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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박정대, 고독?

단테, 2014. 4. 13. 14:16

- 박정대, '모든 가능성의 거리' (문예중앙, 2011)   

    

  

...

     

   

지독히도 난해하게 쓴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도 짐짓 그가 혹시 '문학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하여 예전 깊은 새벽의 헐거워진 옷차림들과 누추한 방바닥에서 주고 받던 읊조림 따위가 연상됨을 애써서 피하진 않는다. 다만, 이 병이 과연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 이건 좀 문제가 된다. 

  

노스탤지어, 체 게바라, 니힐과 리버럴의 줄타기, 같은 낱말들이 떠오른다. 

  

내게 박정대식의 감수성을 기대해야 한다면? 단언컨대, 나는 시인으로서의 소질이 한참 못된다. 오히려 민주주의, 살림살이, 잘해봐야 '창작과 비평'이거나 '문학과 사회' 같은 타이틀 안에 갇혀 어줍잖은 개똥철학을 다듬는 편이 스스로한테도 이웃들한테도 훨씬 더 이익일 테지... 아무튼, 

   

지극히 단단한 시어들 앞에서는 그다지 주눅들지 않음에도 '병든 시인'의 모습 앞에선 불편하다. 문학회 9기들 생각이 난다. 소설을 쓰던 그도, 희곡을 쓰던 그도 모두 오버랩이 되는 순간... 내가 유일하게 '결별'하고자 했던 그것들과의 조우, 같은 생각이 들어서... 

  

  

...

  

   

...

    

  

- 음악은 천사들이 연주하고 천사들은 내가 만들지 

   

      

***

      

  

새들의 북 호텔 

       

   

북 호텔에 새벽이 깊다 

 

새벽은 하늘로부터 천천히 하강하여 지상의 뿌리에까지 닿는다 

 

천사들이 북 호텔로 내려오는 새벽이면 새들의 날개 북 호텔의 환한 지붕이 된다 

 

고독은 한 마리의 감정, 지평선 위에 걸쳐져 있다 

 

나는 새벽마다 조그만 사다리를 타고 2046호로 올라간다 

 

새벽은 아주 늦게 내 방 창가로 와서는 끝내 방 안까지 파고든다 

 

나는 세상을 오래 떠돌다 온 바람의 외투를 벗기고 그녀의 차가운 손을 녹이며 따스한 공기의 품속으로 넣어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내리는 눈발을 조금 받아 주전자에 넣는다, 물이 끓는다 

 

물이 끓는 밤, 난로는 북 호텔을 위해 한 통의 뜨거운 목욕물을 덥히고 북 호텔이 따스해질 때 지상으로 내려온 새들의 발톱은 착하고 부드러워진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 한 모그므이 담배연기, 한밤의 축구경기 

 

북 호텔은 세상의 북쪽에 있어서 언제나 북 호텔이겠지만 나의 북 호텔은 하얀 눈발과 추위를 피해 온 새들과 난로와 음악이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숙소가 된다 

 

눈보라에 뒤덮인 새벽 열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와서는 따스한 커피로 몸을 녹이는 곳 

 

한 잔의 술로 영혼을 덥히고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 

 

온 세상을 다 떠돌아 온 영혼이 허름하고 두툼한 외투 같은 육체를 걸친 채 그대로 투숙하는 곳 

 

여기는 내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새들의 북 호텔 

  

  

***

       

  

감정 공산주의 

   

 

  감정이 확장되어 감저으이 무한에 당도할 때도 감정 공산주의는 태동하지 않는다,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평선에 당도했을 때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나는 자생적 감정 공산주의자 

 

  감정의 무한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은 나의 본질적 욕망일 뿐 소립자의 세계사 그 어느 페이지에도 감정 공산주의는 기록된 바 없다 

 

  담배를 피워 물고 저녁마다 감정의 확산을 꿈꾸는 나는 자생적 감정 빨치산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온 세계를 나의 감정으로 물들이려는 나는 극렬 감정분자 

  

  확장된 감정이 끝내 무한의 감정에 당도했을 때에도 나의 감정 공산주의가 한 일은 별을 향해 센티멘털 로켓을 발사한 것 

  

  그러니 언젠가 그 로켓이 또 다른 별에서 감정의 동무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리라는 걸 안다 

  

  본질적 고독이 세계를 물들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

   

  

누구든지 작가의 삶을 산다 

 

 

  육체는 슬프다, 오 나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노라 

 

  태풍 전야, 말발굽처럼 흔들리는 나뭇잎들, 반복적인 바람, 반복적인 율동, 전복되는 구름들 

  

  누구든지 작가의 삶을 산다 

  

  가령, 파리의 밤 

 

