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이은규 / yudite23@hanmail.net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에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급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마디로 눈에 확 띄는 작품을 접한 기분은 언제고 설레고 기쁘다.
요즘 보기 드문 시를 써낸 신인의 용기와 재기도 남달라 보이고, 무엇보다 지극히 지독한 그 관념성을
어찌 단 한번의 칼날 선 비판 앞에서 단도리질 당하지 않은 채 지켜냈는가가 도리어 더 놀랍다.
웅장한 재기가 있거나 혹은 형상화의 빼어난 재주를 후방으로 미뤄둔 절실함이 더 컸을까?
그게 참 궁금하구나.
- 예전에 썼던 <바비도 紀行>을 떠올렸다. 그 습작이 벌써 15년전이더구나... 이후로 단 한번도 그런
풍으로는 시를 써본 적 없다. - 내가 가장 크게 받았던 비판도 역시나 그러했었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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