결합을 체계적 통일의 원리들에 의해서 고찰하고 따라서 이런 원리들이 '일체를 충족케 하는 최상의 원인'으로서의 일체를 포괄하는 유일한 존재로부터 마치 발생한 듯이 간주하라는 이성의 명령임에 틀림없다."(같은곳)는 것이다. 즉, 이성개념에 의해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최고의 형식적 통일"로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물들의 합목적적인 통일이다."(같은곳) 이러한 "목적론적 법칙에 의해서 세계의 사물들을 결합하고, 그로 인해서 사물들을 최대의 체계적 통일에 도달시키"(B715)고자 하는 것이 이성의 목표요, 이념의 올바른 이용이 기대하는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우리가 이념을, "최고존재의 이념"을 단지 통제적으로 사용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이념을 구성적 원리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첫째 과오는, 태만한 이성이라는 것이다.(B717)"(인생에 있어서 이성을 사용할 여지가 없어지게 하는 과오이므로.) 이성적 심리학에서 이념인 영혼을 실체로 간주함으로써 영혼을 "우리 마음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구성적 원리"로서 간주하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우리 정신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연구를 불필요한 연구로 치부하게 함으로써 이성은 태만함에 빠지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일이 최고존재인 하나님을 마치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실체인 양 여김으로써, 자연의 합목적성에 관한 이성의 과학적인 연구를 게을리하게 된다. 이러한 태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을 명심해야 된다. 즉, "우리는 목적론적 결합의 체계적 통일에 관한 통제적 원리를 가지지만, 목적론적 결합을 우리는 미리 규정해서는 안 되고, 단지 그것을 기대하면서 보편적 법칙에 따라서 자연의 물리적·기계적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B719) 는 것이다.

둘째의 과오는 체계적 통일의 원리를 잘못 해석하는데서 발생하는 "전도된 이성의 과오다."(B720) 이러한 과오도 역시 통제적 원리로 쓰여야 할 이념을 실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발생하는데, "보편적 법칙에 좇아서 자연에 기본해서 증명되어야 할" 최고존재를 자연의 근거에 미리 설정하고, 이런 최고존재의 목적에 의해서 자연 현상의 합목적성이 실현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곧 이것이 바로 "전도"이다. 그렇다고 물론 자연연구가 "창조자라는 이념에 의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B721)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범하는 과오는, 다시 말하자면, "여러 자연물의 본질에서 구하여지는 합목적성"에서 "창조자의 현존"을 인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합목적성을 창조자에서 도출"(B722)하는 "순환논증의 오류"(B721)인 것이다. 여기서 물론 합목적적인 통일로부터 "일체 원인성의 원천인 근원존재의 最高이면서 단적으로 필연인 완전성의 이념을 추리"(B722)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칸트는 "합목적적 통일의 이념은 인간 이성의 본질과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같은곳)으며, 이런 이념에서 그에 대응하는 대상인 "입법적 이성(원형적 이성)을 상정하고", 그로부터 "자연의 모든 체계적인 통일을 도출하는 것은 자못 자연스러운 일이다."(B723)라고 말한다.

 우리는 순수이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문제들은 말 그대로 "사물의 본성에 관해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같은곳), "오로지 이성의 [소질적]본성에 의해서 또 이성의 내적 구조에 관해서만 제기되기 때문이다."(같은곳) 따라서 우리가 이성에 의해서 생기는 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깥을 보지 말고, 오로지 "안을 보라". 자연적으로 경험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이성의 자신의 본성에 맞춰서, 이념의 속성에 적합하게 사유한다면 이성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합목성이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구별되고 그래서 세계와는 별개의 존재인 하나님과 같은 최고예지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실체인지 최대의 실제성을 갖는지 필연적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이런 물음은 우리가 경험적 현상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사용하는 범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실체-범주, 실제성-범주, 필연성-범주) 즉, 우리는 최고예지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 자체상으로는 전연 이해를 갖지 못하며(B726참조), 오직 "우리 이성의 제약에 준해서 체계적 통일의 근거를 포함할 수 있는 특질들을 그런 존재[하나님]에게 주었던 것이다."(B726)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던 "전도의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간과"(B728)해서는 안 되고, "최고 예지라는 이념을 통제적 원리의 도식"(B727)으로서 "최대의 체계적·합목적적 통일"(같은곳)의 근저에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명확히 해둬야 할 것은 "근저에 놓여지는 최고창조자라는 이념을 이처럼 표상함에 의해서 내가 근저에 두는 것이, 그런 존재가 현존하고 그런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존재의 '이념'인 것은 명백하다."(B729) 따라서 우리가 확실히 다짐해야 하는 것은 이런 "존재"로부터는 아무것도 도출될 수가 없고, "오직 그런 존재의 '이념'에서, 다시 말하면 이런 이념에 따른 세계 사물들의 본성에서 그런 존재가 도출되는 것도 명백하다."(같은곳)는 것이다.

 순수이성의 이념은 우리에게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식의 확대를 가져다주는 구성적 원리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통제적 원리로서 기능할 때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제적 원리에 의해서 경험계의 모든 지식이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의 모든 인식은 직관으로써 출발하고, 거기서 개념으로 나아가며, 이념으로써 끝맺는 것이다."(B730)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다시금 강조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이성의 사변적[이론적] 사용은 이 세 요소로써 가능한 경험 분야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같은곳) 비록 이 세 요소가 선천적인 인식원천을 갖는다 할지라도. 하지만 우리가 선험적[변증적] 가상을 갖게 되는 것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인간 이성의 소질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요, 이러한 가상에 빠지지 않고, 또 빠지더라도 그것이 가상인 것을 간파하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상의 참 원인의 배후로 들어가"(B731)서 "모든 초험적 인식을 그것의 요소로 분해"(같은곳)하여, "최초의 원천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탐구"(같은곳)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성이 빠질 수 있는 변증적 가상을 제시하고, 그 가상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그리고 그러한 탐구를 치밀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이 "선험적 변증론"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선험적 방법론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선험적 원리론에서 우리 이성이 가지고 있는 재산목록을 충분히 점검했다. 즉 우리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알고 있다.(혹은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물론 우리의 오성을 한계 지은 것이지 흄처럼 제한한 것이 아니다.:B795참조) 따라서 우리는 감히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얻어낸 "건축재료"(B735)[재산목록]를 가지고 그것으로 지을 수 있는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서 훌륭한 설계를 구상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렇게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B736)에 관한 논의가 "선험적 방법론"에서 이루어진다.

