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o :
* [정치] 안희정 유세 장면,
... 날카로운 마스크 하나만으로 나는 그를 얼마나 멀리 했던가,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정치는 비단 이미지 뿐만이 아니라고...
오로지 진실과 역사에 대한 기백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 [정치] 안희정 항의 장면,
...
...
[新뽕빨이너뷰] 안희정을 만나다.
2010.5.20.목요일
딴지총수
오래 전부터 안희정을 만나고 싶었다. 한 초선의원을 20여년을 보좌한 그는, 정작 그 초선의원이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대신 감옥엘 갔다. 출소 후에도 임명직은 물론 선출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내내 낭인이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케이스다.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런 그가 출마했다.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는 2010년 4월 28일 오후 한 시, 국회의사당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여의도 모빌딩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본지에선 총수와 신짱이 출동했고 안희정은 인터뷰 내내 보좌관 배석 없이 혼자 응했다.
사무실은 참 담담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저렴한 집기에 휑한 공간들. 갑자기 10여 년 전, 부산 국회의원 낙선 직후 방문했던 노무현의 사무실이 오버랩 됐다. 그때도 꼭 이런 느낌이었다.
안: 그런데 생각보다 덩치가 꽤 좋으십니다?
총: 생각보다 덩치가 작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요? 사진이 워낙 산적으로 나와서..
안: 어디더라? 그 인터넷 티비...
총: 예. 한겨레 방송.
안: 네. 연세대 심리학 교수가 나온 거.. 그거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총: 하하. 재미 있었죠.
안: 어, 근데 난 그 주제로 계속 가면 교수님 올 해 문 닫을 같다.. 했었죠.
총: 으하하하. 원래 개인적으로 친한 분인데, 사실 정치적인 분은 아니고 평상시 하던 이야기였는데, 정치적이지 않으니까 그런 이야기도 그냥 있는 그대로 했던 거죠. 근데 그 방송이 그 정도 파급이 있을 줄은 예상을 못 한 부분도 있고.. 해서 접었죠.
안: 그래서 그런지 단어나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시더라구요.
총: 정치적 압박을 평소 느껴본 적 없는 분이시다 보니 오히려 평상시 생각대로 한 거죠. 근데 세상이 요즘 그러나요. 하하. 자, 이제 인터뷰를 시작해보죠. 선거 시즌이라 인물 인터뷰를 하는 타이밍이 아니긴 하지만, 딴지일보와는 처음 인터뷰니까 오늘은 인물 인터뷰부터 시작해보죠.
안: 예.
총: 해서...이제 옛날 얘기부터 한 번 가보죠. 고대 운동권 출신 아니십니까?
안: 예.
총: 근데 제가 어디서 보니까 학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써클을 들어가셨더라구요.
안: 예. 제가 그때 대학교를 갈려고 했던 게 학생운동을 해보겠다고 간 거였기 때문에.
총: 아니 근데 그땐 애잖아요. 애. (웃음)
안: 하하. 네. 근데 사실은 난 고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내가 애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어른이라는 생각을 했지. 고등학교 때 제가 학교를 두 번 제적당하고 한 번은 자퇴를 했고. 그렇게 한 2년을 날백수로 놀다가...
총: 검정고시를 보고...
안: 예. 한 번은 80년에 첫 번째로 학교 제적당하고 나서는 시골 가서 농사일 좀 돕다가..
총: 첫 번째 제적은 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 여러 가지 책을 읽었는데, 러시아 혁명사라든지. 그런데 거기 보면 트로츠키가 열 네살, 레닌이 열 여섯 살에 써클에 가입을 해요. 그 브나로드 운동, 민중 속으로, 운동을 위해서. 혁명의 전사로서. 민중과 없는 사람들 같이 좀 살자.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 위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그때 그런 것이 제 이상으로 잡혔던 거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5.18하고 사형 건이 나왔는데, 그때 대전 내에 있는 사회과학서점에서 평천하라고 하는 신문을 만들었어요. 그 평천하 편집장이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고등학생들과 운동에 대해서 논의를 하다가 그 편지가 검열에 걸려가지고 소탕당한 거죠. 근데 나를 이제 잡으러 와 보니까 고등학생이란 말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다음날 학교 교장실로 왔더라구.
총: 그게 고1땐가요?
안: 네. 그런 과정을 통해 대학교 가서 학생운동을 한 번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싶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시험을 봤는데, 정일학원 종합반 한 3개월 다녔어요. 그 입시학원도 뭐 성적 따지고 학원마다 레벨이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아무런 입증할 게 없었으니까...정일학원 원장한테 가서 이만저만한 사정으로 학교 관뒀는데 중학교 성적표 떼어 가지고가서 이만큼 성적은 되니까 수업진도 따라갈 수 있다, 하고 결국 들어갔어요. 그런데 한 4~5개월 다니고 그만 뒀어요.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겠다. 국영수만 하자. 그 짧은 기간에 이거저거 다 손 대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온다. 국영수 150점 만점 맞고 170점 암기과목에서 반타작하고 체력장 20점 맞으면 고대 정도 갈 수 있겠다. 그래가지고 혼자 공부 시작했죠. 그래서 국사는 스물다섯 문제 중에 여섯 문제 맞췄죠.(웃음) 그래서 한 270점 맞아서 고대에 갔죠.
총: 근데 애잖아요. 애. (웃음) 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게 오로지 책이었어요?
안: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웃음) 그러니까 중 3때 박정희 죽었을 때. 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웃음) 그때 이제 주변 반응이나 선배들의 반응이나 이런 걸 보면서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는 건데...
총: 박정희, 저도 초등학교 6학년이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초등학생이 뭘 알아. 그런데도 울고 불도 하는 애들도 있고, 교장이 방송으로 흐느끼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사실 나로선 애들이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하여간 분위기는 그랬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갑자기 민중을 떠 올린다는 건...
안: 중학교 때 제가 존스타인 백 소설이라든가 하는 걸 많이 읽었어요. 대부분 못 사는 민중들에 대한 얘기였고 <분노의 포도> 같은 경우는 공황기 때 노동자들의 삶 이야기 아녜요? 귀농을 했던 미국사회의. 아, 그거 정말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잖아요. 소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랑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못 배우고 어려운 사람과 같이 하려고 했던 그런 정의감. 그런 데서 굉장히 영향을 받았어요.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때 우리 어머님이 계몽사 한국사 이야기 열 두 권 짜리 사줘서 그걸 죽 읽었는데, 그중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게 권력자들의 이야기들. 항상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있는데, 권력만 잡고 나면 그 사람이 또 예전 권력자처럼 되어버리고. 이 쳇바퀴를 어떻게 멈추나. 그걸 참 이해할 수 없고 답을 알 수가 없구나. 답답하구나. 좋은 뜻으로 출마를 했는데 그 사람도 결국 과거 권력자들과 똑 같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누님이 79학번, 형님이 81학번이다 보니 누님과 형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총: 누님, 형님도 운동권이셨고?
안: 예. 누님은 당시 서울 교대 나와서 박형규 목사님이 하시던 일 도우며, 거기서 노동자들 야학 강사였었죠. 야학운동을 했었죠. 노동을 하며.
총: 그럼 기본적으로는 책으로, 스스로 성장한 자생적인 운동권이네요.
안: 에이, 물론 주변에서 다 영향을 받았었겠죠. 근데 어쨌든 주로 그런 프로세스를 통해 저한테 어떤 정의감 같은 거, 옳다는 일을 내가 추구해서 이뤄내겠다는 영웅심...
총: 어릴 때 그런 애들이 대체로 참 재수 없죠.(폭소)
안: 으하하하. 그렇죠. 재수 없는데... 하여튼 그때 저는 옳다 싶으면 막 질러버리는, 어린 놈이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박정희의 죽음이라든지, 70, 80년의 상황, 그리고 그런 책들.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라든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그런 것들이 이제 제가 살았던 농촌마을의 기억들과 결합을 하고. 제가 살았던 곳이 당시 아래 마을은 소작인이 살고 윗마을은 지주 동네였어요. 저의 집은 그래도 중농이었는데 지주 마을의. 춘궁기 때는 소작인 마을이 땅 붙이는 걸로 서로 싸워요. 어렸을 때는 그걸 무심코 봤는데 근데 그게 그런 책들을 보고 나니까 그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아... 그때 그래서 봄에 그렇게 두드려 맞았던 거구나, 그 사람이. 예를 들면 그렇게 어릴 때 기억이 조금 커서 읽고 보고 한 것들과 재조합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 같은 게 성립되기 시작한 거 같아요.
총: 그러니까 정리를 좀 하면 어릴 적 겪은 환경, 소작농의 문제, 조금 커서는 책의 영향 그리고 또 형 누나가 가까운 터울로 영향을 줬고.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써클에 들어간다는 게, 그게 가능한 건가...
안: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운동을 하겠다고 그러면서 교과서를 죄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1학기 마치고 고등학교 그만 다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러던 차에 잡혀서 잘린 거고. 그 어린 시절의 나는 크게 한 판하고 학교를 잘릴 생각이 있었던 거죠. 학교 교육과 일반적인 지식인의 코스로는 난 가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그렇게 딱 한 마디 했거든요. 지식인은 부르조아 계급의 창녀다.
총: 그러니까 어릴 땐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안돼. (폭소) 조또 모르는 상태에서.. (폭소)
안: 으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어쨌든 그렇게 필이 딱 꽂혀 가지고, 어린 놈이 완전 필이 꽂혀서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지~(웃음)
총: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그런 사람들 있죠. 제 생물학적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진지하고....(폭소)
안: 터무니없이 조숙하고.(웃음)
총: 그러면서 어른들의 단어를 벌써 어릴 때 빌려 쓰는. 그런데 말이죠. 이건 제 생각인데 대충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이제 후배들이 생기면 아주 사람을 잡는다 말이죠. 써클에 들어가면 후배가 생길 거 아니에요. 걔네는 갓 대학에 들어와서 이제 막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지 처음으로 배우는 과정에 있는데, 이미 스스로 만땅 의식화된 선배가 씨발, 니네는 왜 그것밖에 안돼!(폭소) 그럼 거기다 대고 반박은 못해요. 후배들이. 논리에서 게임이 안 되니까. 우선 반박은 못하는데. 근데 이게 정서적으로, 몸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거든요.
안: 아니 어떻게 점쟁이 같아요. 어떻게 알았어. (웃음) 제가 그걸 고백했는데, 내 인생의 가장 큰 패배이자, 최초의 패배이자...
총: 후배들 입장에선 재수 없거든 씨바.(폭소)
안: 하하하... 제 가장 큰 스승이 84학번, 1년 후배들이에요. 그 친구들이 나한테 과제를 줬어. 그 친구들 덕분에 내가 배웠죠.
총: 어떤?
안: 안 오는 거야. 애들이. 합숙 시작해야 되는데. 내 딴에는 아, 이제 2학년도 됐고 하니까 나는 이제 후배들을 잘 키울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데, 그래 가지고 후배들을 1학년 때부터 포섭을 해서 조직을 해서 몇 명씩 묶어 놨는데, 1학년 여름방학 돼서 집에 잠깐 인사 좀 하러 갔다 온다고 하던 애들이 안 올라오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게 힘든 거야.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거죠. 그런 상태로 후배들하고 겉돌았어요. 그게 만만찮은 문제죠. 도저히 후배들이랑 가까워지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후배들한테도 좋은 영향을 못 주고.
총: 그게 진짜 골 때리는 거거든요. 선배 말이 틀린 건 아냐. 틀린 건 아닌데, 우리더러 지금 당장 어쩌라는 거냐.. 부터 시작해서 왜 자기들만 그래야 하느냐.. 자기들도 대학생으로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다 그런 게 있는데 왜 지금 당장 모든 걸 버리고 투사가 되어야 하느냐... 반발심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죠.
안: 그때만 해도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가야 되는데 갑자기 가투 나가거나 세미나를 해야 될 때. 그럴 때 정말 힘들거든요. 벌지 않으면 학교 다니기 힘든데.
총: 기본적인 개개인이 처한 당장의 현실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거니까. 지나치게 이념화된 혹은 이상에 미친 선배 하나가 자기를 죄의식을 건드리면서 괴롭히는 거죠. (웃음)
안: 그래요. 그때 기분 아주... 그들한테 철저히 깨지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둘 다 점심을 먹지 못해, 짜장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5분간은 짜장 먹으면서 대화.
총: 그렇게 너무 일찍 진을 빼서 아직도 국회의원 한 번 안 되는 거예요.(폭소) 후루릅쩝쩝.(짜장 먹는 소리) 그러고 나서 그 왜 자살사건. 안희정 하면 제가 아는 키워드 중에 자살사건이 있어요. 남산 끌려갔다 자살미수 사건.
안: 그게 자살사건이라고까지 크게 말할 건 없구요. 87년도에 고대 지하조직 사건으로 들어갔다가 그해 9월에 풀려났는데. 남산터널 입구에서 지하 벙커에 들어가는데.. 난 처음에 거긴 지도 몰랐어요. 들어가자마자 다 벗으라고 그러더니 고무신이랑 군복 딱 던져주더니 입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옷 다 벗었더니 그때부터 발로 걷어차고 난리가 아니더라고. 온 방은 스티로폴로 덮여 있고.
총: 방음용?
안: 죽지 말라고. 그리고 철제책상 딱 하나 있는데 철제책상 모든 모서리에도 고무패킹으로 처리가 되어 있어요. 쪄서 죽지 말라고. 거기서 초반 한 일주일 잠을 안 재웠던가. 사람이 한 일주일을 잠 안 재우고 괴롭히니까 5일째인가 오줌에서 피가 섞여 나옵니다. 노랗지 않고 새빨간 오줌이 나옵디다.
총: 환각도 본다던데.
안: 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당했던 거에 비하면 나는 그렇게 심하게 당했던 게 아니더라고. 몽둥이나 워커발이나 주먹질을 당하는 정도였지. 물고문은 안 했으니까. 근데 그 사이에서 조직이 다 드러나 버렸어요. 조직의 총 책임자중의 하나로서 거의 절망이었죠. 더 이상 이 조직을 지켜야 될 필요성이 깨져버린 거죠. 어찌해야 할까. 버틸만한 어떤 명분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더러 너도 이제는 이름 하나만 불라고 하더라구요. 너도 뭘 하나 협조를 해야 한다고. 이미 조직이 와해된 상태로 절망해서 친구 두 명의 이름을 불었어요. 그러고 나니 정말 죽고 싶었죠. 그래서 혀를 깨물었는데, 당시 제가 젓가락이 통과될 정도로 앞니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이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총: 혀를 깨물었는데.
안: 네. 앞니가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까 이게 혀가 피가 날만큼 꽉 안 물리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혀 양쪽 끄트머리를 깨물었는데, 그냥 피만 나고 말더라고.(폭소)
총: 으하하하... 그럼 더 비참하잖아.(폭소) 근데 이미 조직이 다 드러났는데도 굳이 너도 하나만 대라고 하는 건, 실제 그 이름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 알고 있으니까, 당사자한테 완전한 패배감을 안겨 줄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스스로 무너지고 자괴하라고.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데...
안: 그렇죠. 실제 그 친구들은 그걸로 수배가 되거나 잡히지도 않았어요.
총: 그러니까. 걔들이 그런 짓을 해 온 역사가 한 두 달이 아니잖아요. 선수들이니까. 그리고 본인도 사실은 나이 어릴 때 아닙니까. 그런 거 한 번 겪고 나면 인간적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
안: 실제 제가 스스로 가지고 있던 운동가로써의 자부심이 모두 깨져 버렸죠. 그래서 저녁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어요.
총: 스스로에게 남사스러워서.
안: 예. 수치스러운 거죠. 쪽 팔리고. 수치스럽고.
총: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원기를 회복하셨을까?
안: 아... 갇혀 있는 내내 내가 불었던 친구들이 나를 용서해 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그들과 의절하는 것으로... 어차피 나는 더 이상 남들 앞에서 진지한 척, 멋있는 척 이야기를 하고 그런 인생은 없다. 나는 이제 보조자 역할이나 하는 것이 낫다. 이제 목숨 걸고 싸우는 그런 지도자가 되겠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미...
총: 더렵혀졌다.(웃음)
안: 네. 이제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에 늘 종사하는 사람은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 보조 역할을 하면서 내 인생을 살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리를 했죠.
총: 근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안기부 친구들이 고마워요. 전기를 마련해줬으니까.
안: 그렇죠. 저도 그런 면이 있다 생각해요. 만약에 내게 그때의 패배가 없었다면 아마 저열한 인생이 되었을 거 같아요.
