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
.
.
난해하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만한 이 명문을 문학입문서에서 다시 찾아 읽는 기분은 좀 남다르다.
한때 '지적'으로 그한테 사숙, 또 극복해야 새로운 시를 열 것 같은 그 어떤 믿음 같은 게 있었지...
지금 드는 생각,
꽤나 어려운 전문용어와 인용된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점'과 '입장'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그의 글이 훌륭하고 잘 열려 있는 텍스트라는 거다.
- 우리에게 문학이란 '의사 소통'의 일종이다.
- '문학'의 개념은 당대의 의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쿤이 말한 '패러다임'과 같은 것.
-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무엇이 문학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그 '범주'의 문제.
- 나는 시를 쓸 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 내용 자체가 형식
- 문학은 현실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 무엇보다도 문학과 정치는 동시대의 말을 공유하고 있다.
-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 나는 암중모색중이다. 전망은 훨씬 후에 생길 것이다.
- 세계는 모순의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의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시쓰기는 흡사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을 닮았었지...
- 하지만, 이미 또 많은 거리를 행보한 궤적의 역사는 지금의 그를 어찌 형용할까 막막하게 만든다.
그의 말처럼 시인은 시대와 함께 변해가는 건가 보다.
한마디를 굳이 덧붙이자면, 그의 심리 근저에 깔린 그 '니힐'은 못내 켕기는 대목. 왜 '화엄'의 세계,
또 다른 정신세계로의 천착들을 꿈꾸며 그의 빛나는 통찰력이 난해한 기호로 은둔해버렸을까?
사상과 쟝르의 탐험 끝에 그가 발견해낸 가치들이 과연 초기작들처럼 '시적'이거나 '정치적'일까?
글쎄다... 감히 아니라고도 말할진대, 그도 무척 잘 알고 있는 그 '자유'는 이미 가짜다. 솔직하게, ;
김명인의 시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 상처를 주며 공격을 하였고 정작 적들을 이긴 적 없다.
오히려 그 적들은 수수방관한 채 훨씬 더 높은 곳까지 올라 앉아 우리들을 비웃고만 있을 뿐...
과연 승리를 위한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그와 함께 '80년대 시단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한 시인,
박노해가 문득 생각난다. <참된 시작>을 꺼낸 그도 어느덧 "생명" 언저리만을 노래하는 요즘에......
문학이 한 시대에서 그 소임을 다했을 때, 문학은 어쩌면 그 펜을 접어야만 하는 것인가 보다.
아니면, 아예 다른 작가의 입을 통해 다시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
.
.
'단테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지, 2013년 (0) | 2013.05.29 |
---|---|
새로운 아침, (0) | 2013.05.27 |
학습, 저작, 계획 (0) | 2013.05.25 |
도서관에 죽때리며, (0) | 2013.05.25 |
창비, 여름호 (0) | 201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