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대화다.>
오늘 읽은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어제 보았던 2007년과는 또 다른 양상을 낳는다. 게다가 이것을 일컬어 일종의 "진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한테 던져본다. 무릇 "진화"라 함이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은 계승하여 발전하는 과정을 일컬을진대,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 시단의 현재는 그 과정중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내 대답은 일단 "그렇다"다. 왜냐하면 언제고 그것은 일종의 "도전" 과정이기 때문이며, 설령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진정 "후퇴"나 "패퇴"의 일종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야만 비로소 또 다른 "승리"와 "진보"를 낳을 자양분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 이상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문학산업의 유행에 관한 독설들
"본심 위원들은 고통스러웠다. 30명의 개성이 아니라 4~5개의 유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응모작들은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먼저 눈에 띄었다. / 우선 작품의 길이와 형태가 거의 같았다. 행을 구분한 시의 경우, 대부분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또 산문시가 압도적이었다. 어떤 응모자는 응모작 7편이 모두 산문시였다. 시의 길이와 형태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많이 겹쳤다. (중략) / 응모자들은 저마다 뛰어난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초점이나 색채, 구도, 즉 미장센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그 대상을 왜 '촬영'하는 것인지, 또 그렇게 촬영하고 편집한 '화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감독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예비 시인들은 시는 오로지 이미지의 배열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시에서 이미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시가 되기 어렵다. 이미지 과잉은 곧 메시지(의미)의 결핍이다. 시에서(삶에서도 그렇지만), 과잉과 결핍은 결코 미덕일 수가 없다. 시 역시 '타인에게 말걸기'라면, 이미지 과잉으로는 독자에게 말을 걸 수가 없다. 더구나 저 독자가 시대와 문명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하루빨리 자폐적인 시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앙일보 심사평 중에서)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갖는 조건, 즉 '시의 기본'을 모른 채 시 비슷하게 써서 시라고 우기는 것 같은 수많은 위조품들을 읽어야 하는 심사자의 고역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물적이다는 것은 사물을 주절이 주절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헤프게 낭비하는 것, 동어반복하는 것은 시에서는 범죄일 수 있다. 또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넌센스의 나열이나 실패한 은유들을 가지고 시의 특권이라고 오해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많은 투고작들이 어쩜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는데 이 개성의 표준화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까?" (조선일보 심사평 중에서)
참고로, 중앙일보 심사위원 중에 이문재가 있었고 조선일보 심사위원 중에는 황지우가 있었다. 잠시 심술이 나더구나. 과연 그들은 이 몰개성과 표준화의 국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이미지의 배열을 큰 특징 중 하나로 갖는 이문재의 시집을 읽던 기억이 나고, 시의 질서 파괴를 과감히 단행한 황지우의 시집 역시 중요한 커리큘럼 중 하나로 여전히 문학도들의 필독서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들의 성공을 모방하기 위한 마치 공산품과도 같은 제작과정을 훈련시키는 사회적 유행이 그 근본원인일진대, 그만큼 "룸펜"을 자처하게 된 이 나라의 숱한 젊은이들이 왜 문학의 숲으로 숨어들려고만 하는지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오히려 더 진지하게 각성해야 할 현상은 아닐까도 되묻고 싶어진다. 기본적으로 문학적 성공이 금전적 성공을 결코 가져다줄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우는 편이 오히려 더 낫겠지는 않은지?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이지만)
문학이 산업이 아닌 예술로 온전히 자리매김하려면, <개성>과 <창조>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다. <예전의 성공작이 결코 현재의 성공작이 될 순 없는 거다.> 그 패턴과 문체와 주장들 모두가 말이지, - 그래야만 비로소 문학은 진보 내지 진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지적은 그래서 일단 맞다고 봐야 하는,
<경전>으로의 회귀, 고고한 지식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
개인적으로 이 해의 당선작들 중 꼭 한편만을 꼽으라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은규의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을 꼽고 싶더구나. 오늘 읽은 시편들 중 가장 눈에 확 띄던 작품인데, 흡사 예전에 처음 접했던 인상과 그 영향으로 한동안은 주지하기도 했던 조정권의 <산정묘지>마냥 다분히 관념적 소산이다. 관념이 빚어낸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건 김수영 문학상을 차지한 조정권의 작품에서도 발견됐던 터라 그다지 낯설진 않았고, 그렇게까지 밀어부친 저력과 바탕이 사뭇 위력을 느끼게 만든다.
