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메모

[문학][책] 견고한 슬픔 속, 지겨운 '꿈'

단테, 2015. 12. 26. 13:27

 

- 정호승, "여행"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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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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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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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서평이 눈길을 끄는 이 시집이 연말 내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어쩌면 '슬픔'이라는 정서 탓이었던 것 같구나. 연말을 맞으면서 사회에서 일어난 많은 우환과 분노들을 제때 표출해보지도 못한 채 끝내는 인내와 끈기라는 미명 아래 또 한해의 굴욕을 지불한 세밑은 드라마 "송곳" 이후로도 얼마나 싸우고 겪으며 되찾아야 할 것들이 한참이나 많이 남았는가를 새삼 되새기게 하고, 영어의 생활로 접어든 민주노총 위원장이나 "복면"을 쓴 채 집필중이라는 국정 교과서의 만행이나 또 혹은 더 이상 '미래'를 자신있게 말하기도 힘든 대한민국 경제의 위태로운 형국이며 회사에서도 '성장'을 끄집어낼만한 전망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정의롭지 못한 인사와 적절치 못한 의사결정은 무수히 반복되기만 하고... 그래서 그랬나 보다.

한때 일컬어 "희망"으로 떠받들던 무수한 가치들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는 더러 퇴색하고 더러는 종말을 맞아 자취를 감추기도 하며 진실의 '유한성'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데는 여간해서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그럼에도 이를 몽땅 "쁘띠적 조급증"으로 치부하기엔 꼿꼿한 신념의 진위여부가 더 먼저 심판대에 오르고 사실 이 대목에서 웬만한 강자들도 얼버무린 언사 내지는 끝내 침묵 속에 입을 닫는다. '희망'은 딱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음도 직감하게 만드는... 그걸 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또는 그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의 의미 등을 찾아 또 나서는 길은 한마디로 '구도'의 연속인 것이지 결코 '일상' 즉 시시때때로 파란만장한 구질구질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낼만한 크기도 무게도 갖지 못한, 견뎌내지도 못하고 또 그것들이 제 관심사도 아닌, 그저 스스로 고독해지는 법일 뿐. 그 '한계'를 냉정히 인정해야만 할 일임을 어쩌면 깨닫는 건가도 싶고. (그렇다고 이게 꼭 '절망'임으로 말하는 건 아니고)

그 '한계'의 힘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는 일, 무언가를 또 '익숙한 지겨움'으로 꿈꾼다는 일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의 역사'임도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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