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뉴스레터

2015년 8월 10일 (월)

단테, 2015. 8. 10. 12:44

글 / 회의, 회의 또 회의        


- 오늘의 편지, 

-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Pablo Picasso, 'Guernica', 1937년)     

 

   

   

피카소 - 게르니카  

      

 

    

게르니카(Guernica)의 진실

게르니카 ....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스페인내전 참상의 대명사
그림이 고발하는 문명진보와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야만성

북부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게르니카에 자행된 콘돌군단의 항공기 폭격 공세는 얼마 , 인류 역사상 초유의 재앙을 몰고 운명이었으니, 이것은 훗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전세계 도시에 자행될 공중폭격 시대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Guernica)   
스페인 출신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불후의 명작이라는 게르니카...
독일 콘돌군단의 폭격과 민간인 희생을 고발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스페인내전과 한국동란
– 신무기의 시험장

2 세계대전 직전과 직후에 지구의 정반대 곳에서 각기 다른 커다란 내전이 발발했었다. 이차대전 직후인 1950년에는 아시아의 동쪽 한반도에서 한국전쟁, 이차대전 직전인 1936년에는 유럽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페인 내전.....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 ‘Massacre in Korea’

피카소가 1951년 한국전쟁 당시의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을 모티브로 그렸다는 
'한국에서의 학살'  (작가 황석영은 '손님'에서 그 지역의 좌,우익간의 학살로 묘사했다.)

전쟁은 공히 햇수로 4년간 지속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을 아니라, 세계의 열강들이 자국의 유리함을 쫓아, 발벗고 직접 개입하는 축소판 세계대전의 양상을 보였었다. 그리고 배경 역시 하나 같이, 이데올로기의 대결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전쟁은 공히 새로운 신무기, 중에서도 최첨단 항공무기의 시험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1950 년대는 프롭기에서 제트 항공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한국전쟁은 자연히 제트 전투기의 실전 데뷰 무대였다. 복엽기에서 단엽기 시대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인 1930 년대 중반의 스페인내전은 열강들의 단엽 저익기의 전투기시험장으로 전락했었다.

 

스페인 내전은 넓게 보면, 2 세계대전의 시발이라 있다. 왜냐하면 분쟁의 발생 지역이 스페인일 뿐이지,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공공연한 비밀처럼, 군사적인 지원에 나섰으며, 내전이 끝나고 몇달 , 스페인 내전에서 보여준 대결 구도대로 똑같이 패가 나뉘어 2 대전이라는 결전을 치르게 되었으니…….

 


스페인에
떨어진 전쟁의 불씨

 

 

Spanish Civil War posters

 스페인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로 서쪽에는 포르투칼을 접경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좁은 지브로올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에 거의 맞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나누고 있다. 이곳은 지리상 아프리카의 세력과 유럽의 세력이 서로간에 대륙을 넘는 기점이 되어 왔고, 역사적으로 봐도 로마에 대한 한니발의 반격의 시발 상륙지점이었으며, 이슬람 문명이 유럽에 진출한 지역이기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융합한 독특한 문화가 싹튼 곳이기도 하다.

대모험의 시대와 대양의 시대에는 스페인 왕국은 최고의 번영를 누렸고, 네덜란드 지역과 이탈리아 근해를 완벽히 장악하기도 했고, 식민지의 수를 헤아릴 없을 정도로 강대한 해군 제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 스페인은 추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기나긴 왕정이 끝을 , 공화국이 들어 섰지만, 국내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기 시작했다.

 


스페인내전, 시민군의 저항을 노래한 ‘Songs of Spanish’

 

 1936, 스페인에서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좌파 계열의 공화당(Reupblics) 집권하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우파의 우두머리였던 프란시스 프랑코 (Francis Franco, 1892 ∼1975) 장군은 반란을 계획하다가, 좌파세력에 좌천당해, 카나리아 섬에 위치해 있다가,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옮겨가, 이곳에서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수가 47천에 달했다. 그는 스페인 본토에 진격해 정권탈취의 꿈을 꾸고 있었다.

한편 스페인 본국에서도 지방 이곳 저곳에서, 공화당에 반기를 들고 국민당을 지지하는 군부 일부가 일어났는데, 스페인 북부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공화당 정부는 이들을 막기 위해 전력을 북부에 치중해,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이틈을 , 프랑코 장군은 모로코에서 스페인 남부로 진출하려 했는데, 문제는 무엇보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해군 전력 공화당이 우세였기 때문에, 5만에 육박하는 대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해서는 항공기가 필요했으며, 프랑코 장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수송기 원조를 부탁하게 된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선다면, 북아프리카 진출의 걸림돌이 되어온, 영국과 프랑스 지중해 함대의 온상 지브롤터의 견제가 가능해지고,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입지를 일신할 있게 된다.

