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는 다소 좀 서글프지만, 엄연한 얘기가 제 아무리 특출한 사람일지라도 그 부재에 관하여 세상은
지극히도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더 잘 돌아가기만 한다.
철 지난 옛 신춘문예를 들춰내는 일 역시 이런 기분을 떨칠 순 없는데, 이는 또 너무나 당연하게도
스스로에 대한 게으름과 불성실을 탓하는 편이 가장 근본적이자 속편한 방책인 편이 적어도 90% 이상이다.
어찌 보면 민망하나,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의 연장선에서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신식이라 할 법한 얘깃거리
들을 정리해보는 시간 ;
탁월한 상상력이 빚는 담대한 형상화
문화일보 당선작인 김륭의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광희 선배를 떠올렸나 보다.
그 언어적 재주와 미처 생각치도 못한 상상력의 결과물들은 제법 내가 시샘할만한 성질의 것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나 보다. 그만큼 이 작품이 갖는 미덕은 일종의 재능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노력만으로 이걸 이룬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대가 제아무리 변한다 해도 역시 이것만큼은 능력의 큰 한축임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고, 게다가 당선작의 소재가 비단 언어적 희롱에 그치는 아쉬움을 훌륭하게 극복한 현실적 기반을 토대로 한 까닭에 충분히 영광에 준한 자격을 갖춘 수작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당선소감의 표제가 "시는 슬픔의 일종"이라는 시인의 말도 신뢰감이 간다.)
유구한 전통 - 형용사와 부사들의 성찬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황지우가 예전에 했던 말대로 국어의 가장 큰 경쟁력은 형용사와 부사라던가? 특히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대다수의 진영들에서 부각되는 이 국어의 현란한 수사 내지 어휘의 풍부함 역시 생각해보면 지극히도 당연한 얘기지만 거의 전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성>의 척도다. 다만 아쉬운 건 지나치게도 보일 그 어취의 선택들이 과연 자연스러움 뿐이었을까 하는 일종의 의심인데, 이는 거꾸로 내 천학의 소지일 뿐인지?......
아무튼 경향신문을 통해 엄선된 신미나의 <부레옥잠>은 그 대표적인 전형으로 꼽힐만한 작품이다.
신춘문예, 그 자체에 대한 반성적 일갈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하게 산문형식을 취하고 있거나, 억지로 만든 흔적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적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대상을 주의깊게 보려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널리 유행하고 있는 시창작 강좌 등의 부정적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시를 보는 눈이 바뀌어도 지극히 개성적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시각을 가졌을 때 좋은 시가 된다는 점만은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세계일보 심사평 중에서 발췌/인용) 그렇다. 이 통렬한 지적을 미리 읽어두지 않고서는 어찌 세계일보 당선작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선작인 이기홍의 <근엄한 모자>가 지극히도 범작 수준에 머물러 있어 사실 깜짝 놀랐었는데, 그래서 급히 뒤적여본 심사평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찾은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완성된 수준의 한 일가를 형성해가고 있는 여성성으로서의 문학, 그 꽃
놀랍게도 약관조차 채 되지 않은 한 신인의 작품이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구나. 도대체 얼마나 수작이길래 하는 호기심부터 먼저 앞섰길래 찬찬히 읽어 본 이혜미의 <침몰하는 저녁>은 상당한 내공을 통해 그의 능력을 입증할만하다. 신경숙을 통해 비로소 성숙한 실체로 등장한 듯한 페미니즘 (이를 두고 페미니즘이라 일컫는 내 입장이 엄청난 반대와 비판을 감수해야 할만큼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이라 할지라도) 진영의 대표적인 미덕 역시 이것이 아닐까 싶다. 당선작 역시 꽤나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친숙한 문체를 구가하고 있음을 뜻하는데, 어쩌면 이를 표현해내는 내 능력이 부족함이라 치는 편이 실은 더 맞겠지만. 1980년대만 해도 이런 류의 문학은 그 "관념성"으로 인해 무차별적인 비판의 대상으로만 치부돼버렸을 법도 한데, 그렇다면 실은 우리 문학이 참으로 암울하기만 했던 시대를 살아온 셈이구나......
시쓰기란 결국 무엇일까, 이에 대한 자문자답부터 해봐야 할 일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면에서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한국일보 심사평 중에서)
결국 신인들이 필요한 가장 궁극적인 까닭에 대한 해답은 이 심사평 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기존 문단이 갖지 못한 자산, 즉 앞서 얘기했던 "상상력과 언어예술적 경지" 외에도 정작 우리 세대에 가장 필요한 건 어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 그것을 위한 집중력과 통찰력, 그리고 결국은 게으른 천재가 아닌 노력하는 양심이 가장 필요한 이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 - 그럼에도, 말투의 빈곤과 투박한 은유/상징은 기본적인 실력 문제다.
마치 시인의 글쓰기에 대한 자문자답과도 같은 성격의 작품인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의 첫구절을 잠언마냥 화두마냥 읊조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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