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고향을 바라보는 때
- 오늘의 편지,
[김우창 새해 특별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고향
명절 행사의 하나는 고향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맞이하는 양력 원단(元旦)은 명절이 아니라고 하는 집이 많고 명절에 고향을 찾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러나 양력을 받아들이고 옛 풍습을 거기에 겹치게 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것을 상정하고 고향을 찾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명절이 아니라도 고향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중요한 주제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그렇고 호머의 <오디세이아>의 주제의 하나가 그렇다. 우리 현대 문학에서도 같은 주제는 흔히 찾을 수 있지만, 그중에도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것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리야" 하고 고향을 말한 정지용의 '향수'일 것이다.
그러나 향수에도 불구하고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정지용이 고향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곳을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에 <그대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있지만, 이 제목은 이러한 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고향을 떠나 외지의 삶을 쉽게 접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고향은 사실의 고향과는 다른 아름다운 꿈으로 바뀐 곳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울프의 경우에도 이러한 사정이 다 해당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의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돌아가 본 고향이 옛날의 조용한 시골이 아니라 부동산 등 돈벌이에 정신이 없는 투기 업자들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조건이 그렇지 않더라도 시골이 아니라 도시가 그리운 고향이 되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보인다.
고향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상적인 일을 너무 심각하게 해석하는 것도 맞는 일은 아니지만, 그의 고향에 대한 생각은 고향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심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고향 또는 그와 비슷한 향토에 대한 언급은 하이데거의 글 도처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시인의 회상'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 횔덜린의 '귀향'을 해설하는 글이다. 여기에 나오는 흥미 있는 말의 하나는, "시인이 고향에 돌아와도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정지용의 다른 시 '고향'에 나오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와 거의 같은 말이다.) 하이데거는 한 발 더 나아가, 고향 사람이라고 반드시 고향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들도 고향에 거주하면서, 고향에 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고향에 있다는 것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질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진리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가까이 갈 수는 있으나 드러내자마자 다시 스스로를 감추는 계시(啓示)이다. 이 진리-고향의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의 사명은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도 그가 시로 표현한 그 진리를 다시 놓치게 되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의 삶에서 그것을 되살려 내야 한다.
그만큼 고향의 본질을 알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달리 보면, 하이데거의 고향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그것이 지나치게 간단하고 도식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진리를 그 깊이 속에서-삶의 현실의 실감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념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향은 사람이 사는 환경을 조화된 하나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슈바벤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죽어서도 그곳에 묻혔다.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들에 봉직하면서 그는 시골에 집을 두고 그곳에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가 그리는 고향의 이미지도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고향 그리고 사람이 살아 마땅한 곳은, 대지를 느낄 수 있고 하늘이 보이는 자연 속의 공간이다.
반 고흐의 구두의 그림을 해설하면서, 그는 그 구두의 의미를 농촌 환경에서의 삶을 집약해준다는 데에서 찾았다. 구두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의 힘든 발걸음, 그 아래 느껴지는 대지, 대지 위로 부는 바람, 수확에 대한 불안, 기근을 피하게 할 수확의 기쁨, 태어남과 죽음의 체험 등을 두루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자연 속의 삶의 느낌을 보다 확대하여 집짓고 삶의 터를 마련하고 하는 일들을 설명한 글에서 그는 사람이 땅 위에 사는 것은 "대지, 하늘, 신적인 것,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긴장과 화합의 관계에 있는 이 네가지 요인들은 농촌의 촌락에서 하나로 구성되고,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삶의 기초가 된다. 1951년에 쓰인 건축에 관한 이 글에서 그는 전후의 주택 부족 사정을 언급하면서, 주택이 없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주택이 없다는 것만이 아니고 지상에 거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집을 짓고 사는 데에서 얻는 교훈은 거주를 넘어 삶의 바른 방향을 잡는 데에도 관계된다. 지상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은 존재의 부름에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비단 집짓는 데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일에서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 형이상학적 요구가 아니다. 말하고 행하고 만드는 모든 일에서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주어진 사실적 조건과 진정한 인간적 요구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또 다른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1차 대전 중 젊은 나이에 전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자결한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 '겨울 저녁'이다. 이 시는 단순히 집의 묘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이데거의 해석으로는, 그 집은, 인간이 지상에 거주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집이다. 이 칼럼의 좁은 지면에 그것을 인용하는 것은 조금 어색한 일이지만, 그 시를 번역하여 인용해보기로 한다.
