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詩를 잃어버린 시대의 詩
- 오늘의 편지,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 물고기
▲ 물고기
나는 물고기였으니
어머니가 살집을 다 발라내시면 드러나는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으니
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
물의 금고를 열었던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
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으니
몸속에 꽁꽁 숨겨온 자물통 같은
어머니 자궁 속에 꽂힌,
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
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으니
그리하여 여기 발밑에 버려진
오래된 극장의 열쇠였으니
-김중일(1977~)
△ 과도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시대. 시인은 독특하고 유연한 지각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복귀시킨다. 대개 시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대립되는 것들이 갖는 저마다의 격차를 환기시키며 우리들의 사유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시인은 존재의 재창조를 꿈꾸며, 그런 언어의 극단들을 통해 의미의 하층부를 드러낸다. 특히 이 시에서는 유사 이미지들의 조합과 교환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머리만 남겨두고 살을 발라낸 물고기의 모습은 열쇠의 형상과 닮아 있다. 즉 시인 스스로가 자처한 물고기란 제 몸에 열쇠 하나쯤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라서, 바닷속을 헤엄쳐왔던 삶의 모든 운동성들이 "물의 금고"를 여는 고행의 과정이다. 바다, 물, 자궁과 같은 태초의 근원적 공간을 열어보고 말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들을 경유하고 나면, 늙은 극작가의 한 생애 희로애락이 담긴 서사극과 오래된 극장의 문을 여는 또 다른 열쇠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시인 자신이 사용하는 말은 다른 세계의 무대를 여는 최초의 시도가 될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언어가 경험을 초월하는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그 경험하지 못한 과격한 혁명을 무작정 믿고 싶다. 언어 노동자가 갖는 그 불우한 희망에게 오늘도 미래를 맡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경향신문,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308203608630
- 편집하는 말,
밥을 먹다가 문득 아이들한테 "아빠가 무슨 일을 하면 잘할 것 같아?" 하고 물으니
첫 대답은 의외로 "詩가 낫겠다"더니, 또 대뜸 "비평가가 딱"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일요일 저녁이 저문다.
임진각 한복판에서 인파들 속에 파묻힌 채 잠시 거닐던 일요일 오후, 이제는 3월
완연한 봄기운이 곧 일 법한 계절... 문득 詩 생각을 해본다 밥이 되지 못하는 詩,
자정을 넘긴다. 벌써 또 월요일,
때때금 詩人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했으면서 제대로 詩 한번 써내지 못한 채 벌써
몇해의 세월은 흘렀으며 또 내 필력은 그동안 얼마나 더 낡았는지도 모르겠구나,
한때는 영화로도 또 산문에서도 한편에서는 그저 그런 잡글로라도 버텨본 시절... 또
다시 詩 앞에 서면 이제는 부끄러워진다.
詩를 잃었다. 산문의 시대요, 세월의 무상함 속에 일상을 벗삼아 지낸 시간들은
어쩌면 '일상'이라는 핑계로 詩를 외면한, 추구하지 않은, 비겁함이었나 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또 시집,
그저 그리움일 뿐
단 한번 그리 해볼 용기조차 없는 시절에 또 詩를 꺼내 읽는 까닭은 무얼까.
'인문학' 타령을 하며 넓디 넓은 대강당을 꽉꽉 메운 사람들 틈에선 절대 못느껴볼
그 시절 그 한산하기 짝이 없던 텅 빈 객석과 어눌히 울려퍼지던 시낭송회의 추억,
휴지조각들이 황량히 바람에 일렁이던 광장 한복판에서의 시화전이며 또 한편에서
내내 시끌법적한 운동경기의 풍경 한켠에서 흥행에 실패했다며 파장의 삼겹살만을
연신 굽고 후배들한테 소주를 따라주던 한 선배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해보면, 내게 詩는 그때 그 시절을 통해 작별했거나 또는 이미 직업이 된 셈.
다만,
돈이 되지 못하는 詩는, 그렇게 추억이 된 채 현실 속에서 희미해져갔던 셈...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추억이 호출한 현재는 결국 詩가 詩가 아닌 듯도 느껴지고...
어쩌면 한참을 애써 잊어온 사랑의 추억들만큼, 절절하게 밤공기를 맡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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