독일 경우는 향후 프랑스를 양면에서 위협할수 있을 아니라, 약체 독일 해군의 입지를 강화할 있게 된다. 엄밀히 말해 스페인 내전 개전 전만해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완벽한 동맹관계가 아니어서,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 내전에 대해 독일 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이탈리아가 지지하는 국민당을 독일이 옹호하며 군사적 지원을 한다면,  이탈리아가 서방과 적대관계를 더욱 뚜렷히 하게 것이고, 자연히 독일과 혈맹의 위치까지 오를 있게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탈리아의 세력을 서부 유럽과 아프리카로 분산시켜, 중유럽에서 독일의 입지를 한층 강화할 있게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좌파인 공화당 정권을 밀어내고, 프랑코 세력을 권좌에 앉히기만 하면, 유럽 석권에 한발 다가설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얼마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추축동맹을 맺게 되고 이를 과시라도 하듯, 한마음 한뜻이 되어 발벗고 프랑코 장군에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먼저, 프랑코 장군 휘하의 병력을 스페인 본토로 수송키 위한 수송기들을 대거 파견했는데, 독일의 Ju 52 삼발 엔진 수송기가 선두에 섰다.  

한편 영국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일차대전 종전을 맞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이들과 대립하는 자체를 꺼려했고, 비록 스페인의 프랑코 세력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불간섭 입장을 택함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이렇게 되자 궁지에 몰린 스페인 공화당 정권은 소련에게 원조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소련 역시, 좌파 계열인 공화당을 지지했고, 대거 지원에 나서게   것이다. 이로써, 이제 스페인 내전의 양상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소련과 국민당을 지지하는 독일과 이탈리아간의 싸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까지 개발된 자국의 항공기를 투입시켜, 실전을 통한 데뷰의 장으로 삼기에 이른다. 

 

                                                                                                                                                    

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 ∼ 1973>

피카소는 끊임없는 열정과 샘솟는 실험정신으로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으며, 천재이자 미치광이인 동시에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모든 주제를 망라해서 다루었고 또한 거의 모든 양식을 시험하면서 현대의 전위미술의 모범이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작품’ – 게르니카 ( Guernica)

 

 

'게르니카'의 주축을 이루는 힘의 선들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 정면처럼 정확한 삼각형을 이룬다. 그 삼각형의 한가운데에는 상처 입은 말(馬)이 서있고 삼각형의 왼쪽에는 땅 위에 쓰러진 사지를 뻗고 있는, 부러진 단검을 든 전사(戰士)의 평쳐진 손과 소의 머리와 꼬리가 지나간다. 삼각형의 오른쪽에는 학살로 인하여 신들린 듯 자신의 몸을 이끌고 가는 거대한 여인에게 닿아있다. 이 첫째번 삼각형은 다른 또 하나의 두 번째 삼각형에 의해 지탱된다. 두 번째 삼각형의 정점은 빛을 쳐들고 있는 여자에 의하여 팔 끝에 들려진 심지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세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볼 수 있다. 왼쪽 폭에는 한 마리의 투우와 자기의 죽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절규하며 도망치는 한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폭은 불타버린 자기 집의 페허 속에 휩쓸려 가는 한 여인을 나타낸다. 이러한 형상의 분할은 잔혹한 단절과 함께 양식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저항적인 예술작품으로써 '게르니카'가 지니는 영속성은 죽은 전사의 팔과 머리가 보이는 왼쪽 하단 부분을 잘라내서 월남전 반대를 선전하는 포스터에 사용했던 미국인들의 예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림 ‘게르니카’의 왼쪽 부분

 

작품 왼쪽 상단에 자리잡은 무심한 표정의 황소는 피카소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동물이다. 참고로 피카소는 자신이 그린 투우 경기 장면들의 그림을 팔아서 번 돈으로 경기입장료를 낼만큼 열렬한 투우광이었다. '게르니카'의 황소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1935년 에칭 걸작인 '미노타우로마키'에서 이미 미노타타우로스를 선보였으며 그가 처음 유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말과 함께 벽화 등에서 주소재로 등장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의 미궁에서 젊은 여자를 제물로 삼는 파괴적인 희생자, 상냥한 유혹자나 사랑의 대상 테세우스라는 영웅의 이미지가 겹치는 것 등 작품 전체에서 여러 가지 자유로운 연상으로 혼합된 신화적 상징이 된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황소를 상징적 형태로 분석하고 있는데 피카소가 '게르니카'에 관해서 공개적으로 한 유일한 언급에서 황소는 잔인성과 암흑을 나타내며 말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간단히 말했지만 이 설명은 오히려 해명해주기보다는 혼란시킨다. 왜냐하면 황소는 피카소의 그림에서 자주 화가 자신의 분신으로 그려졌으므로 그것을 스페인의 파괴자들과 일치시키는 것은 설명될 수 없다. 또한 작품 전체의 대상물 중에서 가장 무심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이 황소는 그로 인해 오히려 극단적인 순수성과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한 파괴의 형상물인 것이다. 따러서 '게르니카'의 황소는 힌두교를 보는 의식의 이중적인 양면성을 표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의 중앙부분