 

                         제 1 장 순수이성의 훈련

 부정적 판단은 우리 인식의 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의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 이성이 범하기 쉬운 가상적 오류와 그로 인해 이성이 입게 되는 막대한 피해를 생각해 볼 때, 오류의 발생을 막아주는 부정적 판단은 그 가치가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오류를 막는데 쓰이는 소극적인 것이 우리의 인식을 증대하는 허다한 적극적인 교시보다도 더 중요한 지시를 하는 것이다."(B737) 이 "소극적인 것"이 바로 훈련인 바, "훈련"은 "혹종의 규칙들에 위반하려는 부단의 성벽을 제한하고 드디어 아주 없애 버리는 강제"(같은곳)이다.

 흔히 이성은 훈련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이성이 경험적으로 사용될 때[경험적 직관이 주어짐]이거나, 수학적으로 사용될 때[순수직관이 주어짐]처럼, 그 인식의 진위가 판별될 수 있는 명확한 시금석을 가지고 있을 때의 경우이고, 이성이 "한갓 개념에 의해서"(B739)선험적으로 사용될 때는 미망과 방자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은 필수적이다. "개개의 미망은 검열을 통해서, 오류의 원인은 '비판'을 통해서 제거될 수가 있다."(B739) 이에 "순수이성의 훈련"에서는 "순수이성에 의한 인식의 내용"(B740)을 주된 관심사로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의 방법"(같은곳)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즉, "[선험적 사용의] 경우에는 이성에 부적합한 방법에, 부당하게 따르는 데서 반드시 생기는"(같은곳) 오류를 막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제 1 절 독단적 사용을 할 무렵의 순수이성의 훈련

 이 절에서 칸트는 시종일관 수학과 철학을 비교한다. 그 이유는 물론 칸트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이, 수학에서 얻을 수 있는 인식의 절대확실성과 보편타당성을 가능케 해주는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함으로써 철학에서도 역시 인식의 그러한 절대확실성과 보편타당성을 획득하려는 작업들이 많았기에,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칸트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방법이 잘못되었고, 단지 독단적이었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수학과 철학이 엄밀히 다르다는 것을 여러 가지 면에서 증시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적 인식과 철학적 인식의 "본질적인 차이는 형식중에 있고, 각자의 질료 혹은 대상의 차이에 기인하지 않는다."(B742) 흔히 수학은 양을, 철학은 질을 대상으로 한다는 통념으로 수학과 철학을 구분하려 하지만, 사실 수학도 철학도 모두 양과 질을 그 대상으로 한다.(B743참조) 수학과 철학을 나누는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인식의 방법에 있다. "철학적 인식은 개념에 의한 이성의 인식이요, 수학적 인식은 개념의 구성에 의한 이성의 인식이다."(B741)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순수)직관이 주어진다는 말이요, 수학이 선천적 인식인 한, "구상에 의해서 순수직관 중에서 구성하거나"(같은곳),"전혀 선천적으로 그려"(같은곳)낸다는 의미이다. 종이위에 그려진 삼각형[개별](그려진 이상 그것은 불완전하고 진정한 삼각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삼각형과 삼각형 일반[보편]을 고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기학학의 분야에서만 직관 중에서 구성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수학의 분야에서도 "일체의 조작을 어떤 보편적 규칙에 의해 직관 중에 표시"(B745)하고, "기호를 구성함에 의해서"(같은곳)대상 자신을 명시한다. 이에 우리는 "철학적 인식은 특수를 보편에서만 고찰하고, 수학적인 인식은 보편을 특수에서 아니, 개별에서도 고찰한다."(B742)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수학적 인식과 철학적 인식이 구분되는 것은 우리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 "종합적 명제였고 그러면서도 선천적으로 인식될 종합적 명제였"(B746)기 때문이다. 수학은 순수직관 중에서의 구성에 의해서 개념 밖으로의 외출이 충분히 가능하고 따라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지한 종합적 명제의 획득이 가능하지만, "개념에 따른 추리적 이성사용"(B747)을 하는 철학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철학도 종합명제를 가질 수 있는 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앞[순수오성의 종합적 원칙 전체의 체계적인 표시]에서 살펴본 대로, "개념에 의하는 선험적 종합"(경험을 가능케 해준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즉 초월적! 이하 이런 경우에는 '선험적'을 '초월적'이라고 쓰겠음. 마찬가지로 '선천적'이라고 쓰는 용어도 이하 '선험적'으로 따라서 '후천적'도 '후험적'으로 쓴다.)이고, "철학자만이 이런 종합에 성공한다."