총: 훨씬 재수 없는 인간이 되었을 거예요.(웃음)
안: 하하..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84학번 후배들도 인간적으로 저를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어 준 친구들이죠. 그때 정말로 1년 내내 힘들었었어요. 마치 처녀 총각으로부터 아이를 낳고 진정한 엄마 아빠가 되는 그 환골탈태의 과정에서 엄마아빠들이 다 시행착오를 겪고 힘들어 하잖아요? 그런 과정을 84학번 친구들이 저한테 해줬어요. 그리고 4학년 때 반종파 투쟁 품성운동을 했죠. 그때도 참 많이 배웠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다 괜한 자존심과 어깨 싸움으로 논리를 동원하는 것에 불과했다...
총: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셨었어요? 구성체 논쟁 같은 거 했을 때도?
안: 86년 그때 고려대학교 내에 지하 써클이 열 세 개가 있었어요. 큰 써클만. 열 세 개마다 혁명이론이 다 다른 거야.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 뭐고, 지금 우리 주요 타격 대상은 어떻게 해야 하고, 우리는 이 시기의 어떤 싸움을 해야 되고... 열 세 개 써클마다 다 논리가 달라서 자기 써클 잘났다고. 이래가지고 사상투쟁을 막 하면서, 다른 써클 다른 정파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었죠. 그렇게 싸웠는데...
총: 실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진 않았죠. 진보진영보면.
안: 네. 그때 열 세개 써클이 또 나뉘어져 NL, PD로 투쟁 위원회를 각각 구성을 했어요. 서로 관점이 다른 투쟁 위원회를.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하는데 일반학생들이 볼 때에는 운동을 하겠다는 놈들이 서로 싸움을 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친구 하나가 내부자 합의를 깨고 따로 조직을 만들었다고 화가 나서 각목을 가지고 와 가지고서는 선배를 팼네... 전두환 노태우를 어떻게 무찌르느냐에 힘을 합쳐야 할 판에, 그걸로 함께 투쟁을 하자는 사람들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목으로 선배를 두드려 패는 상황까지 가게 된 거죠.
그때 우리 내부에서 반성이 일면서 결과적으로는 이게 다 ‘써클’ 중심적으로 종파투쟁 때문에 싸움이 생긴 게 아니냐. 그래서 그 열 세 개 써클을 4학년 여름 때 다 해체 시켜 버리죠. 열 세 개 써클을 다 해체 시켜 하나의 단일한 써클을 만든 게 바로 애국학생회 라는 건데, 그 조직을 만든 것 때문에 감옥을 간 거죠. 그때 이후로는 서클 간 분열이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고, 그 결과로 전국 대학생들의 협의체인 전대협 조직이 출범하게 된 거죠. 옛날 얘기죠 머.
사실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론과 이성으로 감정을 지배하거나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불길이 오히려 논리를 만들고, 생각을 만드는 거 같아요. 일체유심조라는 단어가 있긴 합니다만, 불경의 그 말이 뭘 뜻하는지 다 말할 자신은 없지만 결국 정서와 감정이 모든 걸 지배하는 것 아니겠느냐..
총: 그렇죠. 오히려 나 감정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라고 말 하려고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죠. (웃음)
안: 네. 나 화난 거 아니야. 나 미워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려고 이론을 만들어내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실은 화나고 미워서인데.
총: 많은 경우 그렇죠. 그게 88년이죠. 그리고나서 그 다음 해인가요. 누구더라. 김덕룡의원인가? 보좌관으로 들어갔죠?
안: 예.
총: 왜 거기 들어가셨어요?
안: 88년도 감옥생활을 하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특별 사면으로. 대략 그때가 12월인데... 그때 제 마음을 그렇게 정리했어요. 이제 운동 지도자로서의 안희정은 끝났다. 난 거세당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태 믿어 왔던 것과 반대의 길을 갈 수는 없다. 내가 비록 지도자로서 부족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또 스스로가 정말 부끄러워서 학생운동을 앞에서 이끌 수는 없다. 더 이상은.
제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대협을 조직해 전국 총학의 84, 85 학번 집행부에 강의를 한 게 몇 번이고 사람을 만난 게 몇 명이냔 말이죠. 그렇게 멋있는 척, 고상한 척 다 해놓고 남산 가서 한 달 만에 무너져 버렸단 말이죠. 그땐 정말 죽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죠. 그런데 그런 일들을 겪고 보니까 생명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끊기가 참 어렵구나. 그런 걸 깨달았고. 두 번째로는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이제 정치적으로 반성하고 다시 태어났다,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건 참으로...
총: 남사스럽고..
안: 남사스럽고.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러니까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 읍내의 서점아들. 그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적어도 내가 맺어왔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지킬 의무는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내 역량을 넘어서는 과도한 구호를 내세워, 나도 망치고 조직도 망치고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는, 그런 인생을 다시는 살지 말자. 고렇게 정리를 하고 감옥을 나왔어요.
여기까지가 그의 대학생 운동권 시절.
총: 까불다가 어른이 되신 거네.(폭소)
안: 아, 나 참 부끄럽게... 흐흐흐... 그렇게 정리를 하고 감옥을 나와서 이제 아내하고 6년째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 지금 당장 부나방처럼, 당장 혁명할 것처럼 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 그런데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사람이다 보니 결혼을 하려면 취직을 해야 되는데 그래야 돈 천 만 원이라도 대출받아 방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보니까 취직할 데가 없어요.
국가보안법으로 정치 2범이 어디 취직이 되겠어요. 그렇다고 주민등록증을 가라로 만들어 노동하러 가자니 - 예나 지금이나 증 하나 없으면 결국 현장으로 가야 되죠 - 이미 현장은 노동자들 넘치고. 그러던 차에 김영춘 씨가 당시 김영삼 총재 곁에 있었는데, 총재 비서였으니까, 그 분이 이제 나더러 몇 학번 선배인데 하고 전화가 왔어요. 아니 내가 전화를 했던가... 하여튼 비서실을 꾸려야 되는데 니가 한 번 가 보면 어떻겠느냐. 그런 제안을 받아서 가게 된 거죠.
총: 운동을 하다 이제 취직을 한 거네요.
안: 예. 취직을 했죠. 당시 노사 분쟁이 벌어지면 사측이 당시에는 재무제표나 그런 자료를 일체 공개를 안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정당한 임금협상을 위해 필요한 자료도 얻기가 어려웠던 시절이고 그래서 내가 그 역할을 하게 됐죠. 자료를 구해주고.
당시 생각으로는 학생 운동의 지도자로서 패배한 사람이지만, 어떻게든 그 패배를 내 방식으로 책임을 지자. 그것은 이렇게 후방에서 조력자로 사는 것이다. 그게 내가 취해야 할 인생의 태도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91년 92년 되니까 김근태, 이부영 뭐 장기표까지 소위 민중운동의 지도자라고 했던 분들이 제도권에 다 들오기 시작하네..
총: 그때가 본인 나이가.
안: 스물여섯이었네요.
총: 아직 청년인데. 가만, 그럼 와이프는 고 3때 만난 게 되나요.
안: 아, 고대 동기. 83학번 동기.
총: 들어가자마자 만난 거네요?
안: 들어가서 알고 지내던 친군데 2학년 때부터 사귀기로 했죠.
총: 첫 연애와 바로 결혼. 젤 나쁜 케이스네.(폭소)
안: 우리 집사람도 그런 소리 합디다.(폭소)
총: 으하하하..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안: 89년이요.
총: 일찍 하셨네요.
안: 네. 88년 12월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89년 1월부터 김덕룡 실에 다니고 89년 12월에 결혼을 했지요.
총: 그 즈음이 인생에서 굉장히 큰 전환점이 되신 거네요. 감옥 갔다 운동 행로를 바꾸고, 결혼 하고, 취직 하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아직 20대 중반에 어린 나이인데. 근데 그 시절에 정치판도 근본적으로 뒤흔들렸잖아요. 재야가 대거 제도권으로 진입하고.
안: 예. 그리고 90년 삼당 합당 할 때 저는 김덕룡 의원실에 사표 내고, 노무현 대통령은 삼당합당을 거부하고. 그리고 삼당합당 거부한 당직자들과 안 쫒아간 국회의원들 일곱 명이 모여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죠. 그때 저는 이철 사무총장실의 비서였었어요. 그런데 91년도에 그만 뒀어요. 제가 못 있겠더라구요.
총: 왜요?
안: 정치가 과실 따먹기 게임만 하니까. 땅 자체의 기운을 높이는, 그런 일은 너무 어렵더라구요. 역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과 의지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이미지와 득표를 위한 공약을 하고 결국 득표를 통해 지위를 보장받고 하는, 그런 정치에 대해 정말 환멸을 느꼈어요.
총: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요, 아니면...
안: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정치 자체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는 가치를 따지기보다 패싸움의 기술만 익히는 정치였어요. 정치판 자체가 늘, 만날 그런 것만 보고 배우게 되는 곳인 거죠. 패싸움의 기술. 이렇게 패볼까 저렇게 패볼까. 아, 정말 싫더라구 그런 게.
총: 체질에 안 맞았구나.
안: 그런 거 같아요. 사람이 가치가 있고 대의가 있고 명분을 있고 나서, 패는 것도 있는 거지. 나한테 서운한 게 있다고, 개인적으로 은원 관계를 따지고. 실제 속마음은 그런 거면서 겉으로는 논리를 막 만들어서 내세우고. 실은 자기들끼리의 친소 관계를 가지고 패를 모으는 것에 불과한데 거기 마치 대의명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친소 관계의 핵심은 이게 나한테 유리하냐 불리하냐. 나한테 이득이면 삼키고 불리하면 뱉고. 이 공학으로 정치가 움직이는 거예요.
총: 그래서 그런 후에?
안: 그래서 92년도에 그만 두고 학교에 복학을 했어요.
총: 졸업을 해야 하니까.
안: 예. 졸업을 하기로 했으니까. 아, 당장 복학하진 않았고 제도 정치가 이런 수준이라면 차라리 돈이라도 좀 벌자, 이런 생각으로. 하방 사업을 하자. 정신노동 가지고는 안 되겠다. 육체노동으로 좀 살아보자 해 가지고 창원에 내려가서 창원 노동복지회관을 짓고 왔어요. 함바집에서 기숙하면서 막노동하면서. 수입은 좋았어요. 150만원 노가다 월급을 받았으니까. 뭐 일이 공치는 날 다 빼고도 한 150만원 수입이 되었죠.
총: 91년도라고 말씀하시니까 저도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도 그 해에 군대 갔다 와서 쓰미 데모도(조적공 보조)를 해서 그 생활을 좀 알죠.
안: 나는 잡부였어요.(웃음) 까치발 매는 작업. 그때만 해도 그게 뭐냐..
총: 아시바.(웃음)
안: 네네. 그게 다 목재라서 외벽을 세운 다음 거기다가 까치발 매고 철제판 달아서 인부들이 작업할 수 있게. 차전놀이 할 때 받침대처럼 통나무 두 개를 엮어서 꺾어요. 하나는 기둥에 묶고. 그럼 그게 꼭 까치발처럼 보인다고 해서 까치발 맨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철사 굵은 거 이만큼 가닥 끊어 놓은걸 허리에 차고 올라가서 붙들어 매는 거죠.
총: 까치발 작업 하셨구나..
안: 공구리도 치고.
총: 나라시하고..
안: 어. 나라시 하고..
총: 잡부 맞네 잡부(웃음)
안: 그리고 주변 청소하고(웃음)
총: 그렇게 노가다를 하다 관두고 이제..
안: 92년에 복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하겠다고 했던 내 인생은 패배를 겪고, 90년에 동구권은 몰락하고, 3당 합당으로 반독재 전선은 붕괴되고, 전국연합 조직도 붕괴되고 그러면서 퇴역 군인의 실업문제와도 같은 그런 상황이 한꺼번에 몰려왔죠. 양심과 시대의 정의를 위해 청춘을 던졌던 사람에서 점점 시대에 뒤쳐진 천덕꾸러기 인생으로 전락하는, 그런 인생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죠.
형수님이 간호사하고 남편이 노동운동 상담소 하다가 그런 백수 같은 사위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또 전망도 희망도 없는 그 불투명한 결혼 생활과 남편의 무책임함에 지쳐버린 그 형수들의 반란으로, 그렇게 해서 이어지는 이혼들. 그런 것들도 너무나 많이 봤고. 운동권 출신들의 와이프들이 보통 간호사 약사 교사... 그런 직종에 있으면서 남편을 부양했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수입 하나 없으면서 역사와 민중만 이야기하고.
총: 먹고 사는 문제에 부딪히는 거죠.
안: 네. 그 현실 문제에 부딪혀서.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전선은 끝났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당대출판사에서 나왔나요? 역사의 종말. 뭐 이런 책들에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하는 책들까지. 그 당시 사조는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 모던, 그러니까 이제 역사고 조직이고 다 끝났으니까..
총: 각자 갈 길 가라! (웃음)
안: 네. 그거죠. 갈 길 가라. 근데 나는 그게 너무 무책임한 거야. 아니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인생 조지는 길을 가라고 선동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가 죽겠으니까 나는 빠진다고 할 수 있나. 그런 책임감과 동시에 내가 살아온, 내 어린 인생에 대한 엄청난 자괴감. 이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죽어도 좋다고 살아왔던 내 인생의 선택이었나. 포레스트 검프의 마지막 장면처럼 실컷 뛰다가 나 이제 집에 갈 때 됐으니까 니들도 집에가. 이런 거냐 인생이. 그건 너무 무책임한 짓 아니냐. 그런 생각이 밀려들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92년도에 출판사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제 수입도 많이 늘긴 했는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 한 1년 반 출판사를 하다가 노무현 대통령 책을 출판하자... 여보 나 좀 도와줘. 그 책을 만들게 됐어요. 그거를 제가 출판사 있을 때 냈어요.
총: 인연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안: 인연이야 그 전에도 있긴 했죠.
총: 꼬마 민주당 때.
안: 네. 그때부터 가깝게 지냈기는 했어요. 그래서 출판사 하면서 책 하나 내시죠, 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이제 복학을 해요. 그 시절 지난 시대 내가 인생을 조져도 좋다고 믿었던 그 믿음이, 어떤 논리적 근거였는가. 어떤 희망을 향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보고 하자는 생각으로.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혁명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인가. 그때는 뭐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 하자고 했던 그 혁명은 뭐냐. 역사라는 것이 그렇게 이제 끝, 다시 시작하고 하는 문제인 것인가. 그래서 학교에 돌아가 고전들을 보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막시즘 과의 책들을 봤다면 그때는 이제 주로 동양의 고전들, 사서삼경, 플라톤 같은. 그런 고전들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역사를 더 길게 보는 법을 배우려고 했고.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하나는 내가 너무 어린 나이부터 내 인생을 조지고 있구나. 이렇게 그냥 살기는 억울하다. 왜 갑자기 잔치는 끝났다는 거냐. 누군가 나 대신 나서주면 난 그 사람의 조력자라도 할 수 있는데. 부역자라도 해 줄 수 있는데. 다들 이제는 끝났다고 집에 가자고 하니까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시절 저만 그랬던 게 아니라 심한 경우도 있었어요. 85학번 후배 하나가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해서 면회를 갔는데 그 후배 놈이 무릎을 꿇고 나한테 형님 잘못했어요. 막 이러는 거야. 자기가 조금만 더 잘했었더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막 우는 거야.
총: 무너진 거네요.
안: 뭐 학삐리와 노총 출신 부부들 깨지는 거, 마누라가 전문직으로 벌고 남편은 운동하다가 이혼하는 거. 정말 한 인생 조져도 좋으니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우자 했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감을 한다는 것이 과연... 난 이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으로 혁명하자고 하는 것도 전혀 비현실적이다. 혁명의 시대는 이미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인가. 그 고민을 하는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게 된 거예요.
총: 근데 꼬마민주당 시절에 이미 노무현대통령을 봤잖아요. 근데 왜 하필 그 시점에 같이 하게 된 거예요?
안: 실은 90년 3당 합당 거부하고 나서 바로 노무현대통령이랑 일을 하고 싶었었어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 방에서는 더 이상 나를 받을 만큼의 능력이 없었어요. 워낙 박봉인데 나까지 거기 가서 일 한다고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당시 사무총장실 비서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노무현 의원한테 갈 수는 없는 거니까.
총: 배신이니까.
안: 네. 그리고 괜히 두 분 사이를 어렵게 만들까봐. 하여간 그래서 그때는 만날 수가 없었었고. 그런 고민들 속에서 출판사를 하고 또 독학을 하던 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구소 만들 때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해 왔죠.
여기까지가 노무현을 만나기 이전의 안희정.
총: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왜 안희정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던 겁니까?
안: 이광재가 추천을 했더라구요. 대단한 놈이더라구.(웃음) 노무현 대통령도 제가 살아온 이력을 맘에 들어 하셨나 봐요. 중간 중간 또 이렇게 만나면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드린 적도 있었고. 그때라고 제가 지금 하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겠습니까,
총: 더 했겠죠~(폭소)
안: 더 했죠. (폭소)
총: 으하하하. 사실은 이런 이야기만 했겠죠.