 

작품 중간에 위치하는 말은 두 개의 커다란 극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그 중 한 극은 그 당시의 입체파적인 비전이 계속하여 구체화하고 있었던 존재와 사물들의 전혀 새로운 접근이며, 다른 한 극은 인류문명의 역사보다 더 먼 곳에서 오는 회고주의의 고풍스런 작업 방법이다. 1937년 5월 1일 그려졌던 네 번째 습작을 보면 마치 종이를 접어 만든 것 같이 빈약했던 엄청나게 큰 목을 비로소 쳐들게 된 것은 고통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하려는 피카소의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게르니카' 전작에 있어서 그 비극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구도의 왼쪽에 치우친 살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이다. 가장 비극적인 표현인 비명을 내지르는 어머니의 열린 입과 바로 그녀 위에서 포효하고 있는 황소의 아가리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어머니는 그녀의 희미한 형상을 밀어내려는 듯한 황소의 어두움과 일체가 된 듯 보인다.특히 어머니의 형상 전체는 아무리 입체파적인 제작 배경 속에서 그려졌다 하더라도 다른 소재들에 비해 휠씬 더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 비극성을 심화시킨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마의 머리카락, 눈썹, 속눈썹, 눈알, 콧구멍, 칼날처럼 굳어진 혀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못하다.

 


 

그림의 우측 부분

 

 

고대의 미술작품에서 달리는 말발굽 아래에 놓인 형상은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이러한 전형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말 아래에 자리잡은 부러진 칼과 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전쟁에 나선 전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패배한 투우사의 모습에 가깝다. 전작에 등장하는 유일한 남성인 그는 짓밟히고 쓰러져 만신창이가 된 채 패배의 길로 향하고 있던 당시의 스페인 역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작품 중간에서 상처 입은 자신의 몸을 넋이 나간 듯 이끌고 있는 여인은 그녀의 내적인 고통을 다소 과장해 드려내려 하고 있으며 오른쪽 끝에서 불길에 휩싸여 가는 여인과 함께 변명의 기회의 모두 박탈당한 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재난의 중심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그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는 자기 집의 페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여인은 신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뛰쳐들어가며 속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인이 쓰러져 있는 지붕 무너진 곳의 가장자리를 핥고 있는 불꽃은 그 여인을 삼키고 있는 거대한 어떤 턱의 이빨들로 설명될 수 도 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그 불꽃들의 숫자가 위에 네 개, 밑에 세 개라는 점인데 그 숫자들을 차례대로 합하면 7, 34 혹은 43이 되며 이는 악마론의 표준 수들과 일치한다.

 

특히 작품 전체를 비추는 횃불은 이성(理性)을 그것을 든 여성은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횃불에 비춰진 황소는 얼마간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장의 그림이 천 마디 말만큼의 가치가 있다.'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당시 스페인 내전과 한국전의 참상이.

여과없이 느껴진다. 

 

 

 

* Be yourself, http://roobi627.tistory.com/entry/%ED%94%BC%EC%B9%B4%EC%86%8C-%EA%B2%8C%EB%A5%B4%EB%8B%88%EC%B9%B4Guernica 

                                                                                                                                   

                   

                   


- 편집하는 말,   

     

월요일. 새로운 시작. 일과가 시작하자마자 회의를 소집했고, 또 다시 답답한 논의들을 이어가다. 결론이 뚜렷치 못하다. 또 논리가 부족하다 등등... 자신들에게 하고픈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이들을 보면서,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음을 새삼 절감하다. 그래도 원래 '비평하긴 쉬워도 건설하긴 어렵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함을 아는 이상, 크게 구애받지 않기로 하다. 오후. 나른해질 법한 시각. 2차 미팅이 곧 있겠고, 또 어쩌면 새로운 줄거리라도 들고 나설 법도 한가?

북한에서 DMZ에다 무슨 작업을 해놓았는지 온통 뉴스는 시끄럽고 하필이면 전직 대통령 영부인이 방북일정을 마친 게 불과 며칠전인데... 하며 의아스러운 눈길. 분단의 현실은 여러모로 자유로운 사상들을 옭아맨다. 여전시 전시상태다.

                                                                                                


- 블로그의 글,     

- 인터넷의 글,     

- 그밖의 말들,   


* 글, http://blog.daum.net/dante21                         

'- 잡동사니 > 뉴스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년 8월 12일 (수)   (0) 2015.08.12
2015년 8월 11일 (화)   (0) 2015.08.11
2015년 8월 9일 (일)   (0) 2015.08.09
2015년 8월 8일 (토)   (0) 2015.08.08
2015년 8월 7일 (금)   (0) 2015.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