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메모

계간지, 2013년

단테, 2013. 5. 29.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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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간지의 계절이 왔다. 봄호조차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채 여름호 소식을 듣는 금년은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끝났고, 여전히 진보적이지 못한 정치권력과 약육강식만을 자행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더욱 공고해지는 동안 사회과학은 오히려 제 무능을 못견뎌하며 행보 또한 머뭇대기만 하고 전망은 따라서 불투명해진다.

기실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후, 전 인류에 걸쳐 이에 대한 거의 유일무이한 대안으로 합의된 바 있는 사회주의는 그 원대한 포부와 숭고한 도덕적 가치가 갖는 자발적 희생과 헌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꿈꾸어온 공산주의는커녕 마치 봉건식 전제주의와도 닮은 흉측한 몰골로 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에 대한 도취와 찬미 속에 일부 양심있는 세력들의 고언에 따르자면 증오에 가까운 집단적 광기마냥 아주 끔찍하게도 버려졌던 지난 20세기의 마지막 10년, 자본주의는 결국 21세기에도 가장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군림하고 있는 중이며 또 게다가 스스로가 진화하는 중이기까지 하니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이들한테 이처럼 자기기만에 찬 굴욕감을 안겨주는 시절이 또 있었을까도 싶다.

하지만 뉴욕과 이집트 그리고 유로존과 노르딕은 공히 그 각각마다 거대한 화두이자 롤모델의 일부로써 인용되고 새로운 사회과학의 정진을 고대하는 중이며, 적어도 민주주의를 보다 더 발전시키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지속가능성의 경제체제에 대한 모색만이 이 질곡의 시대를 극복할만한 유일한 대안임은 이미 상식적 차원으로까지 파급된 하나의 시대정신이요 패러다임으로서 일정한 합의에까지 도달한 상태다. 다만 그 방향에 걸맞는 속도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지세력을 진용으로 갖추고 이를 실천하느냐는 전적으로 인류 전체의 몫일 테고, 엄연히 보수와 진보 공히 이에 대한 시각차 내지는 온도차에 따른 다양한 관점과 입장들이 백가쟁명하고 있는 요즘이다.

마르크스가 탄생한 배경에는 당대 최고의 고전경제학과 독일철학이 있었음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새로운 사회의 논리 역시 현재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학문의 성과들을 자신의 주요한 발판들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는 점은 이미 분명하다. 애시당초 르네상스와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역사적 변곡점들의 배경적 근거가 종교와 과학, 문학과 예술인 것처럼 이 시대의 가장 민감한 촉수들 역시 어쩌면 그 이름들이 언어학, 심리학, 정치경제학과 현대철학 또는 물리학과 유전공학 내지는 경영학 따위로 더 분화되고 좀 더 고도화되었을 뿐인 것이지 그 본질 자체는 예전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인류의 본능 중 하나가 발명이라면, 21세기는 이미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내지 문학 또는 예술의 전반에 걸친 유구한 노력을 통하여 인류 스스로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고 이를 증명해야 할 때다. 낡은 패러다임이 스스로 시대의 권좌에서 물러나는 일은 결코 없다. 모든 필요가 발명을 낳고, 또 인류는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 과제를 상정하는 법이므로.

사회과학이 갖는 현재적 좌표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렇다손쳐도, 인문과학이 훨씬 더 답보상태임은 분명해진다. 이는 두 과학이 갖는 태생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특히 철학의 상태는 과거의 위대한 이정표들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크게 진전된 성과가 있나 모르겠다. 주어진 특성이 워낙 심오하고 또 난해해진 까닭들도 있겠는데 그만큼 명료하게 설명하고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심한 난독증에 걸린 것마냥 온통 시끄럽고 모순투성이인 사회현상을 진단하고 게다가 처방을 마련해야 한다는 일은 원래가 그만큼 힘들고도 복잡한 일일 테다. 문제의 근원이 그만큼 구조적이고도 복잡한 가치체계로 얽혀진 현대사회의 병리현상 중 한 단면과도 똑같기 때문에.

철학은 그렇다치고, 또 문학이다. 김광석이 노래한 것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애달픈 양식이 되고픈 이 특정한 예술이자 쟝르인 문학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사실상 고사상태 또는 불구상태라는 표현이 옳겠다. 특정 작품인 어떤 한 소설의 예로 들자면, 이미 이는 본래의 텍스트가 갖는 의미를 아예 넘나들면서 온갖 또 다른 쟝르들에 의해 또는 스스로의 내부에서조차 각기 다른 형태로 차용되곤 한다. 더구나 음악이나 연극 따위와는 아예 차원조차 다를만한 혁명적 쟝르, 즉 영화가 거의 모든 예술을 흡수하고 또 주변부화함으로 인한 갈등의 골 역시 깊어지기만 한다.

물론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은 또 다른 제도적 차원에서 바라볼 성질의 것이기도 하나, 문학 본연의 임무 또한 그 어떤 측면과 성격이든간에 이미 훨씬 더 압도적인 영화의 영향력 앞에서 아예 시녀 역할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아예 시나리오라는 영화 속 한 부분으로 아예 탈바꿈하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 글쓰기는 이제 시나 소설과도 같은 예전의 문학 쟝르들보다 오히려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업을 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종합예술의 면면을 고려하는 시야까지 확보하게 되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앞서 원래 의미로서의 텍스트가 갖는 힘은 훨씬 더 줄어든 게 사실이다.

이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문제는 무얼까? 첫째, 돈이 안된다. 둘째, 영향력 또한 대폭 줄어든다. 셋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의미와 가치가 갖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 이게 그래서 어렵다. 돈이야 베스트셀러를 쓰면 될 테고, 영향력은 대박을 친 개봉작 한편이면 충분히 족할 텐데, 대다수 작가들은 이런 문제들 앞에 서면 괜시리 모멸감 비슷한 걸 느끼게 된다. 그런 류의 자존심은 과연 무얼 뜻하는 걸까? 그래서 문학과 그 종사자들은 스스로 말할 줄 아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하게 된다.

그 무엇인가에 대해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며 말을 꺼내놓은 계간지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가 그래왔고 또 문학동네 역시 중간자적 위치에서 또 더 분명한 방향에서는 실천문학이 그랬고 어김없이 이번 계절에 꺼내놓는 이야기가 있다. 그 말들을 탐독하고 또 이해하며 수긍하거나 반박하고 아니면 또 다른 화두를 내미는 행위들 모두 이미 문학 편일 게다. 아마도 그럴 게지.

누군가는 단지 명예만을 위해, 또는 지극한 사랑을 애닲게 담아내보고자, 아니면 웅대한 포부를 갖고 인간미에 대한 천착에 심혈을 기울인다거나 또는 지독한 사회의 치부를 고발하고 반성을 일깨운다거나 혹은 더러 고독어린 슬픔을 '언 살이 터져 빛나는' 시처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 모든 당당함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반성이 갖는 진실함 따위들이겠지. 또 그럼에도 말을 아끼거나 에둘러 직유처럼 아니면 은유처럼 파장과 울림이 큰 매개물로 이를 대체할만큼 수줍음들도 더러 있겠지. 그렇지만 늘 가혹하기만 한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절망하겠지. 또 다시 마음을 벼른 채 언어들과 씨름하는 암중모색들일 테지.

그만큼 못다한 말들이란 늘 있게 마련인 법임에도, 여전히 그것들을 찾아 인생을 산책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일은 이미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같은 미련일 테지. 몸이 아닌 마음의 여행은 그렇게 출발하는 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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