안: 네 하하하. 그런 문제의식에 대해서, 그러니까 혁명운동의 정신은 놓치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옛날 방식하고 다른 뭔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뭐 그런 이야기들. 그때 제가 정리했던 개념은 막시즘의 휴머니즘은 간직하자. 과거 우리끼리의 논쟁은 오히려 막시즘의 휴머니즘은 버리고 마키아벨리즘만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 자기비판.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인간이 동학을 만나면 동학이 되는 거고 막스를 만나면 막시즘이 되는 거고 황건적을 만나면 황건적이 되는 거. 결국은 인간애가 기본이다. 그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진보주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기분을 놓치지 않는 거다. 그랬을 때 노무현대통령이 말한 게 바로 원칙과 상식이에요. 그럼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이론은 나중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분이이에요.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은 삼당 합당이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막 무너지고 그랬을 때도 이 양반은 오히려 더 세게 나가요. 활기차게. 이런 원칙 없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굉장히 고상한 관념으로 역사 투쟁을 하려고 했었던 건데, 그래서 그 고상한 관념이 깨지니까 관념으로써 역사투쟁이니 하는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무력해졌는데, 노무현이라고 하는 정치인에게는 오히려 현실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싸워야 될 이유가 원칙과 상식으로 있더라구요. 그게 제가 노무현 대통령이랑 일하면서 느낀 행복함의 시작이죠.
총: 그렇게 좋던가요. 노무현대통령 처음부터?
안: 아주 좋았어요. 아주 훌륭했어요. 하하하하..
이 대목에서 아주 환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노무현과 만남 이후.
총: 노무현 대통령이 뭐가 그렇게 달랐습니까. 그 이전 정치인들과.
안: 모든 것이 다릅니다. 품성, 합리주의, 타인에 대한 인격적 예의, 배려. 모든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비서라고 할지라도 그 책임과 권한을 존중해주죠. 기존의 정치인은요, 비서들에게 그냥 지시하고 비서는 그냥 하는 거예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면 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오고 갔는지 비서들에게 와서 보고를 해요. 내가 당신들에게 보고를 해 줘야지 당신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나는 당신들에게 보고를 한다.
직무와 관련되어서 정확하게 상황들을 알려주고, 물어보면 모든 일을 오픈해줬어요. 기존의 정치인들은 절대 그런 게 없죠. 감히 물어보기도 어렵고. 절대 안 그럽니다. 뭐 그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치인이었어요.그리고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한테 한 한 마디가 당시 내 고민을 푸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어린 빨치산이, 아우 내가 빨치산이 될 때는 인민을 해방시키고 좋은 의미에서 왔는데 말이야, 빨치산 선배를 보니까 무도 훔쳐 먹고 난 실망이다. 그러니까 다른 빨치산이 한 얘기가 뭐냐면,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이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위대한 거야. 이렇게 말을 해요. 근데 난 왠지 그게 찝찝했어어. 왠지 그 정도로는 안 되겠더라고. 아우씨,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지. 게다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역사가 좋아질 거라고 믿고 내가 가냐...
90년 초반에 나왔던 얘긴가.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뭐 쓰면 뱉고 달면 삼키고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는 정치공학적인 행보를 보면, 오히려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더 심하다는 소리죠. 이론을 만들어내던 영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정당성을 막 만들어내서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는데, 노회한 정치인이 볼 때도 그게 참 한심해서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표현이 나온 거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진보를 하느냐. 그런 정치만 보다보니까 제가 모든 게 회의스럽고 그러던 시절인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에게 뭐라고 했냐면,
“ 희정씨 그거 참 어려운 주제인데. 그게 그런 거 같아. 이런 말 있잖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사람은 안 변하는 것 같아 내가 볼 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개체로써의 인간은 안 바뀐다는 거야. 그런데도 인류는 진보한다는 것이 신기한 것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는데, 독백처럼, 어, 그게 나한테는 몇 년을 고민하던 문제에 답을 줬어요. 그때 무슨 득도한 것처럼 중요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건 전혀 아니에요. 그냥 독백처럼 한 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까 그런 말들이 저한테는 남는 거예요. 인간이 대한 믿음이랄까. 그 대통령의 그 말씀이 지금까지 남는 거라. 개체로써의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그 개체가 모인 집단으로써의 인류는 늘 진보해 왔다. 그것이 진보주의자의 역사관 아닐까.
그렇다. 사람 하나하나에 대해 실망할 일이 아니다. 사람 하나하나에 실망하고 신념을 꺾지 말고, 인생은 뭐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포기하지 말자.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사회화 되는 첫 번째 과정이 인간에 대한 실망을 조직하는 거예요. 난 이걸 사회화 과정의 첫 번째라고 봐요. 별 수 없는 거야 인간은. 똑똑한 체 하지 말고 적당히 사는 거야. 그렇게 인간에 대한 실망을 학습 시키는 것이 사회화가 되는 가장 첫 번째 내용 같아요.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나면 사람들이 적당히 살기 시작해요. 그렇게 적당히 살기 시작하면서 시민사회와 공동체적 관념도 없어지고, 불 꺼진 뉴욕, 정전된 뉴욕 밤거리 같은 인생 속에서 자본주의적 탐욕에 의해 재편되어 가는 거죠. 그렇게 인간에 대한 실망을 느꼈던 게 제가 처했던 94년까지의 상황이에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제게 다시 불러일으킨 거죠.
그랬단다.
총: 그랬군요. 자, 그런데 부산시장 선거 떨어지잖아요. 고난이 시작되는 건데. 하지만 동시에 그때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진심을 알아주기 시작했죠. 바보 노무현 이라고 해주고.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계속해서 관두고 부산 내려가고, 내려가고 한 걸 내부에선 보좌진들은 동의를 했어요?
안: 88년도에서 이겼던 부산 동구에서 92년도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똑같은 사람한테. 5공의 허삼수한테. 두 번째는 택도 없이 떨어졌죠. 그리고 95년도 부산시장 선거에서 또 졌죠. 그리고 96년 종로에 와서 종로선거에서 떨어지고 98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또 99년 초에 도 부산 출마선언을 했죠. 그때 다 반대를 했어요.
총: 너무나 당연하죠.
안: 네. 다 반대했어요. 종로에서 그냥 정치하시고 다음 대선 후보군에 들어가는 게 낫지 뭐 하러 가서 그 위험한 배팅을, 도전을 하느냐.
총: 그럼 본인도 반대하셨나요, 그때.
안: 아뇨 저는 그때 찬성했었어요. 저는 대통령의 결정을 무조건 존중했어요.
총: 그건 왜 그랬어요? 참모인데.
안: 왜냐면 나는 그 분을 믿었어요. 믿고 있었던 대장이 내린 결정이니까. 역사책에 보면 신돈이 초반에는 굉장한 사람이었어요. 막판에는 분열증이었지만.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과연 정상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내린 판단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따르겠다. 내가 판단할 것은 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인가. 내가 인간적인 관계에 얽매여 그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건 아닌가, 그 판단만 하면 되는 거에요.
총: 좋은 참모네...
안: 그런데 내가 봤을 때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고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그럼 저는 믿고 지지합니다. 물론 제가 한 두 번 결정적으로 반대를 한 때가 있기는 합니다.
총: 어떤 반대를 하셨어요?
안: 97년 선거에서 이인제가 나가면 나도 나간다. 이랬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총: 이인제 싫어하시는 건 옛날부터 대단했군요. (폭소)
안: 네. 이인제가 사이비 세대교체의 깃발을 들고, 다음 시대의 리더인양 하는 것을 나는 허용할 수 없다.
총: 왜 그 정도로 싫어하신 거예요?
안: 아, 90년 이인제씨가 3당 합당 쫒아갈 때, 그때 그냥 쫒아 간 게 아니에요. 지배적 대세가 여기 있는 거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 만찬 하는 자리에서 그랬다고 해요. 난 직접보진 않았지만. 그러면서 이인제는 상임위도 불성실하게 했죠. 그런 것들이 노무현의 기준에는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마지못해 3당 합당한 게 아니라 대세가 이거라면서 가는 걸 보고. 그래서 97년에 이인제 나가면 나도 나가겠다고 하셨을 때 제가 한달 반을 쫓아다니며 그 출마 선언 못하시게 말렸어요. (웃음)
총: 그건 왜 그러셨어요?
안: 음... 대통령의 도전은 그 자체가 목표여야지, 이인제를 주저앉히려고 나온다는 건... 안 되는 거 아니냐. 일단 나와서 나중에 김대중 후보를 돕는다. 그런 것도 별로 좋은 거 같진 않았어요. 온전히 노무현 후보가 스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고. 이인제가 나온다고 하니까 배 아파서 나온 거네. 그런 구도로 빠질 거 같은 거죠.
총: 그때 출마선언을 할 뻔도 했구나.
안: 예.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제가 제안했던 게 뭐나면 국민후보로 갑시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96년도 새국민회의를 안 쫒아갔단 말이에요. 정계은퇴 번복하고 영국서 돌아오신 김대중 대통령이 530 선거 끝나고 나서 11월 첫째 주인가 새국민회의를 만들었잖아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은 정계은퇴 선언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냥 변호사 업무만 전념하겠다고. 그리고 신한국당 경선에 이인제 나온다고 하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전 나가겠다면 새국민회의가 아니라 독립적인 국민후보로 하자.
이래서 당시 민노당이 아직 없을 땐데, 그쪽 진영, 민노총 뭐 이런 그룹한테 당신들이 노무현을 후보군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그쪽에 결국 온 답변이 뭐냐면, 공식답변은 물론 아니었습니다만, 뭐 단일 조직이 아니니 공식답변이랄 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돌아온 답변이 운동권 출신들 모임 내에서 노무현 카드를 검토하다가 안 되겠다고 결론이 났다. 서울대 나와야 한다. 그래서 권영길 내보낸 거예요. 흠, 그때 거기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까...하하하
서울대를 나오지 않아서. 웃기고들 있었던 게다.
총: 하하하하. 끝내 대통령 못 됐겠죠.
안: 그 당시 제 생각은 그렇게 나가서 결국 김대중 지지하는 거다. 끝까지 가는 게 아니라. 어차피 정권교체라고 하는 가장 큰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이회창 싸움에서, 3자 노선을 끝까지 끌고 가선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김대중 지지선언하고 들어갈 생각이 있었죠. 그게 명분과 실리가 있는 거다.
요즘 그쪽 분들 보면 정치하면서 명분만 가지고 어떠한 타협책도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던데, 그건 정치가 아니거든요. 모 아니면 도. 그건 혁명의 게임이죠. 혁명운동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래서 그 때 제가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한테 정말로 세게 말렸고. 그리고 대연정 문제 때 제가 말려 보려고 했는데, 제가 청와대에 근무했던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말려질 사람도 아니고. 2005년 5월 대연정 제안이 있기 전에 2월인가 3월에 말씀을 해주셨었어요. 나 이런 거 생각하고 있다고. 그때 전 어맛, 깜짝이야 했죠.. (폭소)
총: 으하하하하.
안: 이건 무슨 발상인가. 정말 역발상이구나. 전 그런 생각조차 못 해봤는데. 그런 면에선 역시 제가 알고 있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게 참 대책 없는 제안이기 쉽습니다. 그 제안을 누가 어떤 식으로 받겠습니까... 이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진지에서만 머물면서 소리만 치고 있는데 정말 싸울 거면 성문 열어놓고 백병전 하자 얘기 아니냐.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다. 나한테 총알 안 날라 오는 이상 이제 성문 안에서 총 쏘는 화려함만 보여주면 되는, 그 정도의 경쟁구도에서 아주 안정되어 있는 정치판에다가, 니들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밖에 나와서 백병전 하자. 이런 제안이거든요. 지역으로 진지를 구축한 정당들에게 실질적으로 국민의 갈등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전환하자는, 그런 뜻인데 이건 당사자들에게 물어봐야 된다. 그래가지고 이제 당에 상의한 건데 그 과정에서 이게 밖으로 나가버린 거예요.
민주주의는 뫼비우스 띠와 같아서 투쟁의 길을 한창 걷다가도 갑자기 타협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민주주의의 뫼비우스의 띄라고 난 생각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어디 부분에 와 있는가.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난 안 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이제 신중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시겠다 하시고 열린우리당 지도부한테 신중하게 한 번 상의를 하겠다고 했다가 그 얘기가 이제 나가버려서 별 수 없이 정론화 된 거예요. 물론 대통령은 그걸 할 의지가 분명히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되고 그런 프로세스의 주체가 만들어지기도 나가 버린 거죠.
총: 그랬군요. 아까 부산에서 다 말릴 때 안 말렸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그 덕에 사실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런데 그건 다 결과론이고 실제로 떨어진 직후에는 좌절이잖아요. 엄청난. 그렇지 않았었나요? 제가 그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요. 떨어진 직후의 침울한 노무현 사무실, 2000년 부산 시장 인가.
안: 부산 국회의원 선거
총: 아, 국회의원. 그때 인터뷰를 갔는데 회의실이라고 정말 작았어요. 테이블이 있었는데 테이블 다리가 안 맞아. 흔들거려. (웃음) 그리고 커피를 타줬는데 존나 맛이 없었어. 커피가. (폭소)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랑 참 심심하게 인터뷰 했는데, 막 떨어진 양반이다보니 매가리도 없고. (웃음) 아, 이 양반 인터뷰를 해줘야겠다. 떨어졌지만 의미가 있으니 우리라도 어떻게 인터뷰 해줘야겠다 싶어서 간 건데. 그 과정에서 다른 말들은 생각이 안 나고 이 말이 생각나요.
“역사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요~”
뭐라고 하다가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다만 그런 이야기를 그 양반이 웃으면서 했다고. 원래 그게 안 웃어야 되는 타이밍이거든요. 정치인들은 그런 이야기할 때 비장해야 폼이 난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웃어버리니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그게 진심이란 게 느껴지는 거죠. 연출된 게 아니고 이 사람이로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그래서 10년이 넘었는데 그 얼굴이 생각나요. 어쨌든 그때 그 사무실 분위기가 어땠냐 하면, 존나 침울했어요. 존나. (폭소) 아, 이제 이렇게 해서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씨앗을 뿌렸구나, 이게 아니고 존나 침울했다고요.(웃음)
안: 하하하.. 그때 총선 치르고 나서 정말 힘들었어요.
총: 그때 내부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안: 그때는 제가 물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웃음)
총: 으히하하하하
안: 98년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 되시고 나서, 희정씨 나한테 현재 가장 큰 고민이 물장사다. 보증 섰다가 망하고 개자식 되어 버렸는데. 이거 어떻게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요 문제를 도와주는 것이 현재 그 양반에게 가장 절실한 거구나. 그래서 주식을 다 나한테 넘겨라. 그걸 넘겨받아 가지고는 연구소를 위한 수익사업으로 추진을 했죠. 옥천에 있는 공장에 OEM으로 납품해서 수익구조를 예상하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OEM 납품으로는 수익 구조를 제대로 남길 수가 없어서 자체 브랜드 파워를 키워서 영업 조직망을 함께 패키지로 해야겠다. 그래서 오아시스라는 판매회사를 별도법인으로 만들고 판매조직과 판매사업을 시작했죠. 그때 이제 선배들한테 투자를 받으려고 했었죠.
총: 그래서 나중에 본인이 문제가 된 건데. 근데 사실 생각해 보면 그때 상황에서보자면 노무현이 몇 년 있다가 대통령 될 거니까 미리 알아서 정치자금을 준다, 이런 거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상황 아닙니까.
안: 그때 누가 노무현이 대통령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심지어는 2001년에 대선후보 선언을 처음 했을 때조차...
총: 아무도 생각 안 했죠.
안: 그걸 정치자금이니 로비를 했으니 하는데, 나중에 로비자금이라고 하는 혐의는 벗어났습니다만... 하여튼 그때 저로선 정치를 하는 이상 이 사업을 하다가 내가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 대장 가마를 내가 메고 있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탕이면 그냥 서 있어야지. 내가 서 있는 바퀴 쪽이 진흙 쪽이면 그럼 가마를 걸치고 서 있는 거죠. 가마 내려놓고 내 발만 마른 땅에 두겠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2000년 총선 끝날 때까지 2년 반을 생수사업에 했죠.
그랬단다.
총: 아까 이인제 나오니까 나도 나가겠다고 하신 거 말고, 본인이, 노무현 대
통령 본인이 이제 내가 대통령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했던 순간이 있었어요? 전 2001년에 처음 출마 선언 하셨을 때도 이게 꼭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를 한 거라기보다는 이 판에서 자신을 역할이 있다. 그래서 나간다. 그런 정도의 느낌이었거든요.
