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객관적'이 된다는 것
- 오늘의 편지,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과거의 적'과 현재의 적
내 스승은 거의 일본인이나 같았다. 일본에서 제주도 출신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교수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국적을 바꿔야 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어도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0년쯤 살고난 후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가장 고급한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일기는 여전히 일본어로 썼다. 당신이 타계한 후 장서를 정리하다 발견한 길고 짧은 메모들도 모두 일본어였다.
스승이 지닌 지식의 깊이와 절차탁마의 수행력은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웠다. 교실 밖에서건 안에서건 공부와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그 원칙을 지켰다. 잡무를 처리할 때는 다른 책상을 썼고 그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으로 치지 않았다. 나는 스승의 교훈과 학구적 태도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시늉으로만 그럴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나마 그것이 스승을 배반하지 않는 길이었다.
나는 스승이 한·일 혼혈인 것을 안 이후 '왜'라는 말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일본인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스승을 통해 일본인을, 아니 일본 연구자들의 근면하고 정직하고 진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일본의 전세대 연구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일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이다. 나는 일본인을 증오하지 않았다. 일본인들 속에서 위대한 학자들을 볼 뿐이었다.
스승은 한국에 와서도 일본 문화를 사랑했다. 길을 가다가도 일본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잠시 발을 멈추었으며, 여러 종류의 일본 잡지를 구독했다. 그러나 학생들 앞에서 일본어를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일본의 한국 침탈, 대륙침공, 태평양전쟁 등에 관해서는 여타의 한국인과 늘 감정을 공유했다. 일본의 극우 정치가가 된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를 악당이라고 엄숙하게 말했으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는 '재주는 좋지만 덜 떨어진 낭만주의자'로 판단하고 가엾게 여겼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 그리고 한국의 친일파들은 선생이 보기에 모두 전범일 따름이었다. 선생은 그 전범들을 증오했다. 선생의 정체성은 두 나라에 걸쳐 있었지만,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는 나라의 시민이라는 그 정체성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발언의 핵심을 짚어보면 옳은 것처럼 들리는 말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를 명백하게 알게 해준다. 그는 말했다. 동북아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정치지도자도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닌 마비를 초래한다." 이 발언이 겨냥하고 있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어느 사이에 민족주의의 낡은 감정에 갇혀, 어설픈 정치가들에 값싼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돼 버렸다.
중국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인들이 한국이나 미국에 '종군위안부'의 조각상을 세운다면, 그것은 양국 국민들이 언제까지나 몽매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까. 양국 국민들이 정치가들의 술수에 놀아나 깊이 없는 감정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과거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일까.
'난징 대학살' 같은 학살 사건이 중국인들에 의해 미국에서 저질러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인들과 중국인들과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지탄해야 할 일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젊은 처녀들을 강제로 전쟁터의 위안소로 끌고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 한국, 중국, 미국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의 시민들이 함께 통탄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인간성에 관한 일이고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일이기에 민족감정 따위에 엮어 묶을 수 없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와 단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객관화해야 한다. 일본의 침략주의와 제국주의에 관해서라면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에 앞서 일본인들이 먼저 그 실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객관화되지 않는 '과거의 적'은 바로 '현재의 적'이며, 한국인들과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적이기 때문이며, 웬디 셔먼의 나라 미국의 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선생은 우리에게 과거를 객관화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 경향신문,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306211307352
- 편집하는 말,
쉽게 내면화하고 또는 감정이입을 한 채 대상에 몰입해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 '주체'를 '대상'으로 동일화하는 현상들을 '주관적' 받아들임으로 정의한다면, 반대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 채 '대상' 그 자체만을 응시해 본질을 바라보고 또 '주체'는 '주체' 스스로 그 본질을 통한 또 다른 길을 모색 내지 발견해내고자 하는 모습들을 일종의 '객관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테며...
사실 분노, 사랑, 억압, 애틋함 따위의 감정들을 이렇듯 '객관적' 시선으로 대할 수 있는 태도는 또 무슨 냉혈한과도 같은 처절한 자기억제요 건조한 감수성에 지나지 않는 얘기도 될 텐데, '객관적' 시각으로야만 그 어떤 문제들을 비로소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또 해답 역시도 보다 현명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쉽게 반박하지는 못할 것 같으므로.
...
토요일, 주말, 도서관을 다녀왔다. 낮잠을 잤고, 늦은 저녁, 밥을 먹고. 집안은 온통 TV 뿐.
PC를 켜고 잠시 블로그 앞에 앉는다. 적막함. 고독감.
때때로 내 일기는 나를 꽤 닮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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