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의 수업시대
이 산 / redpassion@hanmail.net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
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
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 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
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
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
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니씩 읽어본다. 어딘가엔 이
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씌어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쓰기에 관한 시라면 늘 반복될만한 시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제는 전혀 새롭지 않다. 다만 그것을 다루는 솜씨,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세,따위가 더 문제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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