안: 노무현식 정치 노선, 노무현 가문의 정치적 철학의 특징을 얘기하자면, 이 외형적으로는 세 바둑이에요. 집 바둑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국회의원 되어야지, 내가 대통령 되어야지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겨냥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가치라고 하는 이름의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2002년도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주의 통합,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자. 그리고 우리 툭 까놓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이게 목표였어요. 지역주의 정치를 그만하고 특권 없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그리고 원칙과 상식대로 살아도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 그래서 법치주의 사회를 만들자. 요것이 정치를 하는 이유였단 말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해야 되겠는데 필요하다면 대통령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승패하고도 상관이 없었어요. 지든 이기든, 이 가치를 가지고 그 무대에서 싸우면 그 가치를 가지고 기여하게 되는 거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지면은 아무것도 없다고 얘길 하지만, 그건 단기 순익 얘기이고. 단기 순익이 아니라 자산 가치를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노무현 가문의 정치 철학은 가치 중심이에요. 이런 가치를 가지고 싸워 나가는 것, 그게 대통령 선거가 되면 대통령 후보의 자격으로 그 싸움을 하는 거에요. 자신의 급이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할 기회가 있으면 그러면 출전을 하는 거예요.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 후보랑 후보단일화를 하던 2002년 12월 그 저녁에 이겼다고 전화를 드리니까. 어, 그래 알았네. 간단하게 한 마디만 하셨죠. 그리고 그 다음 날 만나서는 어떠세요 하고 물었어요.
왜냐면. 후보단일화 하고 각서 쓰고 또 러브샷 했던 그날 밤에, 제가 엄청 울었거든요. 평 생 모은 재산을 그 부잣집 도련님한테 한 방에 뺏기는 구나. 너무 허망하더라구. 너무 억울하고. 저 사람은 그냥 자기 용돈 조금 떼서 배팅한 거지만 우리는 평생 모은 재산을 다 배팅하는 건데. 그 상황까지 내몰린 처지가 너무나 억울하더라구. 그래서 그 왜 러브샷까지 해서 사람 속을 쓰리게 하시냐고... 대통령한테 30년 수절했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재취하는 느낌이라고.(웃음)
총 : 그것도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모르는 남자한테. (폭소)
안 : 그랬더니 대통령이 아, 그 친구 갑자기 러브샷하자고 들이 미는데 어떡하냐고. (웃음)
총 :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어떠냐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안 :
“내가 단일후보로 이런 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내가 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패자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승자로서 아량을 베푸는 것보다 패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역사의 교훈이 있지 않겠느냐, 하시더군요. 정치란 게 어차피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의 변화를 통해서 시대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 정치인데, 그렇다면 나의 역할 모델이, 패자의 역할 모델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괜찮다. 잘할 자신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아, 맞다, 그런 거구나. 정치가 이런 거구나. 정치를 이렇게 해야 엣지가 있는 거야~ 내가 속으로 그렇게 말했죠.
참, 노무현답다.
총 : 제가 이 질문을 시작한 이유가 뭐냐면 2002년 출마했을 때 이인제가 나오니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97년 때도 그러셨다고 하니까. 근데 당시 지지율이 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선언할 때만 해도.
안 : 2001년 10월에 우리가 대통령 선거를 선언했을 때는, 지지율이 한 4퍼센트 대.
총 : 그렇게까지 높았나요?(웃음)
안 : 네. (웃음) 2,3 퍼센트에서 4퍼센트까지 올라갔었고, 이인제씨가 18프로에서 20퍼센트 벽을 넘느냐 마느냐 하고 있을 때였어요.
총 : 1퍼센트는 넘었구나.(웃음)
안 : 그때 김근태 선배가 1퍼센트 밑에 있었죠. (웃음)
총 :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노무현 대통령이 출마 선언했을 때 자기가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또 대통령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97년에 내가 구도를 만들어서 김대중을 밀겠다고 한 것처럼, 어느 시점에 누군가를 밀겠다고 출발한 건 아닙니까.
안 : 2001년도 초에 해수부 장관을 그만두셨을 때쯤 이광재 의원이랑 제가 금강빌딩에 대선사무실을 한 층 통으로 얻어버렸어요. 그리고 퇴임하신, 해수부 장관을 그만두신, 직후 노무현 의원을 금강빌딩에서 만나자고 해서 금강빌딩을 보여줬죠. 그랬더니 "잠깐 보세요" 그러는 거야. 한 쪽 방에 가서 우리를 이렇게 보더니 "자네들 이 사무실 왜 얻었어?"그러는 거야 "하셔야죠." 그랬더니... "이인제한테 질 때는 어떡하지?"
총 : 하하하하. 이인제한테.
안: 이인제 포스터 들고 선거운동 해줄 자신 있어?
총: 오, 만약 진다면.
안:
“난 자신 없어. 어떻게 이인제 같은 사람을... 그런데 경선에 붙으면 패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패자가 되어서 그걸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경선 붙지 말아야지.”
총: 음... 그렇게 생각하셨다...
안: 네. 그러면서 자네들인 지금 무슨 생각 하냐고 물으시는 거였어요. 당연히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건데, 만약 나가게 되면 지더라도 승복을 해서 그 후 상대의 당선을 위해서 진심으로 뛰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처음부터 가지고 경선을 해야 하는 건데, 자기한테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아직 안 되어 있다. 이인제 같은, 그런 정치인이 대통령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러면서 고민을 하셨죠.
총: 노무현다운 고민인데. 그리고 고민은 이해가 되는데. 그럼 결국 나가신 이유는 뭡니까?
안: 다른 선택이 없었던 거죠. 96년도 총선에 떨어지고 나서 노무현대통령이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는 삼김 청산 하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중구에서 출마했지만 잔류한 민주당 사람들이 다 떨어졌어요. 그때 이부영 정도 살아남았나? 죄다 떨어졌어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씀이, 이것이 현실이다. 호남의 대통령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것을 삼김정치이나 보스정치니 하면서 관념으로 이기려는 자체가 억지고 무리다.
그런 자세가 정당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유연함이고, 현실정치인으로서 현실적 판단능력인데. 지난 2008년도 7월 6일 전당대회 끝나고 민주당최고의원들 쭉 모시고 봉하마을에 인사를 갔더니 그때 김민석 최고가 지난 시절에 대해서 사과 비슷하게 유감의 발언을 하니까 노무현대통령이 앉아계시다가, 책상 탁하고 치시면서
“그 이야기는 그만해도 된다. 정당과 정치인이라는 것은, 나랑 이렇게 앉게 되는 것은, 당원들이 시킨 일이 아닌가. 당원들이 결정해서 자네가 최고위원이라는 지위를 얻고 나는 또 전임대통령으로서 자네를 만난 것이고. 정치는 그것으로써 충분히 화해가 되는 거야. 그런 옛날 문제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사과하고 그럴 필요 없어. 이걸로 화해했다고 보세. ”
이렇게 하고 퉁치고 넘어 가시더라구요. 그러니까 개인적 차원에서의 정의와 옳고 그름의 잣대, 현실 정당 정치인으로서의 타협과 관용. 그러면서도 이인제의 원칙 없는 정치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 그럴 경우는 반드시 도전해서 싸워서 이겨내는 정신. 그런 복합적인 것에 정치인 노무현의 훌륭한 리더십이 있는 거죠.
총: 다시 제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러니까 처음 출마 선언할 때는 양보할 수 있다, 그런 생각 있지 않으셨나요. 예를 들어서 그나마 노무현대통령이 인정했던 선배 중 하나가 김근태 정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안: 민주화운동의 선배로서 인정했죠.
총: 그래서 혹시 김근태가 경선에서도 힘을 받으면 김근태를 밀어줄 수 있다 이런 생각 하고 나가신 건가요? 97년 김대중 때처럼.
안: 그때 금강캠프에서 했던 이야기가 이인제한테 지면 승복할 자신이 있나 이런 거고. 조금 있다가 이런 말도 하셨어요. 경선해서 김근태가 나보다 지지율이 안 올라오면 어떻게 하느냐...
총: 더 나오면 밀어줄 수 있는데?
안: 더 나오면 얼른 김근태를 밀어주지. 둘이 싸울 일이 뭐 있냐. 근데 그때 되어서도 김근태가 나보다 지지율이 안 오르면, 그때는 김근태가 나를 밀어야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나. 이 고민을 2001년도 초반에 했었죠. 김근태라는 화두 때문에. 노무현대통령이.
총: 그랬구나.
안: 그래가지고 심지어 2001년도 막판에 한화갑 김근태 노무현 셋이 단일화해야 된다고 이야기 나왔을 때 노무현 후보가 쾅, 하고 오백원짜리 동전을 내놓더니 여기서 이걸로 결정을 합시다.(폭소)
진짜, 노무현 답다.
총: 푸하하하하. 그럼 비슷한 맥락의 질문인데 지지율이 한참 떨어질 때 그러니까 후보로 결정되고 나서 후단협도 나서고 난리 나고 정몽준 나와서 단일화해야 한다고 그럴 때.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단일화가 억울할 일이잖아요. 당연히 다 반대했을 것 같은데 캠프 안에서는. 힘겹게 힘겹게 재산 모아서 거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부잣집 아들이 나타나가지고 한 방에 다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노무현대통령은 그때 상황에 밀려서 간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정몽준한테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안: 그거는 현실정치인의...(긴 침묵) 민심과 여론을 향한 서핑이죠. 그 상황에 딱 들어가 버리면, 승리의 카드가 누구냐 이런 논의에 딱 들어가 버리면 그 게임에 대해서 충실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하고 단일화를 받았을 때 제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다 그랬더니,
“ 하지만 이거 안 하고 그냥 가면 이길 수가 없겠지? 그렇게 해서 지면, 야당이라도 우리가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는가? 못 지키겠지? 양김이 87년에 분열 되어서 우리가 지금도 이렇게 난린데, 또 다시 분열로, 국민들에게는 분열로 설명이 될 텐데, 그 분열에 의해서 선거에 져 버리고 나면, 그 귀책사유의 책임을 생각해 보게.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네. 이건 받아들이게. 그걸 받아낸 상태에서 또 이겨낼 생각을 하세.”
이러셨어요.
총 : 여론조사가 그때 노무현 후보에게 불리하지 않았습니까?
안 : 그게 정치인 노무현의 방식이죠. 오히려 여론조사가 가장 밀렸을 때, 정몽준씨보다 뒤쳐졌을 때 정몽준씨가 스스로 유리하다고 하는 발상을 역발상으로 받아버리는 그 타이밍은 순전히 노무현의 정치 감각이죠. 자기가 우위에 있을 때, 기세를 가지고 공세를 취해서 빨리 단일화해야 한다는 게...
총 : 그게 보통 정치인들 하는 짓이잖아요.
안 : 예. 하지만 스스로 몰린 상태에서 그걸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쳐 버리는 게, 그게 노무현의 방식이죠.
총 : 사실은 그래서 사람들도 노무현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저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여론조사가 뒤집어 졌죠. 사실 그런 배짱과 감각은 타고 나야 하는 거거든요. 머리로 되는 게 아니라. 품성이죠. 그리고 후단협 나오고 그런 내부 논란이 있었던 건 지지율이 떨어져서도 그렇지만, 사실은 노무현이 대선후보급의 자금을 땡겨 온다거나 세를 만들거나 그런 게 없어서였던 거 아닙니까.
안 : 없었죠.
총 : 그래서 그렇게 후단협 나오고 그랬던 거 아닙니까?
안 : 전통적 방식의 보스 권한, 그런 걸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고 전통적 방식의 보스 의무를 하지 않았죠. (웃음)
총 : 그러니까 돈을 안 땡겨왔다는 거 아냐(폭소) 아, 못 땡겨온 건가. 안 땡겨온 게 아니라.
안 : 아, 안 땡겨온 겁니다.
총 : 그래요?
안 : 제가 손댈까 싶었는데, 후보가 못하게 하셨어요. 2002년 4월에 우리가 후보가 됐어요.
총 : 근데 돈을 안 땡겨오면 정치판에선 말빨이 안 서잖아요. 후보가.
안 : 그렇죠. 후보가 딱 등장을 해서 사무총장 불러다가 당 자금 철철 넘치게 해 주고, 선거대책 본부장들한테 딱딱.
총 : 꽂아주고.
안 : 꽂아주고.
총 : 그래야지 조직이 움직이고...
안 : 그러면 사람들이 아- 역시 우리 보스가 이제 대세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줄 서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빚을 진 것을, 대통령 되면 무슨 수로 갚습니까.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걸 일체 못하게 했어요. 저는 그렇게라도 해서 후보의 지위를 굳건하게 하려고 마음이 흔들렸었는데, 노무현 후보가 못하게 했어요.
총 : 아이, 참 잘하셨어요.(폭소) 그런데 막판에 정몽준이가 삐져 가지고 집에 쳐박혀 있을 땐 뭐라고 하던가요? 사람들이 막 사과하러 가야한다고 그랬었잖아요.
안 : 저도 그때 과로로 링겔 맞고 있다가 그 얘기를 듣고서는 링겔 뽑고 달려갔어요. 당사에. 그랬더니 후보사무실에 수 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와서 왜 후보가 그런 말을 해 가지고 다된 밥에 재를 뿌렸느냐 그러면서 모두가 후보들을 비난을 하는 거예요. 정몽준씨 옆에 있는데 자 우리에게도 후보가 있습니다. 정동영~ 추미애~ 올라와보세요 해서 정동영 추미애 손을 흔들어주니까 정몽준씨가 노무현 다음에는 나다, 이렇게 모양이 갖춰주길 원했는데 이거는 배신이다 이러면서 간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 대해서 후보에게 막 힐난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난 실무자였으니까.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때 정동영 의원이랑, 정대철한테 그랬어요. 정말로 저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 대체 왜 이럽니까.
총 : 노무현 대통령이 앉아 있는데?
안 : 예. 소파에 앉아 있는데.
총 : 앉아 있는데 수십 명이 둘러싸고?
안 : 예. 그러고 난리를 부리더라고요.
총 : 으하하하하. 난리..
안 : 너무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상황이. 후보는 가만 앉아 있고. 그렇다고 자기가 소신 없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난리 났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자기가 화를 낼 상황은 아니고. 그러니까 아주 난감하게 그냥 죄인처럼 앉아 계시는데 미치겠더라고. 화가 나서. 그래서 사람들 다 물리치게 하고 김한길 위원장하고 네다섯 명 만나 가지고 최종적으로 집에 한 번 찾아가서 정몽준씨 철회를 요청하기로 하자. 노무현 후보는 안 가려고 했어요. 그 집에도. 철회를 하면 그 사람이 하는 거지, 하면서. 그러셨는데 결국은 끌려간 거죠. 끌려가다시피 해서 정몽준씨 집 앞까지 갔다가 외면당하고 돌아오셨죠.
총 : 가긴 잘 가셨잖아요.
안 : 아, 다들 나중엔 가기 잘 가셨다고... (폭소)
총 :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다음에 뭐라고 하시던가요? 정몽준 집에 쳐 박히고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할 때.
안 : 그 날 투표 하시고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개표방송을 여의도 한 호텔에서 나랑 수행비서랑 대통령이랑 넷이서 앉아서 봤어요. 초반에 보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난 들어가 잘란다, 그러시더라구요. (폭소)
총 : 크하하하하... 아니 본인이 대통령이 되나 마나 하는 개표를 보다가.
안 : 아니 개표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폭소)
총 : 그러는데 들어가서 잔다구요?
안 : 출구조사는 우리가 이기는 걸로 나왔어요. 만세 부르고 난리 났죠. 그런데 난 잔다고 하시더라구요. "확정이 됐을 때쯤에 깨워주게" 하면서.(폭소)
총 : 으하하하 확정이 될 때쯤 깨워주게 으하하하하....
노무현은 참, 노무현이다.
안 : 그때 큰 방을 얻었는데, 우린 응접실에서 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안에서 주무시고, 열시 반인가 열한 시 쯤 깨워드렸나. 모시고 나와서 당사에 가서 만세 부르고, 그랬죠.
총 : 제 말은 그 전날 정몽준 집에 갔다가...
안 : 그 뒤로는 그 이야기 일체 안 했어요.
총 : 그랬군요.
안 : 그 다음 날 제가 뵐 기회도 없었구요.
총 : 그런데 들어가서 잤어요? 하하하하. 잠이 오나 몰라요?
안 : 실제로, 일어나셨을 때 얼굴 보면 정말로 잔 얼굴이에요, 그 얼굴이.(웃음)
총 : 하하하. 뒤에서 혼자 보고 오신 거 아냐?(폭소)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로 듣다가.(웃음) 근데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는데 뭔가 큰 일이 있어서 다들 긴장하고 그럴 때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자 버린다고 하더라고.
안 : 맞아요.(웃음)
이제 오늘의 질문을 할 차례다.
총 : 아까 생수사업 잠깐 얘기하셨는데 결국 그 일로 재판받고 말이죠. 이게 제가 생각해도 이게 참 억울해요. 그게 뇌물이란 게. 근데 어쨌든 감옥 갔단 말이죠. 억울하게.
