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일기

이제는 잘 안보는, 새해 첫, 100분토론이 있는 목요일... 밤, ......

단테, 2010. 1. 8. 00:13

 

- 점심 때 우연히 찾게 된 <시인>. 신경림 詩人과 이시영 詩人의 글귀를 보게 되는,

 

 

 

벌써 목요일, 작년의 반복적 일상들이 여전함에 대한 불만과 불확실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미묘히 뒤섞인 요즘.

이렇게 맞이하는 2010년의 새해 첫주가 이제 주말 워크샵을 앞두고 있구나... 조만간 이동발령이 있을 예정인 나......

 

바쁘기만 한 와중이지만, 결코 마음마저 한가롭지 못한 까닭 역시 바로 여기가 그 근저인가 보구나...

과연 어느 팀으로?... 또 내 개인 CDP는?...... 이런저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단 한줄 정리와 기획을 해내지도 못한,

그럼에도 꾸역꾸역 밀린 일과마냥 시간에 쫓겨 작업만을 일삼고 있는 심경이 결코 편치만은 못할 형국인데 말이지, ...

 

 

 


 

 

 

 

 

 

 


 

 

 

[삶과경제] ‘더 쉬는 대한민국’이 필요하다 / 이원재

 

 

 

[한겨레] 2010년 첫 출근날, 아침부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눈에 갇혀 있다는, 차가 막힌다는, 조금 늦는다는 연구원들의 전화였다. 서울 전체가 마비 상태였다.

기업에서도 시무식을 연기하는 일이 잇따랐다. 국무회의에 지각하는 장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출근을 위해 전쟁을 치르던 우리 사회를 관찰하면서 생각했다. 하루쯤 모두가 쉬어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날 많은 일터에서는 늦게 출근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추위에 시달린 몸을 추스르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서울시를 탓하고, 기상청을 비난하기도 하면서, 시간이 쉽게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교통지옥을 피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비효율적인 하루를 미리 예상하면서도, 쉽게 '휴무'를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휴식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출근시간도 지키지 못하고 교통지옥에 갇힌 채로, 그날 꼭 일터로 향해야만 했을까? 누군가 '오늘은 그냥 모두 쉬자'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한국인 삶의 일터 종속성은 엄청난 수준이다. 특히 의사결정권을 가진 엘리트의 일터 종속성은 훨씬 높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체가 '과로'를 미덕으로 삼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운영된다. 고용되지 않은 젊은이는 아무리 진취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며 자원봉사와 문화활동을 하고 있어도, 늘 걱정거리로만 취급된다.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하는 '탄력근무시간제' 같은 혁신적 인사제도는 '근로시간 연장'으로 쉽게 둔갑한다.

그러나 최근 경제학은 과로의 미덕을 일방적으로 예찬하지는 않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1990년대 중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경제 성장은 노동 투입에 과도하게 의존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문화 시스템과 인적자원의 질 등을 고려한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분이 매우 낮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지속적 성장에는 노동의 추가 투입보다는 성찰과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강원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가 쓴 책 < 신상품의 경제학 > 은 다른 관점에서 휴식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경제의 질적 도약에는 메가톤급 신상품 창출이 필요한데, 이는 기존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쉬고 있는 '휴무노동'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휴식'으로부터 혁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공휴일과 주말이 겹칠 때 공휴일을 미뤄 쉬게 하는 대체휴일 논의가 한창이다. 기업은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생산에 차질을 빚거나 인건비가 늘어난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좀더 큰 전략적 견지에서 보면, 휴식은 산업이나 기업의 제품이나 생산과정을 혁신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혁신과 신상품 개발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더 많은 휴식이 필요할 것이다. 구글은 직원 노동시간의 20%를 일과 관련 없는 '딴짓'을 시키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도심 폭설과 같은 재난사태 대비책도, 돈을 들여 장비를 사고 조직을 만들어 시민의 출근을 돕는 방향으로 짤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마음의 부담 없이 함께 쉬도록 하는 대응 프로세스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한국 경제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려면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는 질을 높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경제 선진화란, 노동 투입이 성장의 동력이던 시대가 상상력과 성찰을 통한 총요소생산성 개선이 더 중요한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휴식은 한국 경제 도약에 필요한 자산이자,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의 밑천이기도 하다. 과로사회는 선진사회가 아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기고] 그 섬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정병호

