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그래도, 한가위...
- 오늘의 편지,
[박범신의 논산일기] 소설보다 더 극적으로 변한 우리네 풍경
너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소설 같다" 하거나,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소설 쓰냐" "소설 쓰고 있네!"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혹시 기억하시는가.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적 이야기보다 앞서가던 시대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이제 전설에 편입돼가고 있는 중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독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작가들은 현실의 이야기에 독을 조금 타서 더 극적으로 그려냈다면 오늘의 작가들은 독한 현실의 이야기에 물을 타 중화시켜 쓰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쓰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렇게 작가를 비난할 것이다. "에이, 아무리 소설이지만 그런 뻥이 어디 있어!"
예컨대 근래 일어난 "포천 고무통 살인사건" "시의원 살인교사사건" "유병언 변사사건" "병영 내 집단폭행에 따른 사망사건" "세월호유가족에 대한 무차별적 인격모독" 등이 그러하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그 작가를 신뢰하겠는가. 일찍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인륜적 일들이 자고나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싱크홀 위를 걸어가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반세기 넘게 야수적인 헌신으로 일궈낸 우리의 번영이라는 것이 지상 위엔 번쩍거리는 황금의 빌딩들을 다투어 세우면서, 그러나 바로 그 발밑엔 아수라의 거대 싱크홀을 만들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불안하고 두렵다. 지금 내 발밑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싱크홀만 해도 무서운데, 지도층이나 우리 개개인들이 여전히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무섭다. 가령 '세월호 정국'을 겨냥해 "이대로 가면 우리는 저성장에 주저앉고 말 것이다"라는 식으로 공공연히 단언하는 고위관료의 국민에 대한 불호령이 그렇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명백한 협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불안해져서 세월호유가족을 왕따 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저성장만 극복하면 모두 행복해지는가. 위에 열거한 반윤리적 사건들이 '가난'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독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전 국민을 약육강식의 글로벌경제체제에 굴복시켜 줄 세우기 위한 지도층의 애국적 가짜모드는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공'과 '생산성 제고'에 의해 오로지 협박받아왔으며 그로 인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길 포기, 삶의 질을 송두리째 희생해온 전력을 갖고 있다. 당신들이 가리키는 물질주의를 좇아 살다가 본성과 달리 우리 스스로 부모형제, 이웃을 버리고, 나아가 다른 지역 다른 정파 다른 계급을 오직 적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관에 소속되고 만 것이 현재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이런 식의 자학적 욕망을 계속 따라가는 길 끝에 과연 행복한 미래, 품위 있는 삶이 있기는 있느냐고 묻고 싶다.
교황께서 먼 동방의 나라로 와 우리 모두에게 충고한 한마디가 오늘도 가슴에 사무친다. "물질주의를 벗어나라!" 그 말이 사무치게 들리는 것은,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할 책무를 앞장서서 지고가기로 자원한 지도층은 물론 그들에게 붙어 과실 한 접시라도 얻고자 한 우리 모두를 겨냥한 말이라는 걸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교황에게 몰려든 백만 인파에게서 들린 것은 '신음'과 '비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비'에게 일러바치러 가는 수많은 아이들 같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이는 본래 우리의 '아비'가 아니다. 이 땅의 아비들이 제 자식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 땅의 아비들이 제 후손들에게 행복해지는 길을 일러주지 않기 때문에 먼 곳에서 날아온 다른 아비에게 달려가 우리는 무릎 꿇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이에게 바란 게 '세월호사건'이나 기타 갖가지 현안의 '해결'이었겠는가. 단지 더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겠는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따뜻한 '격려'와 '위로'였을 것이다. 높은 제단에서 스스로 내려온 이가 진실로 상처받은 우리들의 손을 잡는 따뜻한 제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빛나게 할 윤리적 책무와 함께 제 자신을 갱신시킬 본원적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전제조건은 격려와 위로이다. 이미 약육강식의 글로벌경제체제에 너무 깊숙이 이입됐으므로,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은 행복으로 가기 위해 삶의 방향을 담대히 수정할 여지를 거의 빼앗겼으므로, 더 넓고 깊은 품을 가진 '아비'의 가슴에 기대어 위로받고 그 위로와 격려를 통해 용기를 내고 싶은 것이 지금 우리들 삶의 현주소다. '경제' 어쩌고, 한사코 우기면서 짐짓 '남의 다리'를 긁는 전술은 질린다.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아비'를 만난다면 우리는 언제든 아침햇빛을 만난 어린 송아지처럼 다시 일터를 향해 뛰어갈 수 있다. '신명'이라는 에스컬레이터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발성이 없다면 모든 정책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국민의 3분의 2가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등학생의 48%가 10억원을 얻는다면 기꺼이 감옥에 가도 좋다고 대답하는 나라에서 정부주도의 성장정책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동안에도 세계 유례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이다. 진실한 위로와 신뢰와 나눔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해 계속 성장하자는 말인가.
가을이다. 한가위도 오고 있다. '만월'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 서서 상대편을 만월이라고 우러르는 건 옳지만 더 많은 걸 가진 이들이 '이것이야말로 만월'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옳지 않다. 보이는 반면이 꽉 차 있을 때도 달의 절반인 그 이면은 춥고 어둡기 때문이다. 그늘을 먼저 보는 것이 지도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 미디어다음, http://media.daum.net/editorial/newsview?newsid=20140903214008695
- 편집하는 말,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첫날,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녀왔고 자전거를 타고 잠시 병원을 들렀고 또 바깥에 나가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내일까지 일산에 머물게 될 이번 일정은 어쩌면 명절이랍시고 오히려 아무 계획도 없었던 모양이구나...
한가위를 맞는 심경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집안 일, 회사 일, 또 사회의 어수선한 풍경들까지도... 그래도 한가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풍요로움이 이 시대에 가능하다면 그건 또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지... 하며
달래곤 하던 술병 하나를 꺼내들까도 생각해본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이 술버릇도 좀 고쳐야 할 텐데 말이지,
느즈막히 뉴스레터랍시고 올려놓는 짧은 글들에 대해 무어라 감히 말할 용기가 있을까도 싶고...
아무튼, 명절을 맞아 마음과 몸만이라도 좀 평안히 휴식을 갖는 시간들처럼 재충전을 할까도 모르겠고,
또 그렇게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유일한 미덕이라도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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