(B747) 주지하다시피 이런 철학적 인식이 바로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런 초월적 종합은[개별의 현상에 직접 상관하지 않고] 사물일반에만 관계하고, 이런 초월적 종합의 조건 아래서 사물의 지각이 '가능한 경험'에 속할 수 있는 바이다."(같은곳)

 이제 우리는 수학적 인식과 철학적 인식을 더욱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철학적 인식에 기대서 경험적 인식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이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루어진 작업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정리를 해볼 수 있겠다. 즉, 철학적 인식인 "초월적 명제는 선천적(선험적)직관에 표상될 수 없는 것(지각)의 어떤 종합적 통일을 경험적으로 구하기 위한 규칙만을 포함한다."(B749)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초월적 명제는 그 명제가 갖고 있는 한 개념이라도 어느 경우에건 선험적으로 표시할 수 없고, 후험적으로만 표시할 수 있다."(같은곳) 즉, 이런 '초월적 명제' 및 이런 명제를 이루는 '초월적 개념'(ex. 실제성, 실체, 힘)은 각각 "가능한 '경험적 직관'들의 종합 원칙"(B750)이요, "경험적 직관(이것은 따라서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을 수는 없다)들의 종합을 표시하는 것"(같은곳)이다. 이에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초월적 명제는, 한갓 개념에 준한 이성의 종합적 인식이요, 따라서 추리적이다."(같은곳) 따라서 철학에서만 가능한 인식이다. 이런 철학적 인식과 수학적 인식 및 경험적 인식을 다시금 비교해보면, 수학적 인식은"순수직관에로 진행하여 선험적 인식을 하는 것, 즉 개념의 구성을 통한 이성인식"(B749)이요, 경험적(기계적) 인식은 "경험적 직관에로 진행하여 후험적 인식을 하는 것"(같은곳)이요, 이런 인식은 "결코 '필연적이요 절대확실한 명제를 줄 수가 없다."(같은곳)

 다시 정리를 하자면 이성의 사용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개념에 준한 이성사용"(B751)으로서 "철학적 인식"(B752)이요, 이런 인식은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에서 "일체의 현존하는 것(공간·시간중의 사물)에 관"(같은곳)계 맺고 있다고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개념의 구성을 통한 이성활동이요 수학적 인식"이다. 여기서는 순수직관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인식의 획득에 있어서)경험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 방법을 통해서 수학적 인식은 "선험적으로 줄 수 있는 개념을 [순수선험적]직관에로 가져오고"(B753), 절대확실성과 필연성, 보편타당성을 보장받으면서 "자연의 지배자"(같은곳)가 되는데 반해서 "순수철학은 선험적으로 추리된 개념으로써 자연에 손을 내밀기는 하나, 이런 개념의 실재성을 선험적으로 직관화함에 의해서 그것을 확증할 수 없다."(같은곳) 철학의 이런 특성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적 방법의 장점에 매료되어 철학과 수학의 엄연한 차이를 망각하고, 수학적 방법을 철학에 절취함으로써 곤란을 겪게 되며, 동시에 수학자 역시 자신의 방법에 자신감이 넘쳐 자신의 영역(자연)을 넘어섬으로써 기존의 지위마저 박탈당하는 위험에 처한다. 이에 "우리는 순수이성의 초월적 사용의 한계를 정밀하고 확실하게 규정하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B754) 그러나 우리 이성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예지계로 들어가려고 하며, 여기서 철학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과 수학의 차이와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수학의 철저성이 의거하는 따라서 철학자들이 늘 탐내는"정의·공리·증명"(같은곳)을 살펴보겠다.

 첫째, "정의한다는 것은 이 말 자신이 표시하듯이, 원래 한 사물의 면밀한 개념을 그것의 한계 내에서 근원적으로 명시한다는 뜻이다."(B755) 여기서 칸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을 열거하면서 오로지 수학의 개념만이 정의에 적합하다는 것을 말한다.  '경험적 개념'은 정의되지 않고, 해석될 뿐이다. 경험적 개념은 사람들마다 그 대상의 개념에 다른 내용을 부여할 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그 개념은 일정한 한계 내에 있지 않다."(B756) 따라서 정의되지 않는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개념(철학적 개념)'도 정의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은 대상과의 합치에 의해서 명료하게 표상되는데, 대상이 끼어들게 되면 역시 불명료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정의'는 '해명'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  '임의로 생각된 개념'은 내가 고의로 만든 것이기에, 이 "개념이 대상을 가지는가조차도 모르고", 따라서 이런 개념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단지 "(내 계획의) 표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B757)다. "즉 철학상의 정의는 단지 주어진 개념의 '해명'이되, 수학상의 정의는 근원적으로 우리가 만든 개념의 '구성'이다."(B758) 이래서 "철학에서는 수학을 모방해서 정의에서 출발해서는 안되고"(같은곳), 정의를 "일을 끝맺어야 하는 것"(B759)으로 써야 한다. 또 당연하게도 "수학적 정의는 오류가 있을 수 없"(같은곳)으나, 철학적 정의는 그 "개념 중에 사실로 없는 표징을 받아들임에 의해서 혹은 정의의 본질이 되는 면밀성을 경함에 의해서 오류에 빠질 수 있다."(B760) "이 때문에 정의에 관한 수학적 방법을 철학이 모방할 수가 없다."(같은곳)

 둘째, "직접적으로 확실한 한의 선험적인 종합 원칙이 공리다."(B760) 수학은 개념의 구성에 의해서 이러한 공리를 가질 수 있으나, 단지 개념에 의한 이성인식인 철학은 이러한 공리를 갖지 못한다. "한 개념은 딴 개념과 '종합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결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술한 "직관의 공리"와 같은 것은 공리가 아니라 공리 및 경험 일반을 가능케 하는 원칙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직관적 원칙(수학)은 연역(합법성과 권리의 증명)을 결해도 좋고, 자명함에 반해서, 철학적 원칙은 "공리와는 전혀 다르"게(B761) 연역을 필요로 하며, 자명하다고 할 수가 없다.