한동안 이와 비슷한 경향들을 "선시禪詩"라고도 불렀는데, 경전과도 같은 이러한 문체는 역시 종교적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소설로 치자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도 비슷한 경우다. 문학과 종교, 특히 시詩에 있어서는 그 유사성에 대해 한번쯤 연구해둘 필요도 있겠다. - 여기서의 종교는 기존의 기독교, 불교 등 특정한 종교와 같은 구체적 실체가 아닌 철학 외 영역으로서의 그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을 뜻한다.
이런 시풍을 가끔 닮고 싶기도 했는데, 그것의 바탕은 무엇보다 탄탄한 지적 수준과 상상력을 견고히 결합시킴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즉 쉬이 닮아질 수 있는 성질의 내공은 아닐 성싶은데,
시를 넘어서는 진실
어디까지고 언어는 부차적이다. 부차적 문제다. 매일신문이 뽑은 이장근의 <파문>은 지극히 상투적이라 할만한 언어들로 구성돼 있다. (심지어 지나치게 평이할만큼 언어의 선택이 친숙하고 놀랍지도 않다.) 어찌 보면 산문적 경향일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평이한 말투로 구성된 쉬운 시가 거꾸로 좋은 시라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익히 알아온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량보다도 앞서는 문제는 결국 따로 있다는 얘기다. 바로 시인의 마음과 생각, 그 자세가 아닐까. 그래서 이 작품이 당당히 뽑혔음을 인정하고 싶구나, 기교는 원숭이의 몫이지 결국 사람이 할 일은 따로 있는 법이니까 (이 역시도 마치 예전의 원동우가 남긴 <이사>라는 시처럼 말이지, 그 지극히도 평이하기만 했던 시 한편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천부적 재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시인들 앞에서는 한없이 절망감만 커지는 경우들이다. 예를 들자면, 서정주가 그랬었고 또 고은의 다작 또한 만만치가 않구나. 경향신문을 통해 등단하게 된 이제니라는 시인의 작품들은 또 한번의 그런 절망감을 내게 가져다준다. 도대체 나는 이런 시인들을 도저히 이겨낼 자신도 또 그런 생각조차도 없다. 이미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는 느낌, 노력하는 수재가 노력하는 천재를 만났다는 느낌이랄까. 시라는 예술 영역에서 굳이 우열이 필요한 건 아니겠어도, 부러운 건 솔직히 부럽다고 말해야 되겠다는 생각, - 특히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계통을 전공한 이들에게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 놀랄만한 어휘 구사와 그것이 큰 미덕 중 하나로 간주되는 전통적인 한 경향에 대해, 그 능력이 결코 내 것은 아님을 알 때마다, 늘 스스로가 부족함에 대한 큰 좌절과 열등감에만 이리도 빠지도록 만드는구나, 광희 형도 그때 그랬었지,
극복을 위한 문제제기
종합적으로 볼 때, 전년에 비해 심사자들은 완성도늘 넘어선 그 무엇을 갈구한 흔적이 역력해진다. 그게 개성이든 문체나 사상 혹은 또 다른 진실의 힘이든간에 아무튼 <새로움>을 미덕으로 해야만 하는 복제의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고뇌가 느껴져 그나마 다행이구나, 또 그런 노력의 고통이야말로 유일하게 미래를 짊어질 예술가들의 유일한 보람이자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기성 가수들의 노래보단 확실히 더 듣기가 불편했던 서태지가 가요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격과 예술적 성취를 동시에 이뤄낸 그건 바로 <파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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