  청바지를 입은 파리지엔의 엉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밤, 연애하고 싶은 밤 

 

  묻노니 구름이여, 그대는 뜨거운 청춘을 바지 속에 숨기고 어디로 그렇게 하염없이 가고 있는 것이냐 

 

  바람의 길목에 서서 생각하노니, 삶은 출렁이는 것 국적을 버리고 흔적을 버리고 결국은 청바지 속 백야의 숲속으로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 

 

  삶은 스며들어 타오르는 것 광활한 호숫가에 청춘의 구름 같은 천막을 세워두고 혁명처럼 사랑을 도모하는 것 

 

  고독의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노을의 품에 풀잎처럼 쓰러지는 것 쓰러지면서도 사랑에 복무하는 것 

  

  오 육체는 슬프다, 나는 세상의 모든 거리를 헤맸노라 

  

  가령, 파리는 내 생의 식민지, 나의 情婦 

  

  오 나의 불란서여 나의 파리여 이리로 오렴, 누군가 쓰다 버린 이면지 같은 콩코드 광장을 나는 글을 쓰듯 걷는다 

  

  그럴 때 나는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따라 흐르는 에밀 쿠스트리차 

  

  나는 세르주 갱스부르, 나는 짐 모리슨, 나는 짐 자무시 

  

  나는 걸어가면서 쓰는 자, 나는 걸어가면서 읽는 자 

  

  나의 발걸음은 나의 시, 나의 숨결은 나의 음악 

  

  나의 움직임은 오롯한 한 편의 무성영화, 나는 내 생의 감독 

  

  내 침묵의 총감독 

  

  그러나 육체는 슬프다, 오 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었노라 

  

  가령, 북반구의 저녁을 다 지나와 청바지를 입은 파리지엔의 엉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밤

  

  오, 아, 음악 같은 감탄사를 내뱉고 싶은 밤 

  

  그러나 나는 나의 經夜에 나의 죽음 곁에서 나의 삶을 밤샘하는 유령 

  

  설령, 내가 러시아에서, 리스본에서, 교토에서, 서울에서 유령처럼 걷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파리의 밤, 콩코드 광장의 내면을 서성이는 유령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파리지엔의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생의 염탐꾼 

 

  그러니까 나는 내 연민의 식민지 

 

  그래서 오 육체는 슬프다, 나는 세상의 모든 밤을 뚜벅뚜벅 걸어서 지나왔노라 

 

  파리의 밤, 검은 외투처럼 펄럭이는 파리의 밤 

 

  콩코드 광장 위엔 인공위성처럼 빛나는 북극성 하나, 나는 검은 사막의 밤에 별을 바라보며 길을 떠난 무모한 베두인족 

 

  빛나는 모래알로 밥그릇을 설거지하던 사막의 순례자 

 

  어쩌면 나는 캄캄한 그대의 내면을 콩콩콩 횡단하던 한 명의 베트콩, 나는 그대의 호치민, 나는 어쩌면 그대의 베트남 

 

  그러나 끝내 나는 나의 공화국, 나는 나의 인민, 나는 나의 작가 

 

  쿵쿵쿵 누군가 세계의 내면을 걷는 소리 

 

  기사 장 드 파 

 

  조르주 페렉 

 

  누구든지 작가의 삶을 산다 

    

    

***

  

    

분리된 시의 의자 

   

   

  짐 자무시, 백야 증폭기, 얼굴에 콧수염을 붙인 천사,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구름 몇 장, 투명하고 불투명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작은 상자, 기타 까마리 공작,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루시다, 마법 환동기, 축소 복제기, 그림 확대기, 소형 복제기, 콧수염에 탑재된 꿈 복제기, 마음을 보기 위한 상자와 유리, 오목거울과 볼록거울, 검은 볼록거울, 굴절 실험을 위한 측면 유리가 부착된 상자, 인공의 눈, 견고한 유리관, 굴절 각도를 측정하기 위한 반원형 프리즘, 어두운 방에서 햇빛을 몇 시간 동안 같은 곳에 받게 해주는 일광 반사 장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미셸 우엘벡, 스테판 말라르메, 오노레 드 발자크, 장 필립 투생, 모든 가청주파수대를 의미하는 백색소음, 햇살 가득한 지하 창고,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 잎이 보이는 다락방, 폭설 딸기밭이여 영원하라, 백남준의 노트 시베리아 호랑이, 나뭇잎 두 장 담배 한 대 소금에 절인 청어 한 마리,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조르주 페렉, 구름들, 에밀 쿠스트리차 

 

 

***

 

       

디베르티멘토 

  

  

  창가에 앉아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면 발바닥을 간질이고 싶어진다, 생각을 너무 골똑히 하니 뒤통수에 뿔이 돋지 

 