 셋째, "절대필연의 증명이 직관적인 한에서 그것은 명시적 증명이라 할 수 있다."(B761) 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철학적 인식은 분명 개념의 구성에 의해서 직관이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개념에 의한 이성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수학과 철학의 결합은 성공할 수 없는 헛된 월권이요, 오히려 철학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것"(B763)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칸트는 철학의 의도를 명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철학의 의도는 자기 본래의 한계를 오인하는 이성의 환영을 폭로하고, 우리의 개념들을 십분 해명하여 사변의 헛되 자부로 하여금 겸허하고도 근본적인 자기 인식에로 돌려보내면서",(같은곳)"이성의 모든 진행을 이성 자신의 가장 명백한 조명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B765)

 이 절의 마지막에서 칸트는 철학적 명제와 수학적 명제를 다시 한 번 구분한다. 전자는 "정설"로 개념에 의한 직접적인 종합적 명제요, 후자는 "정리"로서 "개념의 구성에 의한 직접적인 종합적 명제"(B764)이다. 또한 여기서 원칙과 정설을 구분한다. 원칙은 "개념이 우연한 것에 의해서 즉 가능한 경험에 대하는 관계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세워"(B765)진 것으로, "참으로 절대필연적으로 확실하나", "그 자체상으로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고, "경험에서 아주 충분히 또 절대필연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B765) 그렇지만 정설은 아니다. 또 정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설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 칸트 자신이 말하기를, "전 순수이성은 그것이 단지 사변적으로 사용될 무렵에는 개념에 의한 직접 종합판단을 하나라도 포함하지 않"(B764)기 때문이다.

 

                    제 2 절 논쟁적 사용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이성은 무엇이든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즉, 이성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비판을 배척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초월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독단적인 자기 주장을 하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성은 그런 주장을 하는 자기 자신이 내세우는 반대의 주장들에 부딪쳐 곤경에 빠지고 논쟁을 하게 된다. 즉, 이성은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된다."(B768) 하지만 이것은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요, 두 주장간의 관계가 '모순'이 아니라 '이율배반'인 이상, 이 양편의 주장들은 "넉넉히 공존"(같은곳)한다. 그러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과 관련된 주장이 아닌 이성의 독단적 주장들, 예컨대 "신은 있다-없다"와 "우리 영혼은 단순한 실체이다-아니다"와 같은 것은 서로 간에 모순이요, 따라서 이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어느 쪽 주장이건 간에 "일체의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사물에 관해서 종합적인 판단"(B770)을 하는 이런 주장들은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학술적인 증명을 고안할 필요가 없다."(같은곳) 이에 이어서 칸트는 이런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충분히 간주할만한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쪽에서] 우리 이성이 경험적으로 쓰일 무렵의 사변적 관심과 잘 조화하고, 그외에 [딴쪽에서] 사변적 관심을 실천적 관심과 결합하는 유일한 수단인 명제들을 승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같은곳) 이에 "순수이성의 자기 모순이란 원래는 없는 것"(B771)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의 많은 논적들이 오로지 자기의 이성에 의해서 펴는 논변은 오히려 우리 이성에 자극을 주어 우리를 더욱 계발시킬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가공할 공세를 편다 할지라도 "가장 엄격한 이성이 봐서도 시인할 만한 확고한 [도덕적] 믿음을 주장할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B772)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분명 보통 사람들이 회의론자들의 논의는 "공공 복지의 근저[도덕적 신앙]를 흔들리게 하는 일에 종사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맞서서 독단론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이들이 정당한 것을 제시하려고 하나 그것 역시 "부정으로써 변호"(B778)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변증론에 있어서 양측 중 어느 누구에게도 "승리란 없는 법이다." 인간성안에 있는 "일종의 불순한 것"(B775)에서 발원하는 "불순·허식·위선이 사변적 사고방식의 표현에 있어서도"(B776) 여지없이 나타나 "양측이 다 그림자와 격투하는 엉터리 격검가"(B784)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의 분야에서는 진정한 논쟁은 없"(같은곳)기 때문에 역시 이기고 지는 것도 없다는 얘기일 터이다. 이런 쓸모없고 소모적인 논쟁이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즉 일찍부터 공적인 논의에 붙이기 위해서 "이성은 [변증적인] 논쟁을 매우 필요로 하"(B775)는 것이다. "도대체 실재성이 양측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현실적 경험에서, 아니 가능한 경험에서도 제시될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두 사람[양측]이 어떻게 논쟁을 할 수 있는가?"(B778)라는 칸트의 말은 순수이성의 전쟁터에서 벌어지고 논쟁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결정적으로 어떻게 종식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순수이성의 모든 분쟁에 대한 참 법정이라고 볼 수 있"(B779)는 "순수이성비판"에 의해서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은 자연상태에서의 해결인 승리-패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법정상태의 해결로써 "항구평화를 주지 않을 수 없다."(B780) 즉, "순수이성비판"은 문제가 되는 분야-"인간 의지의 자유, 저승 생활의 희망, 하나님의 존재"(B781)에서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순수이성은 이 분야에 있어서 긍정적 주장을 하기에 힘이 부족하지마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부정적 주장을 할 수 있는 힘도 없다. 아니 이런 힘은 한층 더 없다."(같은곳)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피교육자들에게 한 쪽의 독단적 주장을(어쩌면 그것이 상식인에게 긍정적으로 여겨진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주입 시키는것 보다는 처음부터 "순수이성의 비판에 의한 근본적 수업"(B783)을 전개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이렇게 되면 물론 과거에 맛보았던 독단적 주장이 결과하는 겉보기에는 자못 견고한 드높은 아파트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런지는 몰라도 "오히려 그는 실천적 분야에 대한 전망을 눈 앞에 갖고 있으며, 자기의 이성적이면서도 건전한 체계를 세우기 위한, 보다 더 확고한 지반을 실천적 분야에서 당연히 기대할 수 있기"(B784)에 오히려 "순수이성비판" 이전보다 더욱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강조할 것은 "비판"과 "회의"는 다르며, 회의가 비록 독단적 주장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나,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순수이성을 회의론에 의해서 만족시킬 수 없음[휴움에 대한 비판]

 칸트는 여기서 전 형이상학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누면서 자신의 비판철학을 마지막 단계로 제시한다.(이 점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은, 한자경,『칸트와 초월철학』,28-29쪽 참조.) 첫째 단계는 순수이성의 유년기요, 이 때에는 독단적인 주장만을 일삼고, 둘째 단계는 "회의적이요, 경험에 의해서 현명하게 된 판단력의 신중성을 증시한다."(B789)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형이상학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성 자신을 그것의 전 능력과 선험적 순수인식에 대한 적격여부에 관해서 평가"(같은곳)하는 "순수이성의 준칙"을 확보한 비판철학의 단계다.

