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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서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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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로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老姑壇)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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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 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한 채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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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 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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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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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求禮) 곡성(谷城)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 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老姑壇) 마루도 깨운다.
깨어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煩惱) 있거든 저 강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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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홍정선 교수가 칠판 가득히 판서를 한 이 작품.
판서만으로 감동을 준 적은 과연 내 학창시절 중 몇일까?
모처럼 그 한자들을 복원해내 다시 읽어보는 시간... 올해,
역작 중의 역작인 <만인보>를 드디어 완간해냈다는 소식.
싯구에 나오는 화엄사 각황전의 포스가 아직도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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