안 : 예.. 그때 사실 굉장히 억울했죠. 2004년도 12월에 구속이 되었을 때. 그 당시 대통령이나 저나 했던 고민으로는, 이건 그냥 여야간 정치적으로 무마하고 타협하고 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꺼내 놓는 게 옳으냐... 그때 판단으로는 꺼내놓자. 그러면서 기업의 비자금 문제도 이번 기회에 널어서 말려야 되지 않겠냐, 햇볕에.
총 : 네 뭐 그런 대의와 명분 다 좋은데, 이건 본인 얘기 아닙니까. 본인이 감옥이 가느냐 마느냐.
안 : 2003년 2월에 인수위에서 제가 빠지고, 독립선언을 했었던 시점서부터 수사 받을 결심을 했던 겁니다. 이게 안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수사를 받자. 그때 제 심정이 어땠냐 하면 본진은 이제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남아서 추격꾼들을 맞아야 되는 상황인 건데.
총 : 게다가 그걸 영광스럽게 혼자 다 처치하고 다시 본진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고.
안 : 내가 여기서 이겨서 본진에 다시 합류할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게 희망을 품어 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희망은 없었어요. 끝내 5년 내내 본진에 합류하지 못했지요.
총 : 지금이야 안희정 하면 의리, 의리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어요. 정말 그래요. 이제는. 근데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다 바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데 그 영광은 단 한 번도 못 누렸단 말이죠. 최소한의 영광을 누릴 기회조차 없었어요. 당선 되자마자 청와대도 못 들어갔고, 청와대는커녕 감옥 갔고, 나와서도 공천도 못 받았고. 그러니까 그 5년 내내 아무런 혜택을 못 누렸어요. 이게 억울하지 않았어요 진짜로?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문재인 수석도 안희정 건을 구속 쪽으로 이야기한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버려진 거잖아요. 그때 일을 가지고 기업 비자금을 햇볕에 말리네, 하는 무슨 역사적 의미고 나발이고, 실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이지 야속하고 섭섭한 거 아닙니까. 게다가 그 이후가 보장된 것도 약속된 것도 아무것도 없고.
안 : 예 뭐 저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저뿐 아니라 가족들한테는 뭐 굉장히 어려운...
총 : 본인은 그나마 그 논리라도 이해하잖아요. 마음은 힘들고 몸은 힘들어도. 그런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그게. 평생을 바쳤는데 다들 영광을 누릴 때 혼자만 감옥 간다니. 그것도 혼자 그 돈을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안 : 그래서 대통령이 취임하시고 나서 5월인가 6월 국민과의 대화 시간에 안희정씨는 제 동업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신 거죠. 측근인 안희정씨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안희정씨는 제 동업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어요.
총 : 음...
안 : 그래 가지고.....(보좌진 들어어고 시간이 없단 사인을 한다) 아, 근데 이제 시간이 다 된 거 같은데(폭소)
총 : 크하하... 근데 이제 겨우 반 했는데.
안 : 에? 진짜 반 했어요?
총 : 반이죠. 출마한다고 왔는데 아직 출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잖아. (폭소) 이거 한 번 더해야겠네. 오늘은 일단 삼십 분만 더 주시고.
보좌관 : 아니 그럴 수가... 벌써 밖에 와 계신데. 교수님하고, 컨설팅 회사에서.
총 : 그럼 한 번 더 올 게요. 2부를 한 번 더 하죠.(웃음)
안 : 하하.. 예...
총 : 그럼 이 1부를 한 십 분만 더 주세요.
안 : 아... (보좌관과 눈 마주치며) 그래요.
총 : 아직 출마도 안 했기 때문에 (폭소)
안 : 그때 집에서 TV를 보다가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나서 집에 있을 때였는데, 그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때가 2003년도니까 7년 전이면, 제 나이가 마흔. 젊은 참모한테 대통령이 동업자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지금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한테. 이게 대통령한테 엄청난 공격거리가 될 거고.
그래서 그 며칠 뒤에 한 번 볼 기회가 있어서, 일요일 날 밥 한 번 먹자고 해서 가서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냐고... 그렇게 얘기 안 하셔도 전 괜찮고, 제 걱정 안 해주셔 된다고 하니까.
"자네걱정 하는 게 아니라 자네 가족들 때문에 그랬네"
하시더라고요. 자네 부모님이나 자네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그 일이 대통령이나 저나 뭐 대통령 편하자고 꼬리 자르기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주류가 보기엔 못 먹을 권력을 먹고 나서 그들에게 완전 당하고 있는 거였거든요.(웃음)
우린 그 면류관을 들고서 절대로 링 밖으로 떠날 수가 없는 팔자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세레모니 하고 집에 다 상패 가지고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 면류관을 쓴 채로 링에서 맞아죽거나 싸울 수밖에 없는 팔자가, 대한민국에서 노무현과 우리들의 도전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러한 시대의식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제 마음이 고통스럽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죠.
총 : 가족들은 노무현 대통령 욕 안 했나요?
안 : 음...
총 : 인간이라면 욕을 해야 마땅한 거 같은 데요 저는.
안 : 그게...
총 : 둘 사이의 교감이야, 두 분 사이의 일이고.
안 : 근데 우리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용케 대통령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편안하게 잘 나갔으면 모르겠는데 대통령 임기 내내 하루가 편한 날이 없었잖아요. 만약 안희정은 고생하는데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잘 나가. 그러면 원망이 있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대통령은 내가 감옥에 가는 거 이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시달리고 있는데 누굴 원망하고 할 수가 있겠어요. 임기 5년 내내 그랬잖아요. 그래서 다행히 우리 가족 누구도 대통령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총 : 초선의원을 대통령까지 만들었단 말이죠.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단 말이죠. 그랬는데 정작 본인은 감옥 가고. 지금이야 다시 의리라는 키워드라도 있죠. 그 5년간 본인은 묶여 있었고 잊혀져있었고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고. 무려 5년간이나. 스포트라이트는 예를 들면 유시민 전 장관이 받고, 이런 게 어떻게 억울하지가 않습니까? 인간이.
안 :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그런 마음이 있었죠.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용케 그 피리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잘 버텨왔어요. 돛대에 내 몸을 어떻게 묶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물론 노랫소리가 들리죠. 누가 잘 나가고 누가 잘 되고 누가 뭐하고. 그런 얘기 들리지만 그것을 극복했던 첫 번째는 문재인 실장이나 이광재나 유시민씨를 제가 좋아합니다.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잘 되는 걸 나도 기뻐하려고 노력을 했구요.
여기까진 준비된 답변이다. 평생 훈련된 정치 언어로 정제된 답변. 아마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을 해왔을 게다. 그리고 본인도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해두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인간이 명분과 논리만으로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순 없는 거다.
난 정치인 안희정이 아니라, 인간 안희정의 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다.
총 : 아니 청와대에서 그 흔한 무슨 직을 맡은 것도 아니고 감옥 갔다가 국회의원도 못 나가게 하고 장관은커녕 그 어떤 자리도 없었잖아요. 그거는 명예조차 없는 거거든. 허탈하기도 하고 백수니까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안 :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한테 패자가 되었을 때, 패자가 어떻게 역사에 기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큰 배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시기 질투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내 배역은 이 배역이다. 이 배역도 가장 적극적 배역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제 자신의 논리를 만들어서 끊임없이... 그랬죠.
그러니까 저는 제가 그 정도 재목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웃음) 노무현 대통령한테 그런 정신을 배웠고, 아까 말씀드렸지만 정몽준한테 패자가 되었을 때 아, 정치가 저런 맛으로 하는 거구나, 아 저거다, 저게 진짜다. 길게 봐서 역사를 썼을 때 볼록이만 활동하는 게 아니다. 오목이도 얼마든지 역할을 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에서만, 양지에서만 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했죠.
그리고 대선자금 수사에서 총대 메고 혼자 감옥 갔지만, 그 놈이 대통령과 맺어졌던 의리와 우정과 신념을 변치 않고 잘 버텨서, 5년이 끝나면, 그 끝나는 순간이 저는 제가 시집가는 날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총 : 거꾸로, 그렇게.
안 : 예. 그게 2004년도 감옥에 가서 했던 나름의 마음공부였어요.
총 : 글쎄요.(폭소) 지금이야 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씨바 왜 나만 좆 됐어!(폭소)
안 : 하하하하하
안 : 맞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을 하기보다는...(한참을 생각하다) 그냥 대통령이 난 좋았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명분과 논리로 현상을 설명하는 데 평생 익숙했던 그 자신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게다. 그 이유를.
총 : 노무현이 그렇게 좋았나 봐요?
안 : 예. 대통령한테 도움이 되는 길이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을 했어요.
총 : 그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나요?
안 : 예. 아주 좋았어요.
총 : 노무현 대통령을 인간으로서 좋아하신 거 같은데... 한명숙 전 총리 인터뷰 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 서거소식 안희정한테 전화해 물었는데 근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했다고 그랬었거든요.
안 : 한명숙 총리한테 전화를 했던가? (일어나서 휴지 뽑아서 코 풀고) 잘 모르겠네.(울먹이며) 나도 문 실장한테 전화를 받고 봉하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총 : 왜 눈이 빨개지시는 겁니까? (웃음)
안 : 대통령이 좋은 분이다 얘기를 하고 나니까 갑자기 그리워져서. (다시 일어나 휴지 뽑는다. 눈물 닦고. 침묵. 울먹인다.) 맞아요. 내가 그... (다시 코 풀고) (오래 침묵) 아, 이게 참... 하여튼 그 분 도와서 감옥 가는 역할이라도 그 분을 위하는 일이라면 저는 행복했어요.
제가 뭐 억울하다는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좋았어요. 아...(다시 한참을 울먹인다) 그날 아침에 문용옥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형, 대통령이 아프셔서 병원엘 갔다고. 빨리 내려오셔야겠다고. (다시 코 풀고. 한참 침묵) 다른 얘기 안 할테니까 빨리 오라고. 아침 8시엔가... 아마 병원에서 한참 난리를 치고 전활 한 거 같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한참 침묵)
그러고 내려가면서 한 총리님과 통화했던 기억이 잘 안나네. 하여튼 그 당시 가는 내내 믿겨지지가 않았었으니까. 근데 대전쯤 지나 왔을 땐가, 천안 지났을 땐가 그때 서거를 공식화했다고 (눈물...) 아, 그때부터... 언제였지 4월 30일, 31일, 그때 검찰 소환 될 때, 그때 내가 버스를 막아서라도 못 가게 했어야 하는데. 그때 막았어야 했는데.(눈물...)
이 대목에서 그는 한참을 울었다.
아 씨바, 눈물 참느라 혼났다.
총 : 이창동 감독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출두해서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을 막 찍고 그러다가 노대통령이 이제 그만 합시다... 하고 들어갔는데. 그때 이제 그만 합시다.. 하고 말하는 표정을 자기가 봤는데. 그때 자기는 굉장히 불안했답니다 그 말이. 그게 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어떤 불길한 느낌이 왔다고..
안 : 그 전 날 저녁에 여럿이 몰려가서 인사드리고 할 때 대통령이, 참여정부 때 장관들 앞에서 '면목 없습니다.' 하시는데, 내가 앞에 앉아 있다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 면목이 없습니까. 대통령 권력을 가지고 박연차 뭐 봐주신 거 있습니까. 대통령 권력으로 박연차 뭘 봐준 거 없잖습니까. 퇴임하고 나서 봉하마을 도움 좀 받았습니다. 그게 대통령 권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거 권력형 비리 아닙니다. 오래된 후원자가 퇴임한 대통령을 위해서 도네이션 한 건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랬더니 노무현 대통령께서 굉장히 겸연쩍어 하시면서.
"그 소리를 내가 할 수 있나...."
그러니까 그 소리를 누군가 대신 해줬어야 돼. 그 소리를 누군가가 해줬어야 되는 거였는데. 그런데 그때 이광재나 안희정이나 다 팔다리가 부러져 있었거든. 나도 대전지청에서 십억을 받았느니 십오억을 받았느니 해서 조중동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렇게 진흙 묻은 놈이 '우린 권력형 비리가 아냐~'하고 소리를 지른들 대통령한테 누나 끼치는 거지. 완전히 주변 팔다리 다 잘라 놓고 안방에 들어와 버린 거죠. 자객이. (담배에 불붙이고 한 모금 빨더니) 맞다. 나, 출마 이야기해야 하는데.(대폭소)
총 : 자, 이제 출마 이야기 합시다.(대폭소) 시간이 없으니 딱 한 가지만 얘기할 게요. 나 이명박한테 복수하고 싶다 씨바. 이런 사람은 많지만 방법을 못 찾고 있어요. 민주당은 미덥지 않고 참여당은 아직이고. 마음 줄 데가 없는 거죠.
안 : (연기 뿜고) 그래서 제가 충남 도지사에 출마합니다.(대폭소) 이번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승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겐 가장 가슴 아픈 패배가 될 겁니다. 16개 시도지사와 대통령이 협의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쇼. 그 분을 20년 가까이 모셔왔던 참모가, 그분이 세웠던 균형발전과 정책적 가치를 모두 기치로 내세워서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승리한다는 것. 훗날 역사가 이 상황을 뭐라고 기록하겠습니까. 저는 그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도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역사를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역사의 기록은 내가 그때 뭐라고 떠들고 주장했느냐가 아니라 국민들이 당시 어떤 가치판단을 내렸고 어떤 결론을 내렸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후임대통령이 전임대통령을 모욕주고 망신주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그를 위해서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그의 가치를 위해 헌신해온 안희정이가 그 죽음의 부당함을 알리면서 그 이듬 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그 승리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하는 출발점이 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그 기록은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도전하는 겁니다.
총 : 선거 이야기 이제 시작했는데, 바로 끝나네. (폭소) 후반전은 다음에 하죠. (웃음)
안 : 그렇게 하시죠. (웃음)
그렇게 출마 인터뷰하러 갔는데 결국 출마의 변은 딱 1분 듣고 끝이 났다.
그러나 그 1분으로 충분했다.
난 사실 안희정에게서 딱 한 가지만 궁금했다. 그는 왜 노무현을 떠나지 않았을까. 5년이면 짧은 세월이 아니다. 더구나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보상을 누리고 있을 때 오히려 버림받고 잊혀 진다는 건, 그 외로움과 배신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다. 더구나 그 끝에 어떤 대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건 명분이나 논리로 설명이 안 된다. 실은, 무작정이라고 해야 옳은 게다. 그는 왜 무작정, 노무현 곁을 지켰을까. 난 그게 궁금했다.
이제 알겠다.
그래서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구나.
이제 알겠다.
노무현이 왜 그를 위해 눈물 흘렸는지.
그리고 또 이제야 알겠다.
인간 안희정이 어떤 사람인지.
정치인 안희정이 아니라,
인간 안희정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선거 끝나고, 다시 한 번 그를 만나야겠다.
...
철 지난 딴지일보를 들여다 보는 시간, 벌써 새벽 다섯시가 넘었구나...
노무현 후보 시절과 안희정 후보 시절의 이야기들 앞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불현듯 <역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매력,
그게 못내 부럽다.
...
...
[정치] 일망타진 이너뷰 제 3탄 - 노무현
2001.4.9.월요일
딴지총수
뽕빨스피릿으로 무장하고, 작은 손 동작 하나에서 순식간에 스쳐갔던 느낌까지 최대한 정밀하게 다시 복원하여 독자제위께 딜리버리하는, 그 유명한 '거의' 대선후보 일망타진 이너뷰, 오늘은 그 세 번째 민주당 노무현 상임고문이다.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인제 위원과의 직접적인 비교를 위해 이인제 위원에게 했던 질문들 중 많은 질문을 그대로 다시 필요가 있었기에 이인제 위원의 인터뷰가 본지를 통해 공개 되기 전인, 2001년 2월 22일 목요일 오후 4시,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12층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보좌관 2명의 배석 하에 인터뷰가 이뤄졌다.
노고문은 사석에서 김중권 당대표를 기회주의자라 언급한 일과 '언론의 조폭성'에 대한 발언이 불러온 일련의 상황들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본지와 인터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자들이 본지와의 인터뷰 내용 자체를 취재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했다며 인터뷰 말문을 이렇게 열었다. ( 3.26개각에서 장관에서 물러나기 전이므로 인터뷰 중 호칭은 '장관' )
노: 대강대강 합시다마.. (웃음)
김: 안됩니다. (웃음)
노: 딴지의 취재 상황이 또 다시 다른 매체의 취재 소재가 되는, 그런 상황이 됐으니 내가 얼마나 말을 조심하겠어요.
김: (웃음)
노: 이제 우리 그, 인터넷 매체라는 속닥함이 있잖아요? 그쵸? 이제, 마음도 편안하게 얘기하고..
김: 볼 사람만 보고..
노: 그쵸. 볼 사람만 보고. 거기에, 그 매체의 독자는 좀 특수하잖아요. 그쵸?(웃음) 그러니까 거기에 맞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 이거 보고 타 매체에 쓰겠다고 하니까.. 우리 밋밋하게 좀 합시다.(웃음)
김: 저희가 이.. 제목이 뭐냐면 일망타진 대선후보 인터뷰입니다.