 이 절에서 칸트는 회의론의 대표자인 흄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흄은 인간 인식 기능의 전분야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지 않았으며, 이런 점에서 그가 비판한 독단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연성에 따라서 선험적인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우리가 선험적 원리라 부르는 것을 "한갓 경험적인 규칙 즉 그 자신 우연적인 규칙"(B793)으로 폄하하였다. 그가 이러한 선험적 원리를 부인한 것은 "오성의 근거있는 요구와 이성의 변증적 월권"(B796)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무분별하게 "이성의 검열"을 행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검열은 이성의 변증적·초험적 월권을 방지하는데는 타당하겠으나, "오성을 제한"(B795)하기만 함으로써 진정한 오성 사용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것이다.

 "인간이성의 지리학자"(B788)인 흄은 인간 인식의 지평선, 즉 한계 너머로 순수이성의 전문제들을 단순히 추방함으로써만 해결하려 했을 뿐이고, 그 한계선을 명확하게 규정해 주지 못했기에 따라서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회의론은 "영주할 만한 거처는 아니"(B789)지만, "지금까지의 그 독단적인 편력을 성찰하고"(같은곳), 앞으로의 행로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인간이성의 휴식처"(같은곳)요, "이성의 신중성을 환기하고 이성에서 합법적인 소유를 확보시킬 수 있는 근본책을 지시하기 위하여 예습적인 성질의 것이 된다."(B797)

 그렇다면 인간 이성의 영주할 만한 거처는 바로 대상인식의 확실성이나 우리 인식의 한계의 확실성을 가져다주는(B790참조) 철학일터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전 재산을 완전히 평가하여, 이것에서 적으나마 확실한 소유를 확신"(B796)케 함으로써, "모든 논쟁을 해소"(같은곳)시키는 칸트 자신의 비판철학일 것이다.

 

                    제 3 절 [통제적] 가설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순수이성비판 작업의 결과로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와 범위, 기능 등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경험계를 떠나서는 참된 인식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성을 순수히 또 사변적으로 사용해서는 참으로 아무 것도 인식할 수가 없"(B798)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 작업이 비록 적극적인 한계규정 작업이었지, 부정적으로 가상계[예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즉 우리는 가상계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지만, 같은 이유로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비판'의 작업은 "가설에 대해서 더욱 더 넓은 분야를 개방하는 것이 아닐까?"(같은곳) 여기서 가설은 억측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가설은 현실로 주어져 있는 확실한 것을 설명근거로 지니고 있는 억측이다.(같은곳 참조) 즉, 이성의 엄중한 감시 아래에 있는 "대상 자신이 가능할 수 있"(같은곳)는 상상이다. 그런데 이런 대상은 우리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에 대해서 가능한 경험의 조건을, 사물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쓸 수 있을 따름이다."(B799) 칸트의 이 유명한 문장은 바로 그의 초월철학이 단순히 인식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론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성의 개념은 한갓 이념이요, 그것의 대상은 확실히 경험 중에는 없"(같은곳)으며, 그렇다고 그것이 "공상이면서도 동시에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대상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같은곳) 즉, 주지하다시피 이념은 경험의 통제적 사용을 위해서 고안된 "한갓 개연적인 개념"(같은곳)이요, "경험을 떠나서는 그것은 관념물"(같은곳)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를 들어서, 영혼과 같은 이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그저 "마음[영혼]을 단순하다고 <생각함>은 충분하게 허용된다."(B799) 이런 허용이, 즉 이런 가설의 상정이 "전체의 완전하고도 필연적인 통일"을 용이하게 때문이다. 이것이 곧, 가설 상정을 유가치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하지만 이 영혼을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 이미 살펴보았듯이 가능과 불가능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체를 상정하는 것과 같은 일은 선험적 가설이자 초자연적 가설로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데는 부적합하다. 전술했듯이 이념을 실체화하는 것은 이성을 태만하게 하기 때문이다.[태만한 이성의 원리(과오)] "가설의 상정을 유가치하게 하는 둘째 요점은, 주어져 있는 결과가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데에, 가설이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B802) 즉, 현상에 대한 완벽한 근거제시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현상들을 합목적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일 터다. 여기까지는 그리 낯설지 않은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칸트는 다른 논거로 가설상정의 효용성을 말한다. "순수이성의 한갓 사변적 문제에 관한 명제에 그 기초를 주는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명제를 단지 변호하기 위해서 가설이 충분하게 허용된다. 즉 독단적 사용에서는 허용되지 않으나, 그러나 논쟁적 사용에서는 허용된다."(B804) 이제 우리는 칸트가 여기서 말하는 "논쟁적 사용"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위 인용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래에 인용하는 칸트 설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변호란 말에서 판단이 하는 주장의 논거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주장한 명제를 분쇄하는, 적의 사이비 견해를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곳) 칸트는 바로 자신의 주장과 맞서는 상대의 주장을 분쇄하기 위해서 가설을 사용할 것을 말하면서, 가설을 "아주 둔중한 무기"(B806)라고 까지 말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 무기는 "권리를 그것에 의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권리를 단지 방위하기 위한 것이다."(B805) 즉 이 때의 가설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논파하기 위해서 상대를 찌르는 창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자신의 주장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면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라고 보는 쪽이 더 좋을 듯 하다. 다시 말하자면, 가설은 "단지 방위 목적을 위해서 고안된 개념이다."(B808) 이런 설명과 더불어 칸트는 자기 주장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패로서 가설이 사용되는 경우의 예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 번째 예는, "경험은 우리 정신력의 부침을 단지 우리의 기관의 각종 변양이다."(B806)라고 하는 주장에 맞서서 "마음의 비물질적인 본성·신체적 변화의 영향을 입지 않는다고 가정된 본성"(같은곳)을 지키기 위한 가설을 상정함으로써 어떻게 방위가 이루어지는가를 보이고 있고, 두 번째 예는, "인간에 있어서나 이성이 없는 동물에 있어서나 출생은 우연한 기회에 의존한다."(B807)라는 주장에 대해서 개체의 탄생이 그렇게 하찮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옹호하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의 방위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가설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적 설명을 덧붙여 보자. 가설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있어서 사견 자체로서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초험적인 반대편의 월권에 상관해서만 타당성을 갖는"(B809)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단지 개연적 판단일 뿐"이고, 이런 가설은 "물론 그 무엇에 의해 증명될 수 없기는 하나, 적어도 반박할 수는 없는 것"(같은곳)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가설 사용에 의해서 순수이성의 변증적[초험적] 사용이 완전히 근절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계속 이러한 싸움을 해야 하는가? 칸트는 우리 이성의 비판 능력을 날카롭게 갈고 닦을 것을 주문한다. (여기에 바로 가설 사용의 또 하나의 큰 효용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설의 설정과 그것과의 싸움. 자신의 자의적인 산출물과의 싸움. 그리고 그 싸움-두 대립되는 주장의 지양-을 통한 자기 고양. 그 고양의 과정 끝에 도달하게 되는 항구평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헤겔 변증법의 씨앗을 읽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사변적 이성의 선험적[초험적] 사용은 그 자신 변증적"(B805)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적을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하"(같은곳)며, 이렇게 우리 안의 적을 키워서, 더 나아가 "어떠한 적도 스스로 생각지 않았던 항의를"(B806)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어, 그 분명해진 적과 맞서 싸워서, "인간이성의 본성 중에 있는 갈등의 싹을 근절"(B805)시킴으로써 우리는 "항구평화를 확립해야 한다."(B805)