 

 

 

[한겨레] 여의도에서 한강 유람선을 탄 한 외국 학자가 잠실에서 내렸다. 실망스런 표정으로 이걸 왜 타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넓은 강물은 보았는데 양옆에는 온통 콘크리트 제방과 아파트, 굵은 다리 기둥과 돌출된 고가도로뿐, 역사도 문화도 경치도 없더라는 말이었다.

원래 한강이 그런 강은 아니었다. 조선이 도읍으로 정한 한양의 남쪽에 흐르는 한강, 특히 송파에서 마포에 이르는 강의 경치는 빼어난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은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선유봉'과 '작은 해금강'이라고 불리던 '밤섬'의 절벽을 구경하며 뱃놀이를 하였다. 밤섬과 여의도 사이에는 십리에 걸친 넓은 백사장이 있어서 시인들이 "한 줄기 맑은 모래, 강을 덮었는데, 눈인가 서리인가" 하고 노래하였다.

굽이굽이 강어귀마다 아름다운 백사장을 낀 섬들이 있었고, 양편의 절벽에는 무수한 정자와 누각이 서 있었다. 그중 풍치가 뛰어난 곳은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이었다. 건너편 '저자도'에는 왕실에서 학자들을 위해 마련한 독서당이 있었고, 넓은 모래벌판엔 갈대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잠실에서 굽이쳐 내려오는 물줄기를 맞이하던 압구정과 저자도는 1969년 현대건설이 송두리째 파헤쳐서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저자도의 자갈과 모래로 압구정 정자 앞의 하천 부지를 매립해서 불하받은 곳이 지금의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이다. 마치 라인강변 로렐라이 언덕 앞을 매립해서 로렐라이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토건업자에게 그 섬과 그 언덕은 모래와 자갈더미일 뿐이었다.

신선들이 놀았다던 선유봉은 박정희 정권 때 파괴되어 제2한강교의 교각이 되었다. 군인들에게는 돌기둥감으로밖에 안 보였던 모양이다. 배 만드는 마을이 있던 부유한 섬, 밤섬은 1968년 겨울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어 여의도 매립용 25만t의 잡석과 흙이 되었다.

개발독재는 강에 대해 무자비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파괴는 불가피했다고, 그들은 '경제'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얻었다는 말인가? 누구의 경제, 어떤 경제를 말하는 것인가?

그 섬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다시 경제를 생각해 보자. 밤섬이 아직 거기 있다면, 그 섬의 가치는 얼마일까? 600년 된 쌍둥이 은행나무와 사당과 정자와 배 만드는 마을이 있는 섬에 카페와 화랑과 뮤직홀이 늘어선 선착장이 있다면 지금 그 섬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일까? 압구정 현대아파트 4만평 단지 바닥에 토사로 들어간 한강의 명승지 저자도 30만평을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였다면? 아니 그 아파트들을 압구정 정자 앞이 아니라 그 뒤나 옆에 지었다면, 아니 올림픽도로를 50m만 강변에서 들여놓았다면? 아니 수백만 서울 시민들이 물놀이를 하던 광나루, 뚝섬과 용산, 마포나루의 수십리 강모래 고운 백사장들을 해운대 해변만큼만 지킬 수 있었다면 그 가치는 지금 얼마일까? 모두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가 그때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모두 없애 버렸다.

이제 온 나라의 큰 강 4개를 동시에 파헤치고 긁어내는 공사를 모두 2년 안에 끝내겠다고 한다. 지금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섬, 어느 언덕, 어느 모래톱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도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저 턴키 방식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토건업자들에게 우리네 강들을 백지위임하라고 한다. 동네 작은 집 공사도 그렇게는 안 한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낱낱이 밝히고 주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대통령으로 뽑았다고 온 나라 산천과 우리 후손들의 자산까지 모두 백지위임한 것은 아니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