노: 대선후보 일망타진해버리면, 대선에선 누가 하나.. (웃음)
김: 대선후보와 일망타진 사이에 궁금증이라고 조그맣게 쓰여 있습니다.(웃음) 가능하면 여러 가지 형식의 인터뷰를 해서 모든 궁금증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건데... 사실 딴지일보는 편파적입니다. (둘 다 크게 웃음) 그러나, 딴지일보가 어떤 편파적인 견해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는 최대한 객관적입니다.
노: (고개를 끄덕이며) 음, 좋습니다.
김: 그러니 노장관님도 다 털어놓으시죠. (웃음)
노 : 알겠습니다. (웃음)
김: 혹시 생선 반찬 좋아하십니까? (웃음)
노: 글쎄.. 이제 생선도 좋아하고.. 생선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생선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
김: (웃음) 이 질문을 드린 이유는, 전임 장관이 어느 TV 프로에 나와서, 해양수산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했더니, 답변이 '나는 생선 반찬을 좋아하기 때문에 해양수산에도 관심이 많다' 라고 해서, (웃음) 웃음거리가 됐었는데... 노 장관님에게도 해양수산에 대한 전문성이 결여가 돼 있다고 지적을 할 수 있는데..
노: 전장관 그 얘기는 위트라고 생각하는데요. 장관 업무에 관해서 전문성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있으면 좋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이 장관직이라는 게, 한 전문 분야에 국한된 것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 영역 전반에서 많은 일들을 종합해서 균형 있게 조정해 나가고, 또 그 업무를 국정 전체에서 조화롭게 맞추어나가는 것이거든요.
전체 국정의 일부로서 업무를 조화시켜야 하고, 또 이 소관 업무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전문 분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합해서 조정 운영해나가는 그런 업무입니다. 균형 감각이 아주 중요하지요. 그래서 전문적 분석력보다는 일반적 종합력이라든지 균형 감각, 이런 것이 중요합니다.
김: 행정적 운영력 자체가 더 중요하다..
노: 그렇습니다, 예.
어느 분야나 장(長)의 위치는 전문적 분석력보다는 종합적 균형감각을 더 요구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최소 일정 수준에 이른 후에야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거다. 전문성이 전혀 없으면서 그리 말하는 건, 구차하다.
김: 최근 노장관님의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은 대부분 외교적인 수사를 사용하는데, 노장관님의 경우엔 에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발언하시는 데… 예를 들면 김중권은 기회주의자 어쩌구 하신다거나... (웃음)
노: (웃음)
김: 죄송합니다, 어쩌구라고 해서. (웃음) 하여튼, 이런 발언들이 '물의'를 일으키고 그러면 보통은 사과를 하거나 수습, 축소하려고 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 월간중앙에서 인터뷰한 걸 봤더니, 뭐 별로 안 물러서신 것 같더라구요. 솔직하고 허심탄회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정치적 쇼맨십이다, 정치적 기반이 없으니까 주목 받기 위해 오바를 하고 있다 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 그 저기, 이런 거라고 봐야 됩니다. 예식 할 때, 예를 들면, 예식이나 행사를 할 때 입는 옷이 다르고, 작업할 때 작업복이 다르고, 놀이할 때 놀이옷이 다르고 등산복이 다르듯이, 우리 얘기도 공식적 업무와 관련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얘기와, 또는 편한 자리에서 술 마시며 하는 얘기와 또는 집에서 가족들이 하는 얘기는 내용과 품위를 다르게 하게 돼 있거든요.
저는 이제 기자들과 그 공식성 없이 편안하게 서로 대담도 하고 논쟁도 하는 자리에서 한 어떤, 그런 얘기였거든요. 그런 얘기기 때문에 소위 그, 품위와 격식을 갖추지 않고 그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현이 다듬어져 있질 않았지요. 그런 그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그 자극적인 문구만, 대화 전체의 흐름보다는 자극적 문구 중심으로 전달되다 보니까 좀 우습게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편안한 자리라고 해서 전혀 근거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니까. 그걸 또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죠..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다 보니 아주 좀…(웃음) 그렇게 됐습니다, 예.
김: 다시 고쳐 질문을 드리자면, 그러니까 그게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발언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노: 내가 만약에 의도적으로 했다면 좀더 세련된 표현을 썼을 겁니다. 좀더 조심스럽게, 좀더 세련된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 김중권대표의 급부상, 이인제의원의 움직임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초조해서, 그랬다 라고도 하는데..
노: 제가 비교적, 제가 비교적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제 정치 행적을 보아도 아시겠지만,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좀 더 멀리 내다보면서 정치를 해온 사람인데, 뭘, 그거 급급해서 그렇게 무리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그것이 저한테 이익이 될 건지 손해가 될 건진 나중에 봐야 알겠지만, 누가 봐서라도 그것이 이득이 될 거라고 판단하진 않았을 겁니다. (첫 번째 담배에 불을 붙임)
김: 그럼 김중권 당 대표는 결국 기회주의적인가요.(웃음)
노: 논리로 설명할 일은 아니지요.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제가 그 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평가의 일단입니다. 일단이고, 뭐, 그분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 고려해야 될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일단인 것은 틀림없고. 그걸 또 뭐 설명을 하는 것은 너무 복잡한 일이예요.
김: 뭐 별로 복잡한 거 같진 않은데.. 설명해주시진 않을 것 같군요..(웃음)
노: (웃음)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고, 또 실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역감정 해소의 최적격자라는 주장에 정면으로 시비를 걸어보기로 했다. 가장 자신 있어 할 부분을 확 깨물면, 어찌 반응할지..
김: 호남에서 얼마나 득표할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만약에 출마하신다면.
노: 그것은 제가 뭐라고 대답하더라도, 정확할 수가 없지요. 별 의미도 없고, 다만 적어도 저는 인간적으로, 상당히 신뢰를 받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 진심을 이해하실 거라 보고, 또 신뢰성에 있어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말씀하신대로 호남지역에서 신뢰를 가질 행보를 해오셨고, 상당한 득표를 하지 않을까 저희는 예상합니다.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역설적인 지역감정이 아닌가 하거든요. 소위, 호남이 지지하는 사람이 이제는 영남출신으로 바뀌는 것일 뿐, 특정 지역이 특정 후보를 비상식적으로, 배타적으로 지지한다는 지역감정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영남 지역감정의 구실 중 하나가 호남의 몰표인데... 봐라 호남 뭉치는 거, 그러니 우리도 뭉쳐야 한다... 이런 식의.
그런데.. 만약 노장관님이 출마해 호남의 민심이 뭉친다면 뭉쳐있는 구심점이 영남출신 인사일 뿐 본질은 바뀌지 않아서, 노의원의 강점 중의 하나인 지역감정의 돌파구가 될 거라는 기대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 결국 노장관님으로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게 아니냐, 해결책이 아닌 거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노: 네, 그런 점 있다는 거 동의합니다.
" 네, 그런 점 동의합니다..." 라는 발언은 상당히 의외였다. 자신이 십여 년에 걸쳐 힘들게 획득한, 중요한 정치적 상징성에 대한 의문제기에 이렇게 쉽게 수긍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너무 순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맘 먹고 던지는 정면공격에 대해 이렇게 맥 빠질 정도로 손쉽게 고개를 끄덕여버리는 경우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게 도대체 정치인으로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이제.. 제가 십 년간 지역감정과 부대끼면서 얻은 결론은, 지역정서는 논리적 설득으로 바꿔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치적 구도와 계기에 따라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계기와 구도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지 합리적 설득만으로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앞으로 이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제도를 바꾸는 것도 쌍방이 호응할 때 제도가 바뀌는 거니까 의식이 먼저다.. 의식과 정서가 문젠데, 영남에서도 정서적으로 호감이 있고, 호남에서도 정서적으로 호감이 있고, 영남에서도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고 호남에서도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는 집단이나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든지, 이렇게 됐을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은 해소될 것이다.
정치에 있어 편가르기가, 편가르기의 기준이 지역도 있고, 정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책에 의한 경계선이 지역 정서 때문에 무력화되어 있거든요. 근데 만약에 어떤 계기로, 어떤 정치 집단이 영남에서도 정치적 거부감이 없고, 호남에서도 정치적 거부감이 없거나 덜하고 신뢰성도 어느 정도 확보가 된다면, 그때는 이제 정책에 의해서 편가르기가 되는 그런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것을 우린 전선이 바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방향입니다.
김: 그렇다면, 스스로가 그런 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노: 처음에는, 처음에는 말하자면 이치로서 그리고 정당성으로서 싸워서 설득을 하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그걸 실패했고... 그런데, 그 결과로 제가 지금 현재 선 위치가 그런 여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와 가장 가깝지 않느냐... 말하자면 저는 현재 어떤 의미에선 지역감정을 역이용해서 지역감정을 해소할 계기를 만들어낼 수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김: 조금 더 설명해 주십시요. 지역감정을 역이용할 수 있다는 말…
노: 예를 들면 그렇죠, 그건 이제 말하자면 역지역감정을.. 영남에선 제가 영남 사람이기 떄문에 그래도 호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신뢰를 가지고 있거든요. 호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그 동안에 호남당을 열심히 했으니까. (웃음)
김: (웃음)
노: 그리고 정치적 정당성을 추구하다 희생도 치렀으니까. 호남도 신뢰를 갖고 있거든요. 그것이 말하자면 호남에서 저를 지지하는 것이 지역감정이 아니냐고 지적하셨는데 그것이 지역감정이라면, 영남의 지역감정과 호남의 지역감정을 하나로 뭉쳐버리는, 지역적 차별성을 좀더 희석시킬 수 있는 위치에 제가 있지 않으냐..
김: 그러니까 호남이 지역감정으로 지지하는 사람과 영남이 지역감정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자가당착적 모순을 만들어, 유권자들을 순간 혼돈스럽게 만들어 그 어지러운 사이 당선돼 버리는 작전입니까…(웃음)
노: (웃음)
김: (웃음) 글쎄, 그게 말로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노: 그럴 수 있다고, 그래서 나중에 정책으로 전선이 갈라질 수 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지난 총선에 출마하실 때 비장하셨고, 당선되었을 상황들에 대해 청사진을 그렸겠지만, 결국 낙선되었고 그래서 '큰 정치적 타격이다, 대권 도전에 적신호다... ' 하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근데 실제 지나고 보니, " 정형근 의원은 당선이 되고 노무현이 떨어졌다 이건 좀 심했다.." 하는 정서가 영남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고, 그러니까 영남민심에 일종의 부채 의식을 안겼고, 그래서 오히려 심정적인 반대급부로 인해 차기대선에서 과거보다 유리해지는 것이 아니냐.. " 이번에는 노무혀이 함 밀어주자 " 하는 영남식 의리론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이 저희 나름대로의 분석입니다만, 그런 상황 생각을 해보셨는지..
노: 저는… 희망사항이기도 하고, 그럴 거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김: 그럼 그동안 부산에서 고의로 떨어지신거군요. (웃음)
노: (웃음)
최소한 지역감정에 관한한, 국내 정치인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떳떳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김: 정치인 노무현의 옆엔 사람이 없다고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노무현 옆에서는 떡고물도 없고 깨끗한 정치를 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론 정치적 리더쉽의 부재 아니냐, 혼자서 현실정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이건 집권 능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확대할 수도 있는데..
노: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이제, 표면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표면적으로 어떤 뭐, 드러내놓고 계보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게 가능성이 있을 때 지지의사를 표명할 심정적 동조자는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그 정치 계보로써 그렇게 뭉쳐있는 것이 당내에서 이런저런 경쟁을 하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가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적 지도력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되고, 그리고 공정, 공정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들을, 이해관계로 똘똘 뭉치게 하는 능력.. 그게 성공한 지도자다, 이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김: 지금까지는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이인제 최고위원 쪽이 가능성은 더 높은 것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면서도 이회창 총재를 상대 축으로 했을 때 가상 대결을 보면 오히려 노장관님이 득표를 더 많이 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쨌든 결국 이인제 위원이 됐다. 이럴 경우에 승복하실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게다가 하필이면 이인제 위원일 경우. (웃음)
그의 이인제 '무시'는 뿌리가 깊다. 삼당합당에 동참한 이인제위원의 정통성 결여와 철학 부재를 탓하며 지난 대선에서 이인제가 출마하면 나도 나가겠다고 했던 노무현이었다. 궁금했다. 지면 어쩔지.
노: 답변하기 전에, 아까 내가 좀 미흡했던 답변. 그 계보가 많다는 것이 그것이 곧바로 지도력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제가 그 내놓고 계보처럼 뭉친, 이해 관계나 연고로 뭉쳐있는 사람은 없지만,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고 힘을 합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항상 위로, 선배를 모시고 정치를 해왔어요. 존경하는 선배를 모시고 정치를 해왔고. 그 점에 있어선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 다음에 이제, 다음 꺼 말씀을 드리면, 아무튼, 요 부분에 대해선 어떻든 제가 그 게임을 하는 이상, 게임의 결과에 대해선 승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임을 할 땐 게임 결과에 승복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저로서는 역사성과 정통성 같은 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치인인데, 그럴 경우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고민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긴 참 어렵다 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 간단히 말해, 이인제 위원에게 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 질 수도 있습니다.
" 질 수 있다. "
이런 답변을 그냥 망설임없이 해버리는 데, 묻는 사람이 놀란다.
노: (담배에 두 번째 불을 붙임)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게임의 결과에는 승복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모시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말하자면 '우리'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할 것이냐.. 라는 것에 관해서는 정확한 예측을 하기 어렵고, 또 제 마음이 그때 어떻게 될지는 명확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김: 승복하신단 말씀은, 어쨌든……
노: 막 뛰쳐나와서 출마를 한다든지, 이런 일은 없다는 거죠. 불복하고 뛰쳐나와서 출마를 하고 이런 일은 없지만, 그 다음의 문제... 진심으로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서 당원으로서 의무를 다 할 것이냐, 아니면, 뭐.. 이제, 정치는 (왼팔을 들어 내저으며) 여러분들끼리 잘 해라…
김: (웃음)
노: 정치는 여러분들끼리 잘 하고, 내가, 나는 마, 당을 떠나겠다... 해야될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결론이 없습니다.
김: 똑같은…
노: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미리 정해놓은 게 없습니다.
김: 똑같은 질문을 이인제 위원에게 했더니, 최우선은 국민의 지지가 아니냐, 이렇게 답변을 하던데. 그래서 어.. 이 쪽은 안되면 또 나가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웃음)
노: 당원에 대한 위협이지요. 전략상의, 전술상의 위협일 수도 있지요. 저 역시 그 전략상의 위협, 전술상의 발언을 한 번 해볼까 하는 유혹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전술상의 발언을.. 그런데, 뛰쳐나간다.. 라고 했을 때 당원들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런 상황에 빠집니다. 그런데, 난 그런 행동은 국민들에, 당원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알겠습니다. 대중적으로는 청문회 스타, 그 한 이미지로 지금까지 먹고 살았다 할 수 있는데..
노: 맞습니다.
또 맞단다. 나름대로 아프라고 찔렀는데 이렇게 그냥 인정해버리니.. 속으로 아 씨바.. 했다. 반박하고 재반박하면서 그 와중에 허점도 드러나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다..
김: 이제는 청문회를 못 본 소위 인터넷 세대가 유권자로 등장했는데, 혹시 인터넷 세대에게 어필할 나름의 전략이 있으십니까.
노: (왼손으로 무릎을 쓰다듬으며) 딴지일보가 많이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둘 웃음)
김: 저희가 좀 늙었습니다. (웃음) 386세대들입니다.
노: 사이버 스페이스에선 여러 가지 활동을 좀 늘려나가려고 합니다.
김: 그럼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인터넷 세대에게도 계속해서 지키고 싶은 이미지 같은 거 있으십니까? 이회창의 '대쪽'처럼..
노: 음... 선거에서 표는, 단순한 이미지에 의해서 좌우되지만, 그러나 정치인의 자세는 그런 것하곤 좀 달라야 합니다. 소위 체계적으로 잘 짜여진 철학과 소신이라든지, 그런 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아니 누구나 적어도 지도자가 되려면, 젊은 세대의 정서에 감성적으로 다가가려는 노력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 말고, 자기가 지켜나가야 할, 갖고 나가려고 하는 확실한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철학과 가치라는 것이 좀 더 깊은 사고와 판단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저는 삼십대, 사십대의 판단에 맞춰나가는 방식으로 정치를 해나가야 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 이십대가 들으면, 무시하는 거냐? 하겠는데요.