 

 방법론 1장 순수이성의 훈련

 

4절 증명에 대한 순수이성의 훈련

 선험적 종합적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성은 대상보다 자신의 개념이 먼저 선천적으로 종합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증명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대상의 개념을 넘어 선천적으로 그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면, 이러한 개념의 밖에 있는 특수한 인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특수한 인도란, 선험적 인식에 있어서는 다만 오성 개념을 취급하는 가능적 경험이다. 즉 주어진 개념에서 다시 다른 개념으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주의를 결여하면 증명은 터진 둑을 흘러넘치는 물처럼  "분류"하게 되며, 사람들은 이러한 증명에 기대기 보다는 오히려 불완전하더라도 상식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종합 명제의 증명은 그러한 종합이 시인되어야 하는 것을 먼저 증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것을 무시한 점이 수 많은 오류추리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오류추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증명이 시도되기 전에, 어떤 근거로 순수이성에 기대어 이러한 확장을 기대할 있는가, 또 개념으로부터 전개되지도 못하고 경험에 조회할 수도 업는 이와 같은 통찰을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가를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첫째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 우리가 그런 증명을 기초지우려고 한 그 원칙은 어디서 얻어진 것인가? 또 그런 원칙으로부터 바람직한 결론이 추리되어 나온다는 것을 어떤 권리에 의거해 기대할 수 있는가? 미리 숙고하고 그 정당함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어떠한 선험적 증명도 시도해선 안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증명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원리에 대한 연역은 여러분이 반드시 요구할 수 있는 것이요, 또 그것이 다만 개념에서 개념으로의 전개에 불과하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 변증적 원칙을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각각의 선험적 원칙에 대해서 유일한 증명만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념에 따른 직관에서 근원을 두는 증명이라면 여러 가지 길을 꾀할 수 있다. (수학) 그러나 선험적 명제는 언제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며 이러한 개념 이외에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증명 근거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 여러 변증적 주장에 대한 비판은 매우 간단하게 된다. 증명이 여러 가지면 어떠한 증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선험적 종합 명제에 대한 증명은 결코 간접적이어선 안되고 언제나 직접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귀류법이다 귀추법 retroduction을 쓰지 말라] 결론의 참으로부터 전제의 참을 추리하는 귀추법은, 사실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결론뿐이므로 많은 분과학에서, 특히 가설 검증에 쓰이긴 하나 논리적으로는 옳지 않다. 그러나 귀류법은 전적으로 엄밀할 뿐 아니라 용이하다. 결론이 거짓이면 전체의 가언 명제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귀결에 있어 거짓인 것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인식이 참이 되는 것이다.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귀류법은 반드시 주관적인 거이 객관적인 것과 교체되는 일이 없는 학에 있어서만 허용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귀류의 객체가 되는 결론부분이 사유의 주관적 조건과는 모순되지만 대상과는 모순되지 않는 경우이거나, 혹은 주관적 조건을 잘못 객관적 조건으로 오해하여 결론과 결론의 반대 부분이 모두 모순되어 둘 다 거짓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성질도 가지지 않는다는 규칙] 특히 순수이성의 선험적 시도는 스스로 변증적인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방법론 2장 순수이성의 규준

 순수이성은 기관 Organon이 아니라 단지 소극적 기능-사변적 사용에 있어서는-일 뿐이다 . 그러나 적극적인 인식의 원천이 어디선가 있어야 한다. 즉 예지적 대상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은 이성을 보자마자 소매를 뿌리치고 도망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남겨진 또 하나의 길, 즉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이성은 더 좋은 행운을 기대할 수 있겠다.

