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모자
이기홍 / khlee8-@hanmail.net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 어떤 비판에도 꿋꿋하게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꼽은 심사위원들이 궁금하다.
놀랍도록 범작인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한 새로운 감수성은 과연 무엇일까?
혹은, 시의 죽음 따위를 논해야만 할 일종의 방어적 기제였던가? 혹은,
<기본>으로 회귀하고픈 최신 유행담들에 대한 한줄기 방어의 빛일까? 따위,
'- 단테노트 > 문학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그라미의 여성성, 약관의 초심에 거는 환상 (0) | 2009.01.19 |
---|---|
시쓰기의 본질 (0) | 2009.01.19 |
식물성과 전통적 시학, 그 <교과서>에 대한 태클 (0) | 2009.01.19 |
담대한 상상력, 공포 뿐인 현실의 반증 (0) | 2009.01.19 |
시단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 (0) | 2009.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