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에 관한 한 짧은 고찰'을 대체하며,
부슬부슬 비가 내려요... 내내 이틀 동안 비를 맞으며 종로 일대를 걷는 기분, 그 출근길에서 동아일보 사옥과
교보빌딩 그리고 문화재라는 한 비전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얼 더 생각해보았을까요?......
그래요, 그건 아무래도 신자유주의라는 낯설기만 한 단어의 창궐 속에서 인류가 꿈꿔온 가치들을 어떻게든
좀 더 발전시켜내고픈 의지이나, 그게 또 제대로 잘 되지도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약간의 놀라움마저 함께
기록되어져야 할 것 같아요. 그건 말이죠, 음... 마치 먼 나라에서 갓 돌아온 한 용사가 뒤바뀐 현실에서
겪어야만 할 것 같은 소외감 혹은 괴리감과도 비슷하지요......
이를테면, 한 집단 안에서의 서열 같은 게 해당될 것도 같은데... 그건 비단 기득권자들의 욕망들 뿐만이
아닌, 힘 없는 자들의 시기와 질투 내지는 욕망 같은 게 한데 범벅이 된 진흙구덩이와도 같은 현실이겠죠.
문제는 그게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게 결국 '발전'이라는 월계관을 쓴 거죠.
(정작 그 월계관을 쓰고자 했던 의지는 이제 하품섞인 도덕과 훈계적인 말투 안에서만 빛을 바래가는 게)
...... 정작은 무엇이 문제였을 테며, 또 지금과 앞으로도 무엇이 문제일까요? 인간에 대한 모멸감? 아니면
또 이기적인 정글의 법칙에 따라야만 하는 노예와도 같은 일상들의 무참함이 빚어내는 슬픔에 대한 측은함?
이를 일컬어 '인간에 대한 예의'라 칭했던 한 소설가도 있지만 말예요...
그래요, 그건 아무래도 이를 대체할만한 '희망'이라는 단어의 죽음 앞에서 깊게 애도하며 슬퍼하는 한떼의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펼치는 의식과도 같은 장엄함이 갖는 아이러니와도 흡사하죠. 다시 말하면 어차피 또
한 무리의 욕망에 불과할 뿐이란 얘기죠. 기실 '운동권'이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욕망 자체가 현 정치권의
집권에 불타는 야망과 과연 무엇이 다를 텐지요... 그게 씁쓸하다면 씁쓸할 테고, 허무하다면 또 그럴 터.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욕망'이라는 낱말은 또 다른 차원의 '허무'와도 직결될만한 얘기예요. 무슨 이따위의
얘기를 지껄이느냐며 핀잔과 비아냥과 독설을 일삼게 되는 숱한 무리들 역시 고작 내놓는 '대안'이라는 것들
따위가 언제 한번 제대로 이 세상을 변혁해보았느냐 하는 말일 테지요... 그게 서글프고 안타까울 뿐이죠.
...... 신자유주의의 최대 미덕? 글쎄요... 아마도 "혁신"에 대한 갈망 따위는 혹 아니었을런지요? 예를
들면, 지속적이면서도 끊임없는 "향상에 대한 의지" 같은 거, 그 갈망 따위가 정작 '발전'의 밑거름이자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지는 않았을까요?...... 또 누군가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난다"던데,
실제로 그 어떤 '발전'과 개혁 역시도 오히려 소외를 감수해내야 하는 필요악은 혹시 아니겠는지요?......
소외, 어차피 겪어야만 할 고통스런 난제라면... 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 앞에서의 자본주의가 갖는 최대
악덕이야말로 바로 이럴진대, 거꾸로 평등주의가 갖는 무임승차의 오류 또한, 비슷한 소외를 만들어내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예전에 본 소련 영화 중 대학 입시를 치르던 한 여주인공이 문득 떠오르는)
그만큼 그 시절에는 확실히, 교조주의에 빠진 적 없었던지요?... 그에 대한 지나친 반성조차도 문제였던,
소외받지 않는다는, 누군가 꿈꾸던 상대방으로부터의 인정받음이란 그래서 흡사 마약과도 같이 중독상태에
빠뜨리게 만드는 주범일 것 같아서요... 단 한번, 그런 일조차 없었다면 또 몰라도 대부분은 그 마약같은
순간순간마다의 'Recognition'이란 굴레를 오히려 갈망해가면서까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버리니까요.
그게 어쩜 바로 "노예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자,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또는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권력'으로까지 변모할만한 성질을 갖게 마련이니까요... '승자들만이 갖는 희열'이 그 말을 이미
오래전에 대체하기도 했잖아요. 단 한번, 그 누구도 제대로 반성해내고 고찰해보지 못한 의미임에도요.
그랬잖아요, 늘 그 "혁신"이란 단어가 갖는 피곤함에 시달리면서 또 호소하기도 하고 때때로 그걸 싸잡아
'Conventional'하다는 비판조차도 받아야 했던 냉혹한 세계에서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거꾸로 노년층들이
억지로 배워내야만 하는 인터넷과 그 기능들조차도 서툴기만 한 스마트폰의 대유행 속에서 기어코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발버둥과도 많이 닮았잖아요?... "변화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권조의 억압.
일탈을 꿈꾸기엔 생존마저 위협받게 되는 이 잔인한 세계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도덕마저도
내팽개친 채로 저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대열 속으로 어떻게든 안전하게 합류하기 위한 노력들, 이것이
비록 생존권에 대한 사수를 위해 눈물겹게 치러야만 하는 고통과 희생이라 해도 말이지요... 과연 우린
무엇을 꿈꾸기 위해 이 세상에 굳이 살아남아야 하며 또 존재해야 하는 걸까요? 그 당위성이 과연 뭐죠?
...... '희망'에 대한 허무함이 절망을 낳고, 그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택하는 일종의 독약이 도로 '허무'를
부추긴 채로 '욕망'이란 단어를 다시 끌어올려놓게 되는 법인가봐요. 그래서 '욕망'은 늘 즐겁고 또 슬픈 거죠.
즉 본질은 결국 하나인 채로, 바로 '희망'의 부재라는 말예요...... <절망의 끝 희망의 시작>을 노래했던
1992년의 전대협 총회가 문득 기억 속에 떠올랐어요... 그때, 그 젊은 시절의 패기도 모두 잊혀질까봐...
그래요, 일단은 생존이란 핑계로 그 '욕망'이란 단어를 채택하기로 했다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언제까지 노예마냥 갇혀 살 수만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힘들고 또 어렵게 그 아득한 '희망'이란 단어를
좇아 어떻게든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투쟁 같은 게 필요한 것일 테죠. 그 선택은,
언제고 정당하며 또 역사적인 순간이 될 텐데 말예요...... <근시안은 결국 더 중요한 전망을 놓치는 법>.
그래서 그토록 절제와 아량과 넉넉함이란 여유를 고통스럽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웃어보일 줄 아는 게 또한
인생에 있어서의 유일한 지혜임을 아마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도 말이지요...... 늙어가는 건 슬퍼요.
"아는 게 병"이란 말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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