 

 규준 Kanon 이란 어떤 종류의 인식 능력 일반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선천적 원칙의 총괄을 의미한다. 예컨대 선험적 분석론은 순수오성의 규준이었다. 변증론에 따르자면 선험적 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순수이성의 바른 종합적 사용이 가능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규준이 있어야만 하며, 그것은 사변적인 이성 사용이 아닌 실천적 이성 사용에 관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1절 우리 이성의 순수 사용의 궁극 목적에 관하여

 이성은 그 본성에 따라 인식의 궁극적 한계에까지 감히 도달하려고 하며 체계적 전체를 이룸으로써 거기에 안주하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이성의 사변적 관심에 의거하는 것인가, 이성의 실천적 관심에 의거하는 것인가? 나는 순수 이성의 사변적 성공을 잠시 제쳐두고, 순수이성의 궁극목적만을 묻겠다. 그런데 이성의 사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단 세 개에 불과하다. 즉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 그리고 하느님의 현실적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변증론에서 보았듯 이것을 사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이에 반하여, 목적??니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주어지고 경험적으로 제약되지 않고 단적으로 명해지는 순수한 법칙은 순수이성의 소산일 것이다. 도덕적 법칙은 이와 같은 것이며, 오직 도덕적 법칙만이 순수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속하고 규준을 허용한다.

 상기한 세 개의 문제는 오히려 더 심오한 곳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우리가 사려깊게 논하고 있는 자연의 궁극 의도는 우리 이성의 조직에 있어서는 본래 다만 도덕적인 것에 두어져 있는 것이다. 먼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유 개념은 여기서는 다만 실천적인 것이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천적 자유는 경험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감성적으로 욕구 능력에 미치는 인상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숙고는 이성에 의해 행해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숙고를 이성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이는 선험적인 문제로서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실천적인 견지에서 이성의 규준이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로는 단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즉 "신은 존재하는가?" 와 "내세는 존재하는가?" 이다.

 제 2절 순수이성의 궁극목적의 규정 근거로서의 최고선의 이상에 대하여

 순수이성은 실천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최고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이성은 사변적 관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거부한 것을 실천적 관심에서 승인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우리 이성의 모든 관심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가 있는가?

 첫 번째 물음은 전적으로 사변적인 문제이다. 두 번째 물음은 전적으로 실천적이다. 세 번째  물음은 실천적인 동시에 이론적이다. 희망의 도덕법칙에 대한 관계는 지식의 이론적 인식에 대한 관계와 같다. 희망은 "어떤 것이 생기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가능적인 궁극 목적을 한정하는 것이]고 추론한다면 지식은 [어떤 것이 생기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최고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추론한다.

 행복이라는 동기에 의거하는 실천 법칙을 실용적 규칙이라고 부르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것만을 의거하는 실천 법칙을 도덕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처세의 규칙-실용적 규칙은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도덕률은 행복이 도대체 가치있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도덕률은 자연적 경향과 호오(好惡)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자유가 원리에 따라 가치 있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만을 고찰한다.

 나는 [칸트는] 도덕적 법칙이 실재한다는 것과 이러한 법칙이 단적으로 명령하는 성격의 것이며 모든 관점에 있어 필연적이라는 것을 상정한다. 순수이성은 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성은 이러한 행위를 명령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행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종의 특수한 통일, 요컨대 도덕적 통일-당위와 행위의 통일-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수 이성의 원리는 도덕적 사용에 있어 이런 면에서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도덕적 법칙과 합치된 세계를 도덕적 세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세계는 물론 예지적 세계이며 이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 영향을 감성계에 가질 수 있다.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에 있어 도덕적 원리들이 이성에 따르면 필연적이라고 하는 명제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같는다. 즉 모든 사람은 행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만큼 행복을 원할 수 있다는 것, 즉 도덕의 체계와 행복의 체계가, 이념적일 뿐이지만,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 법칙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며 그 자체가 일반적 행복의 원인이 되는 자기 보상적 도덕서으이 체계는 단지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이성적 존재자의 개인적 의지가 그를 포괄하는 최고 의지에서 발행된 것처럼 행해질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덕성과 행복의 관계는 결코 자연적으로는 도출해 내거나 연역해 낼 수 없는 바, 그렇다면 행복해지려는 자연적 소질과 행복을 가치있게 하려는 도덕률의 노력은 도덕법칙에 따라 명령하는 최고 이성이 동시에 자연의 원인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경우에만 도덕성과 행복이 연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의 합목적적 통일성 역시 필연적이어야 한다.

 나는 이 예지자의 이념을 최고선의 이상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없다면 도덕법칙은 공허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도덕법칙의 필연적 결과는 이러한 전제가 없으면 전적으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도덕법칙을 명령이라고 보는 이유는 바로 필연적 결과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만일 도덕 법칙이 예정적으로 도덕률과 그 결과를 결합시키지 않늗마년, 즉 약속과 위협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도덕법칙은 명령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도덕신학은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이성적 근원적 존재자의 개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사변적 신학 이상의 독단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행복만으로는 아직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은 행복과 도덕적 선행이 합치되어 있지 않는 한, 행복을 시인하지 않는 것이다. 완전한 선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행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행복을 맞이할 기대를 해야 할 것이다. 도덕률과 행복의 이러한 결합은 물론 도덕이 주가 되어야 한다. 행복에의 참여가 도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혀 도덕적이 아니다. 도덕적 신학은 도덕법칙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에게나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에게도 신의 현실적 존재와 내세를 두렵게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이는 소극적 신앙이라 할 것이다. 이는 물론 도덕이나 선한 의지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야기한다. 바꿔 말하면 악한 의지의 돌발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3절 억견과 지식과 신앙에 관하여

3장 순수이성의 건축술

4장 순수이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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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illox.com.ne.kr/pdata/kant4.htm

 

      