노: 실제 자기 생활의 구체적인 이해관계, 삶의 경험으로부터 요구하고 있는 정치적 조건들이 있거든요. 직장과 가정에서 사회 생활을 책임 있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자기 책임으로 가정을 거느리고 경제 구성원으로 역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 삶의 고민들에 맞추는 것이 원칙이죠, 원칙이고... 이십대들에 대해선 그 정서에 맞게, 꿈을 제시하는 그런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하지만, 그것에 맞춰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20대에 맞춰 정치하면 안된다 " 이렇게 답하는 거, 그만의 스타일이다. 보통은 " 젊은이에게 꿈을 주어야죠.." 여기까지만 말하는 게 모법답안이다. 이건 정치인으로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겠다.
'노무현 언론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언론을 조폭적이라 했다가 워낙 공격 당하는 중이라,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아 변죽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김: 혹시 최진실씨가 임신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노: 예?
김: 최진실씨가 임신을 못 한다는.
노: 처음 듣는 얘긴데요.
김: 며칠 전에 그 스포츠 서울 제목이었습니다. 왜 그러냐면, 너무 바빠서. (웃음)
노: (웃음)
김: 제목은 최진실 임신 못한다 였는데, 내용을 보면 너무 바쁘다. (웃음) 아시다시피, 이건 우리나라 언론들이 아주 잘 하는 짓인데 전후맥락은 다 빼고 특정 문구만 뽑아 선정적이고 의도적으로 오바하는.. 이 분야에서 전통의 최강자는 조선일보이고(웃음)... 그런데, 안티조선 운동 있지 않습니까.
노: 예.
김: 그게 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운동도 아니고, 무슨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도 아니어서 실제적인 힘이란 관점에서 아쉬운 점도 있는데, 혹시 이런 안티조선 운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노: 우리 사회에, 다양한 경향, 그 다양한 경향이랄지 다양한 방향의 운동들에 대해서 다 의미있게 보고 찬성합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모두를, 그 모두가 함께,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파괴적인 어떤 균열을 일으키지 않고 좀 더 통합돼 나가게 하는 그런 일들을 해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설사 내심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김: (웃음)이런 소심한...
노: (웃음) 그런 거 모두를 함께 인정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러면서 그 어떤 통합된, 균형 잡힌 관점들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 정답만 말씀하시니까 재미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웃음)
노: (웃음)
김: 언론들이 특정 정치인을 딱 찝어서 일부러 험하게 다루어서 언론의 힘이 이 정도이니까 알아서 조아려라, 뭐 그런 길들이기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노: 예.
김: 또, 당파적이면서, 물론 당파적인 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척..
노: 저는 언론이 당파적 견해를 가진 것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아닌 척 하는 게 문제..
노: 오히려, 그렇습니다. 아닌 척 하는데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 아무리 당파적이라 하더라도 사실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하고, 그 위에 팩트를 토대로 해서 자기의 의견과 평가를 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의견과 사실은 분리해줘야 하는데, 그런데 이게 의견이 다르면 사실까지 뒤집어엎어 버려요. 이런 것이 문제가 있죠. 그런 것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비신사적인 행위다...
김: 근데, 궁금한 게, 왜 그렇게 조선일보는 노무현 장관님을 물고 늘어질까요? 지치지도 않고. (웃음)
노: 그거는 제가 답변을 다른 방향으로 할께요. 저, 많은 사람들이 좀 잘 지내보라고 합니다. (웃음)
김: 노장관님은 직업이 정치인인데 잘 좀 지내시지.. (웃음)
노: 저도 개인적으로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지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그분들도, 공정하게도(웃음), 개인적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비호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들이 양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정치인이라고 해도. 거기에 도전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이익은, 짧게 말해서 수구적 이익입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습니다, 그런 이익에 대해서 애착과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주류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주류적 이익, 한국 사회에 주류적 집단이라고 스스로 자처해온 수구 기득권 세력. 멀리 올라가면 친일파의 맥이 나오고, 가까이 오면 독재정권과 항상 결탁해오고. 항상 강자와 결탁하면서 특권을 누려왔던, 부당한 이익을 누려왔던 집단이지요.
소위 한국의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기초가 거기 있습니다. 전쟁 나면 아들 군대 안 보내고, 법 위에 군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그것이 소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수 수구 언론이 옹호하려고 하는 가치이고 이익이고, 바로 그들이 그 세력이고 그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양보하지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대통령이 거기에 도전해서 성공했고, 겁도 없이 노무현이 초선 의원이 돼가지고 거기에 도전한 것이지요.
역시 그만의 스타일이다.
'중도의 정치인', 아닌 것이다.
김: 그, 말씀 중에 연상되는 내용인데요, 서정주씨가 사실. 순수 예술인으로 친일했던 경력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예술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게 청산되거나 또는 지적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황석영 선생이 동인문학상을 조선일보에서 주는 걸 거부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예술을 너무 정치적으로 다루는 거 아니냐고도 하고, 예술은 예술이라며 황석영 선생을 비판하는데. 예술과 정치를 따로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노: 그, 옛날에 그때 그걸 뭐라고 하지? 경향문학이라고 하던가. 순수 예술과 그 당시.. 참여예술. 순수 예술과 참여 예술,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그것은 각기다, 예, 각기 다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편을 들지는 않습니다. 않고, 에.. 또.. 저는 개인적으로, 과거에 친일을 한 사람이라도, 과거에 친일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이 땅에 살 자격도 없고 또 그 사람들이 기여하고 있는 만큼의 대우를 받을 자격도 없다, 이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친일의 행적에 대해서 사과한 일도 없고 반성하지도 않고 공개화되지 못한 체 여전히 자기가 사회 지도층입네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또 어떤 국민 정서의 상징적 존재로서 남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잘못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함께 포용하고 함께 가야하지만, 그러나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지도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의 어떤 본보기가 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과거를 반성함도 없이 그대로 계속해서 군림해오려는 그런 자세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 우리가 우리 역사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그 반성의 과정 없이 그들이 그냥 주류로서 한국 사회에서 계속 군림해왔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반성이 없었던 역사의 맥락에서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메시지를 황석영씨가 내놓은 게 아니냐. 그런 점에서 황석영씨의 얘기는 우리가 귀담아들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얘기하자면, 언론과 제가 갈등을 겪고 있지만, 언론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언론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을 반성할 건 반성하고, 그렇다고 신문사 없어지라는 것도 아니고, 신문사 그냥 하란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올바른 평가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새롭게, 그야말로 좀 더 대중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그렇게 함께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자는 말입니다. 왜 자꾸 과거에, 과거의 향수에 젖어가지고 시대의 흐름을 자꾸 저지하려고 하느냐. 왜 역행... 심지어 역행까지 하려고 하느냐.
그런데 그런 힘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그 위력을 두려워하고 있었잖느냐. 그러니까 맞서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그, 전쟁이란 말도 나오고 (웃음), 나온 거지요. 저는 그들이 말살, 말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라. 제 자리로 돌아가란 말이다. 언론은 언론대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권력은 권력대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시민도 제 자리에 똑바로 서자. 왜 눈치보고, 권력 눈치보고 언론 눈치보고 이렇게 살아야 하냐. 주눅들어 살지 말고 제자리로 가자. 그것이 지금 아직까지 정위치가 안돼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황석영씨 얘기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정위치로 가지 않고, 제자리로 각자의 위치가 제자리로 복원되지 않은데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언론관이다.
김: 영화를 보면 가끔, 하트가 둥둥 떠 돌아다닙니다.
노: (고개를 들어 무슨 뜻이냐는 표정)
김: 뭐냐하면은 그.. 치모가 노출되거나 성기가 노출되거나 하면 장면상 짜를 수는 없고..
노: (입을 벌려 알았다는 표정)
김 : 그렇게 하트를 넣어서 가리는 건데,
노: 참, 봤으면 좋겠네요 (웃음)
김: (웃음) 그런데, 우리 국민들 문화 수준으로 볼 때, 이제 치모가 보인다든지, 또는 성기가 자연스럽게 노출될 부분이 있어 노출된다고 해서, 과연 문화적인 충격을 받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해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인가 의문이 듭니다. 혹 그런 걸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실 때 어떤 결정을 내리실 겁니까.
노: 전 그런 위치에 아마 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웃음)
김: 이런 무책임한...(웃음)
노: 우리 사회에서 어느 자리가 그 자리일까, 난 그런 자리가 없는 것 같거든요. 김: 영상물 등급위..
노: 그러니까.. 그 판단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에.. 분명 음란물이 있고, 또 음란물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분이 대단히 어렵고, 구분을 법의 잣대로 재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부당한 게 아니냐. (담배에 불을 붙임. 세 번째)
김: 음란물의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유명 영화가 극장에서 그런 모양새로 걸리는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단지 성기 노출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노: 아이들하고, 딸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그런 장면에 부닥쳤을 때 참 난감하더라구요. 그러나 그냥 모른 척 하고 (웃음) 보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아이들이 음란물을 보는지 안 보는지에 대해서 감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못 보게 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잠시 호기심을 느끼더라도 다시 평상으로 돌아와서,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건전한 상식으로 정서로 극복해나갈 수 있는, 뭐랄까요, 건전한 판단력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가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그렇습니다. 건전한 판단력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기 노출을 할 수 있게 할까요, 막을까요.(웃음)
노: (웃음) 저는 그렇습니다, 보기 흉하고, 막을 수 있는 건 막으면 좋겠지만, 막으려고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법으로 제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성 문제에 있어 그는 그 어떤 사안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와중에 " 법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는 발언은 문화정책의 기본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발언이다.
김: 알겠습니다. 최근 국내 교육 문제 때문에 삼,사십대 층이 이민을 많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교육문제 때문에 이민들을 가는데, 그런 이민에 대해서 한편에서는 그래도 나라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배신이다, 이렇게 말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우리나라에 더 희망이 있냐, 가야지, 이렇게도 얘기를 하고..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노: 저는 교육 때문에 이민 간다거나, 한국에 희망이 없어서 이민 간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이유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육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한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민을 많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왜 그렇습니까.
노: 그, (담배를 끄면서 기침) 국경의 의미라든지, 국경을 기준으로 한 애국심이라든지, 이런 것은 이제 점점 문화적 적대감으로 발전하는 위험이 있고, 심하게 말하면 국가 지상주의의 시대에서 세계주의의 시대로 세상이 변화해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살고 활동하는 범위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확대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한국만 국수적 애국주의 같은 것을 주장하고 하는 사고는 한국의 발전도 가로막는다. 뻗어나가는 것은 좋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뜬금 없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사람이 작두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작두?
김: 네. 왜 무당들 보면 작두 타지 않습니까.
노: 예.
김: 진짜로 사람이 작두를 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눈속임이거나 고도의 훈련에 의한 것일까요?
노: 저는 고도의 훈련 아닐까 싶은데.
김: 초자연적인 상황이 아니라?
노: 저는 이제, 신비적 현상에 관해서, 저게 그 사기다, 그렇게 단정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스스로는 거기에 의존해서 어떤 신비적인 현상을 제 행동의 기초로 삼지는 않습니다, 예... 진짜 뜬금 없었어요.(웃음)
김: (웃음)
노: (웃음) 있을 순 있다.
김: 알겠습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에서, 극우라고 할 수 있는 샤론 총리가 당선됐습니다. 미국 일부 언론에선 그런 빌미를 제공한 팔레스타인쪽이 오히려 잘못했다.. 식으로 풀기도 하는데, 저희는 이스라엘 문제와 같은 국제적 이슈에 대해 우리 정치인이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견해를 펴는 것을 본 적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인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지 그 견해가 궁금합니다.
노: 저는, 제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면, 국가적 이익이라든지 국제적 관계 때문에 말을 조심하겠지만, 그냥 한 인간으로서 생각을 얘기하라 한다면 그 시오니즘이 국수주의다. 인류의 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라고 생각합니다.
김: 국가적 이익의 관점에서?
노: 그렇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수주의자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노예 제도 옹호론자들이 볼 때는 급진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으면서 굉장히 많이 시달렸습니다.
시달렸는데, 이 링컨이 죽고 난 뒤에, 11년 뒤, 그 목사 (보좌관쪽을 보며) 이름이 뭐지. 그 당시 흑인 지도자, 잭슨 목사 아닌가 싶은데. (다시 고개를 김 쪽으로 돌리며) 하여튼 흑인 지도자 목사가 링컨의 조그만 초상을 만들어서 링컨의 영전에 봉헌하면서 그 얘길 합니다.
그는, 그는 정말 우리 흑인들에게 섭섭하게 했다. 왜냐면 흑인들의 요구를 너무 더디게 들어줬고, 때로는 남부 주를 해방시킨 북부 사령관이 노예해방 조치를 했을 때 그것을 다시 취소하기까지 했다. 노예 해방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여러 가지 조치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 섭섭함을 다 얘기하면서. 그러나 나중에, 그 사람이 죽고 난 시점에서 보니까 그가 결국엔 많은 노예를 해방시켜 놓았더라.. 흑인들이 푸른 군복을 입고 군대도 가고, 행진할 수도 있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이야길 하면서 링컨의 노예 해방자로서의 공을 아주 높이 기리는 그런 연설을 합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링컨은 노예 해방론자이지만 그는 그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면서 결국 아주 합리적인 속도, 속도 조절을 한 것이거든요. 노예 해방의 속도를 아주 정교하게, 뭐라고 할까요, 아주 현명하게 디자인해냈단 말이에요. 그것이 정치입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자로서, 과연 나름의 정치적 아젠다가 있느냐 그리고 통일시대를 열어야 할 지도자로서의 대북관은 어떠한가, 당연히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는 항목이다. 또한 인터뷰의 후반부에서는 '라이벌' 이인제 위원과의 직접 비교를 위해 많은 질문을 노무현 고문에게도 거의 똑같이 던졌다.
반드시 지난 이인제 인터뷰와 비교해 볼 일이다.
김: 링컨이 그런 속도조절을 통해 이룩한 가장 큰 과업 중 하나가 노예해방이라면, 노장관님은 스스로 속도조절하며 이룩해야 할 과업 첫번째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노: 동서 통합이 우선 순위 1번 아닐까 싶습니다. 그 다음엔, 철학과 노선에 있어서 지금 이 정부의 노선을 계승해나갈 겁니다. 계승하고 보다 더 완성시켜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정치의 풍토와 행태에 관해서는 지금 이 시대의 정치 풍토를 극복해 나가야 된다..
김: 우선 순위는 동서 통합.
노: 예.
김: 현정권 경우는 남북통일에 더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것 같은데.
노: 그렇습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대주의적 관점에 있어서 제일 첫 번째는 남북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남북 이야기 먼저 합시다. 남북 관계, 화해와 교류와 협력을 위한 평화의 정착, 그죠? (단어를 헤아려보듯 중얼거리며) 화해, 교류, 협력, 평화… 그런 것의 정착을 위한 포용 정책. 그 다음에 신뢰 구축 정책.
그걸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시대적으로는 가장 중요하고, 또한 그 남북 질서와 더불어서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구축해가는 것, 이건 남북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 시대의 조류라는 측면에서 클린턴이 주창했던 평화와 공존, 화해와 협력 이런 것들을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상정하고 나가는 그런 관점이 유지되야 한다.. 또한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민족경제의 시대에서 세계경제의 시대라고 경제영역에서의 세계화를 말씀하셨고, 몇 년 전 민족주의의 시대에서 이제는 보편적 세계주의의 시대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관점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이런저런 비판에 시달렸지만, 결국 복지제도의 기틀, 생산적 복지제도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복지제도의 기틀을 마련해 놨는데 이걸 계승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실업 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과감한 대책이나 사회 안전망, 보험 제도 정비.. 이런 것들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정당의 노선을 정책으로 현실화시켜낸 것입니다. 물론 아직 기초단계이고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이것을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게 제가 보는 과업입니다.
김: 아까, 이인제 최고위원이 되면 그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서포트할 지 모르겠다 하셨는데, 이인제 위원 외에 지도자로서 인정하기 싫은, 기회주의자 같은 후보가 누굴까요.(웃음)
노: (웃음)
김: 그런 사람이라면… (웃음)
노: (웃음)
김: 웃지만 마시고.. (웃음)
노: 저는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만큼 경제 발전을 하고도 자신감, 미래에 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정통성 없는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합니다. 정통성 없는 역사. 강자에게만, 양지쪽에만 볕이 들고, 항상 강자에게 줄을 서고 양지쪽을 찾아가는 사람들...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우리의 역사.. 너무 오랫동안 계속된, 이 바뀌지 않고 계속돼 온 역사 속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결여...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우리가 이만큼 경제 성장을 이루어 놓고도 미래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승복하는 그런 그 원칙이 확립돼 있지 않은 사회다.. 우리 사회가 정통성, 역사성과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김: (웃음) 음.. 또 돌아 가시는군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누굽니까. (웃음)
노: 에.. 그거요.. 또 다른 언론에 인용되면 일파만파… (웃음)
김: 그럼 민주당은 그렇다고 치고,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쇼.
노: 두 가지 합시다.