  어두워지는 창가에 앉아 반가사유상 흉내를 내다 보면 발바닥이 근질근질해진다, 아 누가 내 발바닥을 좀 간질여다오 

  

  술 마시고픈 저녁이다, 갸륵하게 어두워져가는 

 

 

***

 

   

삶의 가장자리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거겠지 

오직 드높고 푸른 자유 

 

파미르 고원의 삶과 고독 

 

    

***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

   

   

  이 시는 이자벨 아자니의 어떤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구름에 대한 응시, 이자벨 아자니라는 말이 주는 현실적 한계와 모든 가능성이라는 말이 주는 불투명한 무한, 지상의 열기를 다 지나온 뜨거운 구름 한 장이 여기에 있다


  시간이 제공하는 통증, 무한의 고독이 여기에 있다


*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 선언문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아자니 거리의 모든 것(영혼에 관한 것은 부칙에 명기)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이 거리를 제외한 것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으로 충만해야 한다


  사랑의 유일한 결집은 그녀의 소환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랑의 파괴 또한 그녀의 우울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관계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은 아자니도 알 수 없이 진행되고 몰락하며 수시로 재생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수시로 야만적이고 때때로 폭력적이므로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은 야만과 폭력에 더 큰 욕망과 폭설로 맞설 것이며 그리하여 아자니 거리를 제외한 것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양의 질로의 변화를 거쳐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육체를 무기로 영혼의 사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먼저 생의 시공간을 이동한 영혼들의 호적부를 다시 만들며 이곳이 아닌 저곳에 영혼의 공화국을 완성할 때까지 우리는 게릴라처럼 유연하고 신속하게 모든 사랑의 미래를 선점해야 할 것이다


  점령된 것들의 비상연락망은 비 그친 처마에서 빛나는 거미줄을 따라 이어질 것이며 세계 자본 흐름의 교란을 통하여 인류의 자생적 열망과 꿈들이 바람을 통해 교류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심은 고독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의 열망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박해하지 말며 술을 마시는 사람 또한 그렇게 대해야 할 것이다


  음악은 악기 속에 있지 않고 그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며 음악은 또한 그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악기 속에 있음을 후천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을 반드시 두 개 이상을 가져야 하며 이름에 걸맞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테네 혹은 리스본과 수시로 연락하여 그쪽의 날씨를 기록하고 날씨의 뒤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쁜 습기들의 동향을 보고할 것이며 담배연기 감별사를 파견하여 담배연기의 성분을 파악하고 빗방울 조율사를 통하여 세계의 음악을 조율해야 할 것이다


  중력의 문제, 복제인간에 관한 문제, 외계 우주생물체와의 연락 문제를 위해 거미줄 끝에 안테나를 달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 자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계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분류될 것이다


  잉여가 수많은 객체를 이루는 무의미한 현실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잉여가 스스로 주체로 탈바꿈하는 곳에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며 타자에 대한 신성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스스로를 복원하려는 자에게만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은 복무할 것이다


  - 부칙 : 영혼에 관한 것은 영혼의 속기록으로 따로 기록함


*


  이 모든 게 어느 날은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삶이 될지도!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나는 과연 어떤 바람의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까


  모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 역시 존재한다


  모든 가능성의 거리에 그대가 있다


  나는 지금부터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혹은 그대 속에 있는 모든 가능성의 거리


*


  비가 내린 후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대기


  내가 처음부터 그대를 선점하기 위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리스본 쟁탈전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몇 점, 화가들이 그린 몇몇 구름에나 남아 있는 인류의 세계사, 생태발생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류는 최고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은 바람이 고요히 나뭇잎을 흔들듯 어느 날 나의 들창을 두드리며 다가온 그대의 방문이었다


*


  거리에는 뜨거운 바람이 분다,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 그대와 나의 거리, 모든 게 너무 가깝고 모든 게 너무 멀다, 나는 모든 거리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나는 모든 가능성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자정이 넘어서야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태양에 의해 달아올랐던 육체를 식히며 나는 비로소 달과 나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티핑 더 벨벳'이라는 말을 나는 '티핑 더 문'으로 바꾸어본다, 달과 나의 거리에 그대 숨결 같은 바람이 분다