  칸트의 비판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는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물론, 이  물음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자이다"라는 보편적 규정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 전제하에  칸트는 다음의 3가지 물음에 대한 탐구로써 그의 위대한 철학체계를 구성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위 3가지 질문을 통해서 칸트가 밝히고자 한 것은 바로 인간의 앎(인식론), 도덕적 행위(도덕철학), 그리고 합목적적 희망 (미학)의 가능 근거와  범위이다. 이것은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의 그의 3비판서의 주제와도 나란히 일치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순수이성비판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된 주제는 인간의 앎(인식)의 가능 근거와 그 한계 및 범위 등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이란  인식의 재료(감각자료)와 형식(시공간/범주)의 종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각'에 의한 경험자료들과 이 잡다한 자료들을 잘 분별해주는  '오성'의 종합에 의해 우리의 인식은 이루어 지는데, 이때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형식'이 '시공간'이며 오성(분별력)을 가능케 하는 순수형식이 '범주'라는 것이다. 이를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1) 지금 내 앞에 하나의 연필이 있고 2) 이 연필에 일정량의 힘을 가할 경우 그것은  움직인다. 연필의 존재와 운동에 관한 이러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우선 우리는 감각(시각)에 의해 지금 내 앞에 하나의 연필이 있음을 본다. 그런데 이 연필은 특정시간과 공간 하에 있다고 여겨지는데, 칸트에  따르면 이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의식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필의 현상적 실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으로서,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것이다. 즉, 그에 따르면 대상(사물)의 감각적 인식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의식 내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그래서 순수한) 틀이 있기 때문이다. 시공간이라는 우리 의식 내부의 틀로써 파악될 수 없는 것(신, 영혼 등)은 따라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된다("감각의 순수형식은 시공간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연필에 어떤 힘을 가하면(원인) 그것이 움직인다(결과)는 사실을 (실제 경험을 하지 않고도) 미리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바로 우리의 의식  내부에 있는 '인과율'이라는 선험적(경험에 앞선) 틀 때문에 가능하다. 이 틀을 칸트는 '범주' 라고 했는데, 범주에는 양(단일/다수/전체), 질(실재/부정/제한), 관계(원인-결과 /실체-속성/상호작용), 양태(가능/현실/필연) 등이 있다. 이 선험적 인식틀 (범주)에 의해서 우리는 "힘을 주면 연필은 움직인다"(관계; 원인-결과) 뿐만 아니라 "연필이 많다"(양; 다수) 혹은 "연필은 부러질 수 있다"(양태; 가능)의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오성의 순수형식은 범주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감각과 오성에 의해 사물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는데,

 1) 시공간이라는 감각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사물을 일차적으로 지각하고,

 2) 이 지각된 잡다한 현상은, 범주라는 오성의 선험형식에 의해 양과 질, 혹은 관계와 양태 등으로 통일적으로 파악된다(외부 대상의 현상적 실재는 따라서 우리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전통인식론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이를 칸트는 인식론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불렀다).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실천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지고 주된 주제는 도덕적  행위의 선험적 근거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옳으려면, (그 결과에 의한 이익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그 행위가 옳다는 이유만으로 행해야하는데, 이러한 의지를  그는 "선의지"라고 불렀다(동기론적 윤리설). 선의지에 의한 도덕적 행위에도 선험적인 원리(실천이성의 법칙)가 따르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당위명제 혹은 정언명령이다:  "너의 의지의 수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도덕법칙이 이와 같이 명령의 형태로 혹은 '해야만 한다'는 규정적 명제로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경향'이 항상 선을 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언제나 당위이며 의무인 것이다(의무론적 윤리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선의지에 의해 행동하여야만 할까. 왜 내가 배고플 때, 남의 굶주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배만 채울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의 인간의 자율성, 즉 "자유의지" 때문이다. 자연물이나 인간의 육체는  인과율의 결정론에 따르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자연법칙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하니까").

 

    선의지의 정언명령이라는 실천이성의 법칙은 다음과 같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실천명령을 내놓는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갓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3. 나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판단력 비판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어지고 주된 주제는, ('반성적 판단력'이라는 개념으로써) 자연의 영역(순수이성)과 도덕의 영역(실천이성)으로 이분된 세계가 전체로서 합목적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반성적 판단력이란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판단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개개인의 미적 판단은 특수한  것이지만, 그 개별판단은 공통감이라는 선험적 원리에 의존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 특수한 판단에 필연적으로 동의를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특수한 미적 판단은 객관적/보편적인 합목적적 판단이 된다.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이 시사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합목적성이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인식은 결정론적 인과율이 지배하는 자연세계(현상계)에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 의식의 시공간의 직관형식이 다다를 수 없는 신이나 영혼의  존재(본체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한편,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면서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어야할 의무가 있다. 실천이성 비판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인간은 그 자체로 옳으면 그대로 행동해야한다는 선의지의 명령대로 행위해야 하는데, 이러한 의무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존재("자유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시간에, 이기적인 마음의 자연적 경향을 물리치고  실천이성의 법칙에 따르려면, 우리는  영원히 살아야할 것인데, 이는 곧 영혼의 불멸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의 현존에 대해서도 우리의 순수이성으로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나, (이기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행복'과 '도덕성'의 조화와 매개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초월적 존재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 초월적 존재가 바로 신이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영속적인 행복을 희망할 수는 있고, 이 희망은 신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은 신의 현존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세계와 자유세계의 이원적 분리는 "세계가 언젠가는 완전히 그리고 합목적적으로 개발되도록 정해져있다"는 칸트의 통찰(판단력 비판)에 의해 그 연결 지점을 찾는다.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등과 같은 초월적 이념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보편적 도덕 행위의 배후 근거로서 신과  영혼은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청된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은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도(특수판단) 그것이  합목적적(보편판단)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러한 능력이 바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반성적 판단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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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마지막으로 내가 매겨놓은 평점은 고작 '별 다섯'이다. (이게 "평점 만점"이란 뜻일 수도) 

       여하튼 이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가 이 책의 철학적 무게감과 중요도를 폄하하진 않는다. 

       오히려 나처럼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만한 수준이냐가 문제인 것. 

       즉, 지나치게 내용이 심오하면 '대중성'은 아무래도 낙제점일 수밖에 없는 까닭인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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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저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출판사
동서문화사 | 2007-07-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낡은 관념을 뒤엎은 인간 혁명 자연의 중심은 인간, 그 도덕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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