'유리창으로 눈이 내리고/ 저녁 종소리 길게 울려온다./ 집은 잘 정돈되어 있고./ 여러 사람을 위하여 상이 차려져 있다,/ 어두운 길을 방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와 멈추어 선다./ 지구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은혜의 나무가 금빛으로 피어난다./ 방랑자는 조용하게 안으로 들어온다./ 아픔이 문지방을 돌로 굳혔다./ 탁자 위 맑은 밝음 가운데,/ 빛나고 있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다.'
이 시가 그리는 집은 안식처로서의 집이다. 집은 시간의 순환에 맞추어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준비된 끼니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성찬(聖餐)과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선물이면서, 어둠과 방황의 열매이다. 어둠과 방황, 불가피한 존재에 포함되는 균열을 받아들이는 아픔으로 하여, 집은 하나의 삶의 공간으로 굳혀질 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그의 공식에 따라, 네 개의 요인-땅과 하늘과 신적인 것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져서-천지인신(天地人神)이 합일하여-이것이 성취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삶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니만큼, 이 시는 반드시 트라클이나 어떤 특정한 시인의 개인적인 심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시인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심성으로 삶의 근원의 부름에 답하는 것을 대행한 것일 뿐이다. 이 시를 설명하는 글의 제목은 '언어' 또는 '말'이다.
트라클의 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말이 말하는' 현상이다. 참으로 근본적인 시는 말이 말하는 것을 듣게 한다. 여기에서 '말'은 인간 역사의 신비로운 소산이고 세계에 작용하는 로고스이다. (여기의 로고스는 기독교 성경의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것에 비슷하다.) 사람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이러한 인간 존재의 원형의 부름에 답하여, 사물들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하고, 세계를 드러내어 그 안에서 사물들이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한다.
말이 많은 것이 사람의 세상이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상황은 말로써, 행동으로써, 급한 일에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 이 대응책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의 쉼 없는 연속은 존재론적 진리를 벗어나기 쉽다. 그때, 그것은 삶의 문제를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한다. 오늘날의 삶에 차고 넘치는 것이 정보와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계략이다. 그것을 인간의 삶에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더러는 그것을 세계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에 이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계절의 순환을 지켜 고향으로 돌아가던 옛 습관은, 다시 생각해보건대, 이것을 회상하는 의식(儀式)이었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 경향신문, http://media.daum.net/life/newsview?newsId=20150101211906811
- 편집하는 말,
"고향"은 또 다른 말은 "실향"이겠다. 내겐 "고향"이 없다. 단지 부모님께서 계시고 또 내 유년 시절 기억들을 갖는 대전이거나, 학창 시절을 줄곧 보낸 인천이거나, 또 아니면 첫 직장생활을 보낸 그 춘천과 강원도, 그리고 청주와 천안 사이, 또는 서울과 일산 사이 정도...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 찾은 몇몇 이미지들은 한밭도서관이거나, 제주도의 풍광 아니면 여수 밤바다와 강원도의 힘 따위였을까? 아마도, "고향"의 적확한 의미는 부모님이 또 아닐까...
어쩌면 내게 "고향"은 현재 살고 있는 일산이 제일 가깝다고도 본다. 아람누리가 있고 호수공원, 또 파주출판도시까지 이르는 풍경들... 아니면 파주가 또 다른 고향의 이미지를 닮은 것도 같고.
"고향"을 찾는다는 건 한마디로 '정체성'에 가깝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내 '정체성'은? 여전히 글 속에서, 음악 속에서, 또는 미술관 한복판이거나 광장 한켠에 머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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