김: 알겠습니다. (웃음)
노: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지금의 이와 같은 정치 구도 하에서 영남에 가서 지역감정 부추기는 것 해선 안 됩니다. 설사 앞으로 호남에서 단 한 표를 얻지 못하더라도 지도자가 되고 나서는 호남을 함께 끌어 안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자기를 찍지 않은 사람까지 함께 묶어서 한 국민으로 통합해서 나가야 되는데, 그러므로 한 표가 없는 집단이라도 그 집단을 포기하거나 적대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근데 지역 출신의 몇 몇 정치인이 아닌, 전부를, 말하자면 호남인 전체를 상대로 적대하게 한단 말이죠. 말하자면, 한 지역을 포기하는 지도자는 이미 전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민을 굉장히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최근에 나온 얘기, 주류가, 정확한 워딩을 모르겠는데, 메인 스트림이 나라를 계속해서 운영해나가야 된다 하고 말을 했는데, 그 주류가 누구인가.. 그 동안에 역사에 있어서 잘못된 길을 걸어온, 설명을 다 하려니까 기네요, 말하자면 부정한 권력과 항상 결탁해 부당한 특권을 누려왔던 그 집단이 아니더냐…… 그렇게 생각되거든요. 그게 또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또 시비가 될 사안이니까 온갖 변명을 다 갖다 붙히는데, 그게 그러면 안 된단 것이죠.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들은 이 나라를 떠나야 될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이라고 죽어야 될 사람이 아니지만, 망해야 될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이 계속해서 이 나라의 지도적 권력을 독점해야겠다는 사고는 대단히 위험하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고다.. 라고 봅니다.
일반 국민들이 당신이 주류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도대체 누가 내가 주류라고 얘기합니까.
김: 그렇다면, 이인제 위원이 되지 말아야 될 이유는.
노: 같은 당 하는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나요.. 건, 에.. 하여튼, 에…… (고개를 돌리며) 아이 마, 쯧, 이거 말하면 타이틀로 나오겠다, 타이틀로 뽑히겠어요. (웃음)
노: (웃음)
김: 타이틀로 안 뽑겠습니다, 하나만… (웃음)
노: 아니 말고, 다른 데서 보고 타이틀로 뽑을 것 같애. (네 번째 담배에 불 붙임)
김: 한 번 더 해야겠는데요, 인터뷰… 잠잠해지면.(웃음)
노: 그에 대답은.. 음.. 나는, 나와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은 우리 당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그렇군요..
노: 이인제씨를 언급한 건 없습니다.
김: (웃음)
보: 시간이…
김: 시간이 없습니까?
노: 하세요… 예, (웃음)
보: 저, 한 십분 정도 시간이 더 있으십니다.
노: (고개를 끄덕이며) 음.
김: 아직 반도 안 했는데… (웃음)
노: (웃음)
김: 김정일이 정치적 파트너라 할 수 있습니까. 그, 북괴의 수괴가. (웃음)
노: 북괴의 수괴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를 정치 파트너로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김: 정치인으로써 김정일을 평가하신다면. 노출된 지가 오래되진 않았습니다만.
노: 건 그…
김: 직업으로 따지면 같지 않습니까 사실은. (웃음)
노: 사실은 아까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서도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이건 정말 함부로 말할 수가 없지요. 조심스럽고,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는 정치적 파트너입니다. 그건 존중해야 합니다.
김: 자질 얘기까지.
노: 자질에 대한 평가는 그건 조심해야죠.
김: 국가적 레드컴플랙스때문에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우십니까. 아니면, 평가가 이르다는 말씀이신가요.
노: 이리로 가면 김정일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또 반대로 가면 국내에서 이상한 오해가 생길 소지가 있고. 그러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기 어렵지만, 판단도 어렵습니다. 북한이란 그런 특수한 조건을 놓고 판단하라 했을 때 하고, 세계 일반의 보편적 기준 위에 그를 세웠을 때 그 평가는 굉장히 달라질 수가 있는 거니까.
김: 노장관님 나름의 평가..
노: 아니 그거는, 내가 평가하더라도, 그 전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북한이란 특수 상황에서 그가 유능한 지도자이냐 라고 보면 그건 유능한 지도자이죠. 그만큼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해나가고. 유능한 정치인이죠. 그러나 세계의 보편적 기준에서, 남한의 보편적 기준에서 보면 지도자가 아니라 폭군이죠. 그 전제를 빼고는 평가가 불가능하겠습니다.
김: 알겠습니다.
노: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와 더불어서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또 신뢰 관계를 구축시켜 나가야 되는 정치적 상대자인 거는, 분명히 인정을 해야 합니다.
김: 그럼, 북한은 주적입니까?
노: 글쎄, 여러 나라가 주적개념을 채택하고 있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적 개념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주적 개념을, 좀 다르게 바꾸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의 이너뷰 대상 중 가장 허심탄회하게 답변하던 노무현 고문도 레드컴플렉스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답변들은 망설임 끝에 나왔고, 그리고 수위는 조절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말 후지다...
김: 냅스터가 패소했습니다.
보: 지금 다섯시 삼십분에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다.
노: (보좌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음… (김을 보며) 누가 패소를 했어요.
김: 냅스터…
노: 이거 망신하겠네. (보좌관쪽으로 상체를 내밀며 웃음) 야, 냅스터가 누구냐?
김: (웃음) 냅스터, 프로그램 이름입니다.
노: 음..
김: MP3라는 음악 파일을 공유하는
노: 예, 예. MP3를 받는.
김: 그런데 패소했습니다, 냅스터가. 인터넷상에서 저작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음반 협회와 냅스터간에. A라는 음악파일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B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각자 교환해버리면 음반 판매가 안된다.. 라며 인터넷 상에서 음악파일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인 냅스터를 고소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십니까.
노: 그 부분은… 판단이 어렵네요.
김: 잘 모르시겠습니까.
노: 예.
김: 인터넷 시대엔 이런 것들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데..
노: 제 생각은, 지도자가 너무 많이 알 건 없고..
김: (웃음)
노: 그건 판사들한테 맡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건 판사들한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판사들한테 맡기고… 알아도 판사들한테 맡겨야 되고, 몰라도 판사들한테 맡겨야 되고..
답변으로 옹색했다. 인터넷시대엔 이런 이슈들이 국가적 이익과 바로 결부될 수도 있는 사안이 될 것이다. 이제 지도자로서 최소한으로 인터넷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는, 결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김: (시계를 봄)
노: 계속, 하세요.
김: (웃음) 골프 치십니까, 혹시?
노: 예, 배웠습니다. 한 반년쯤 됐습니다.
김: 골프가 아직 대중적이지 않고 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부분도 있는데.
노: 음, 골프 대중화라는 말이 좀 유행을 하던데, 그리고 상당히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골프에 접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돈이 많이 듭디다, 해보니까. 아직은 돈이 좀 많이 들어서 대중적이라고 말하기엔 이른 것 같다 라는 생각합니다. 골프 좋아하는 사람들의 논리겠지요. 제가 골프를 치는 이유는, 아주 현실적인 건데 골프 치는 사람하고도 좀 교류가 있어야 되겠다, 그, 교류 좀 해야 될 필요가 있겠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부산 가서 일요일날 만나려고 하면 약속이 되질 않습니다. 골프장에 가버려서. 그래서 할 수 없이 (웃음) 가서 만나려고..
김: (웃음)
노: 아주 현실적인 정치적 필요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되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가 없어요, 일요일날. 그래서, 골프장에 따라가서 만나야겠다. (웃음) 그렇게 가서 만납니다. (웃음)
김: 시간이 너무 부족하군요. 차후 인터뷰 더 해주십쇼.
노: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김: 호주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유명무실한 제도입니다. 폐지해야죠.
김: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그건 뭐… 그 운동은, 잘 하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결국 그것을 법제화하는 데는 얼마만큼 많은 국민들이 그 필요를 느끼고 요구하느냐 하는 문제이지, 그 이전에 어떤 그 절대적 원칙이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것은 많은 국민들이 그로 인해서 불편을 느끼고 이걸 열어달라고 하면 그럼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그 이외에 무슨 선험적이고 개인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법제화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성을 같이 쓰는 것도 좋지만, 선택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아버지의 성이나 어머니의 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김: 여호와의 증인이 징집 거부하며, 사회 봉사 활동으로 대체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회봉사 활동이 실제 군 복무 기간보다 훨씬 기간이 길고 힘들더라도 그걸 하겠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예, 좋습니다. 병력을 충족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가 필요한 병력을 충족할 수 없을 정도로, 병력공급에 큰 지장이 생긴다면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순 없겠지만, 지금 어차피 공익근무도 있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제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존중해 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그걸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로 볼 순 없을까요.
노: 지금, 뭐, 하잖습니까. 병역 특례로 제도도 있고, 또 공익근무도 있고, 다른 많은 옵션들이 있지 않습니까. 기초 훈련이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보좌관을 보며) 병역특례할 땐 기초 훈련 안 받지? 산업체 병역 특례할 때 기초 훈련 없죠? 그렇기 때문에, 크게 형평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데 그것을 대통령이 정할 문제는 아니라 봅니다. 이런 질문엔 앞으로 개인적 소신이라고 전제하고 답해야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대통령이 다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느낄 우려가 있군요.
김: 저희는 한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가 궁금한 겁니다.
노: 예, 아..
김: 우리나라 어떤 여배우가 일본에 가서 포르노를 찍고 왔습니다. 이 여배우가 우리나라 극영화에도 출연을 했고, 네티즌 사이에선 상당히 유행했는데, 이걸 두고 말들이 있습니다. 일본이어서 안 된다. 하필 일본에서.
노: (웃음)
김: 이게 포르노라서 안 된다, 또는 괜찮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냐.. 등등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뭐 전 포르노에 대해선 불안하게 생각하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포르노가 안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김: 포르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가 아니라, 이 여배우가 포르노 출연을 직업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노: (탁자 위의 물을 집어 마심)
또, 그 대상이 하필 일본인이고.
노: 그런 직업에 대해서 전 마음이 관대하지 않습니다.
김: 개인적으로.
노: 예. (물을 마심)
김: 성기구 판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저도 무슨 성인 사이트를 한 번 들어가 볼까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웃음)
김: 호스트바는 단속을 심하게 하는데, 호스티스 나오는 룸싸롱은 묵인을 합니다. 남자들한텐 당연한 것이 여자들에겐 당연하지 않는 것이 많은데..
노: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화적 정서가... 어후, 참(한숨).. 불공평하다, 인정합니다.
김: 그걸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 그, 참, 그렇다면 호스트바를 봐주란 얘긴데...
김: (웃음)
노: 그것보다는 호스티스바를 단속하는 쪽이… 맞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만일, 가정입니다. 아드님이 동성애자입니다. 그런데 노장관님은 정치인이고. 현재의 사회적 편견 속에서 아드님이 동성애자일 때 커밍아웃을 권하실 수 있겠습니까.
노: 개인적으로 말리고 설득은 해 보겠지만, 그러나 그게 잘 말려질 일인지는… 자신이…
김: 동성애자들은 그러니까 성정체성을 개인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났는데, 문제는 그걸 숨기느냐 드러내느냐 인데...
노: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은,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고, 또 대단히 사회생활에 불편과 고통이 있을 수 있을 것인데, 내 아이라면 개인적으론 말려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려질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호주제 문제를 딱 잘라 폐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부모성 같이 쓰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서, 성문제에 대해선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었고, 동성애에 대한 이해도 거의 전무했다. 개인의 성적취향을 묻는 건 아닌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건 뭔가 언밸런스다..
김: 만약에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능을 상실하셨어요(웃음). 보형물을 삽입하시겠습니까?
노: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
김: 성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궁금한데, 그걸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그래서 보형물 삽입하시겠습니까. (웃음)
노: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는 그야말로 소중한 것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그런 문제를 놓고, 그,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김: (웃음)
노: 말하는 것은, 좀, 그... 다 말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해야 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 욕구란 것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 욕구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훌륭한 사람 훌륭하지 않은 사람, 그런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차별도 있을 수가 없고. 그러나,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좀 (웃음) 민망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에..
김: 성인 비디오를 보십니까.
노: 옛날에, 요즘처럼 흔하지 않을 때, 옛날에 비디오를 봤죠. 요즘은..
김: 혹시, 사창가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노: 비밀입니다.
김: (웃음)
노: (웃음)
김: (웃음) 남자들을 보면, 이십대가 넘어가면 삼각팬티를 입거나, 또는 사각팬티를 입거나, 둘 중 하나만 입습니다. 희한하게도.
노: (고갤 끄덕임)
김: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어떠신지. 저희가 사회적으로 삼각파와 사각파를 좀 나눠볼려고 합니다.
노: 저는 사각입니다. (웃음)
김: 왜, 사각을 입으십니까. (웃음)
노: (양손으로 바지 앞에 삼각 팬티를 만들어보이며) 불편해요.
김: 그쵸? 통풍이라든가.
노: 하여튼, 불편해요. 삼각은. 쫄립니다. (웃음)
전국의 사각파들이여, 커뮤니티에 한 명 추가해라.
노무현도 사각파란다..
김: UFO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모르겠어요.
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다는 겁니까.
노: 예.
김: 안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아니고
노: 예.
김: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아니고.
노: 예.
김: 비겁한 답변이었습니다, 그거는. (웃음)
노: (웃음) 정말 그.. 제가 대단히 실리적인, 그런 면에 있어서는 실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 아직은 저하고 별 관계가 없는 일 아니냐, 그리고 뭐, 인류의 운명에도 별 관계가 없는 일 아닌가…
김: 글쎄의 인류의 운명과는 관련 있을 수도.. 지구 방위 사령부가 존재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국민들 납세부담도 생기게 되고...(웃음)
노: 글쎄, 그것이 위협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조금 더 현실화됐을 때 대책을 세워나가는 것이 맞겠죠.
김: 장기 자랑을 하라고 하면 뭘 하십니까. 차력이라든가.. (웃음)
노: 그게 없어요. 장기가 좀 없어요.
김: 삼국지 중에 가장, 스스로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다른 거로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 생각을 안 해봤어요.
김: 버스비하고, 지하철비를 합한 다음에, 영화비까지 합치면 얼마가 될까요.
노: 모르겠는데, 한 만이천원쯤 하나… (고개를 흔들며) 모르겠네.
김: 국회에 가려면 지하철을 몇 호선을 타야 되는지 아십니까.
노: 5호선이죠. 5호선인데 한참 걸어가야 돼요.
김: 거의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랜디 존슨, 캐빈 브라운, 마르티네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노: (고개를 흔들며) 모르겠는데요.
김: 투수. 스포츠에 관심이 있으신지 궁금했습니다.
김: 하나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입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노: 음?
김: 입양.
노: 입양. 참, 그, 정말, 꼭 필요한 거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김: 그 이유는? 그, 국내 입양 말고 해외 입양을 말하는 겁니다.
노: 아까 제가 그 이야길 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그러나 입양에 관한 한은 국내에서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나올 때마다, 그 말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제가 아직 실천을 못 하고 있기 때문에...
김: 해외 입양은 어떤가요.
노: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 어떤 사람은 편견 심한 우리나라보다 편견없는 외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충분한 교육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그 개인에겐 더 기회가 되고 좋은 게 아닌가, 그렇게 이야길 하기도 하는데.
노: 솔직히 말해서, 듣고 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그런 부분이 있네요…
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언제 또……
노: 뭐 실컷 해 놓고.
김: 이걸루는 어림도 없습니다..(웃음)
여기서 인터뷰는 끝이 나고, 이미 한 참을 기다린 다음 손님에게 후다닥 장관실을 넘기고는 빠져 나왔다..
노무현... 그 역시 몸을 사리는 답변도 했고, 그 역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려는 부분이 있었으며, 그 역시 레드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인터뷰 대상들과 분명히 달랐던 점 한가지는, 한 쪽을 적으로 돌려세울 지언정 대부분의 사안에 호오가 분명한 자기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더란 것이다.
20대를 기준으로 정치 안 한다는 발언은 정치인으로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자기 철학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만큼 적을 만들어 내는 정치인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처럼 "보수우익"의 뿌리가 깊은 곳에서 과연 대통령 해먹을 수 있을까.. 물론 계속해서 "개인의 견해"와 "지도자로서의 처신"의 분리를 얘기하고는 있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 인터뷰때는 좀 더 들들 볶아봐야 겠다...
자, 오늘도 본 이너뷰의 목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자. 목표는 '뽕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섹스, 통일... 실제 인간이 일상을 살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로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 답변을 받아내려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또한, 이 한 번의 이너뷰로 부족한 독자제위는 2차 이너뷰를 기대하시라.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게시판에 와장창 남겨들 주시라. 본지가 반드시 그 의문을 풀어 낱낱이 보고하리라.
풀어낼 궁금증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그때까지, 이 이너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더 이상 뽑지 않는다. 졸라!
- '일망타진' 연쇄이너뷰 추진위원장
딴지총수 ( chongsu@www.ddanz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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