*


  그대의 영혼을 만지며 나는 그대의 육체를 상상한다, 그대의 육체는 하나의 세계처럼 거대하고 한 편의 교향곡처럼 웅장하다, 대륙을 말 타고 달리던 나는 그대의 육체에 와서 드디어 멈춘다, 섬세한 육체의 대지, 나는 이렇게 웅장한 대지를 본 적이 없다, 그대의 육체는 내 앞에 무한처럼 펼쳐져 있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나는 무한의 육체 앞에서 비로소 인간의 겸손을 배운다, 이곳에 당도해서야 나는 비로소 고향의 대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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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목덜미를 바라보는 일, 그대의 윤곽을 바라보며 그대의 본질을 상상하는 일, 나의 유일한 관심은 한 영혼이 또 다른 영혼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저녁 불빛들로 가득하다, 그녀가 나무들을 무수히 소모하는 소설을 쓰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 소설 속 불빛들은 불안하고 따스하고 깊다, 지나가지도 다가오지도 않은 시간의 일부를 그녀는 배고픈 암고양이처럼 슬쩍 파헤친다, 시간의 속살이 보인다, 거기에는 '우리'라는 인간 존재가 있다


*


  나는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의 속살을 본다, 내가 만지면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거기에 세계의 비밀이 있다


*


  오후 세시의 적막 속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너는 아직 세계의 비밀을 모르고 나는 아직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비밀을 모르고 그대 호흡의 비밀을 모른다, 시간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오후 세시의 고요 속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울란바토르에는 지금쯤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을 것이다


*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어떤 예감, 즉 다른 누구에 대한 가능성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 나오는 쿠쟁의 말이다, 파리, 그대는 로맹 가리를 낳지 않았지만 그를 끌어안았고 그리하여 아자르라는 아름다운 괴물을 탄생시켰다, 글을 쓸 때 책상에서 보이는 벽에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나 풍경 사진을 붙여두고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로맹 가리와 나의 닮은 점이기도 하다


*


모로코 영화제에서 아버지의 나라 알제리 의상을 입은 이자벨 아자니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투명하고 정결한 외투 속에 뜨거운 태양의 육체를 감춰두고 있다, 태양의 육체는 사막을 통과한 고독한 영혼의 외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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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는 영혼의 이방이다, 내가 이 세계를 끊임없이 이방인으로 떠도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열렬한 포옹, 인간은 가끔씩 그런 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


  가령 그 거리에는 눈이 내렸고 단단한 회식 벽들은 눈발에 젖어 있었다, 따스한 건물 내부의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며 난로의 불꽃이 타오르는 시간, 건물 외벽을 따라 흩어지던 눈송이들은 생의 슬픔을 반추하듯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망가진 고립의 풍토에 사람들은 관습처럼 그들이 살 집을 지었으므로 고독을 틈타 잠입할 내면으로 향하는 길은 처음부터 봉쇄되어 있었다, 눈발이 쏟아지는 거리와 불꽃이 타오르는 방, 그 사이에 인간은 외계인처럼 오롯이 존재했던 것이다, 외부와 내부 사이의 거리, 삶과 죽음 사이의 심연, 고독의 연장선상에서 흐르던 별들에 대한 오랜 관찰과 기록, 가령 인간의 내면으로 쏟아지던 그 많은 눈발들을 녹여줄 체온의 섭정이 인간에겐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인을 발명한 것은 자기보존 욕구의 최정점에서 나온 생존의 문제였다,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비밀결사가 생겨난 것은 그러니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아주 자연발생적이고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개체의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가 사랑을 이루었다, 가끔은 날씨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랑은 날씨에 따라 변했다, 물을 가둔 댐의 수량과 발전소의 발전량에 따라서도 변했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아무도 사랑의 질량과 열량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도 그 문제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세계의 날씨는 개선되기 마련이니까


*


  그대는 나에게 호텔 노르망디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맥주는 차가웠고 그대의 웃음은 따스했다, 마치 해변을 지나온 것 같았다, 우리들 생의 추억의 보트, 그대는 나에게 호텔 노르망디의 가사를 읽어주었다, 노랫말에 실려 들려오던 트럼펫 소리, 파도 소리, 데이빗 보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대의 따스한 미소가 나를 보위하고 있었다, 우리들 생의 추억의 보트, 노르망디 여관


*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은 노르망디 여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노르망디 여관으로 가을이면 바람이 불고 겨울이면 눈발이 흩날렸을 것이다, 수많은 생들이 노르망디 여관으로 몰려들었다가 또 썰물처럼 노르망디 여관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노르망디 여관의 숙박계에 적힌 그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우리의 이름은 또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대기권의 사물들은 질량과 시간과 공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감소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중력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


  다시 알제리 의상 속의 숨어 있는 이자벨 아자니의 육체에 대하여 생각한다, 알제리 의상이 감춘 것은 이자벨 아자니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생각, 나는 다시 이자벨 아자니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해본다


  세 개의 세계, 세 개의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세 개의 고독


1.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


2.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의 없음


3. 모든 가능성의 없음의 없음 그리고 불가능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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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시선 6)

저자
박정대 지음
출판사
문예중앙_ | 2011-05-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천사가 세상으로 내려와 직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겪는 일들과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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