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 <시인광장>, "2010 올해의 좋은시" (아인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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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들 /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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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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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신생" 2009년 가을호)
http://m.hani.co.kr/arti/culture/book/4976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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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몇차례나 빌려 읽었음에도 정작 이 동갑내기 시인 한명에 대한 구체적 관심은 그가 TV와 언론을 통해 널리 유명해진 다음이었으니, 이 또한 내 사대주의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다소는 복잡하면서도 '은유'와 '상징'이라는 시적 언어 특유의 문법을 구사함에 있어서는 '문지' - 문학과지성사가 꾸준히 내놓는 시선류, 일명 "시의 왕국"이 갖는 - 특유의 기조를 따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적어도 오규원의 "현대시작법" 이후로 모든 습작생들한테 이는 하나의 '그라운드 룰'쯤으로도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그러했듯이 시인의 말과 내용은 지루한 안온함과 자기도취적 향유는커녕 이 사회의 가장 불우한 또는 남루한 현실 가장자리들을 주목하고 있다.
용산을 노래한 그도, 세월호를 추모한 정호승도 당대의 대표시인 자리에 이름을 올린 건 단지 시대에 동참했다는 의미만으로 가능할 일은 아니다. 비명을 달리 했던 전직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도종환의 시낭송이 처연했다면 정호승의 슬픔은 육화된 형상화였고 심보선의 시선은 짐짓 관조적이기까지 한 분노다. 모든 종류의 정서는 객관화를 통해서 더욱 선명해진다. 시인이 철학자일 수밖에 없는 연유가 된다.
기실 이 시절만 해도 심사위원 (해마다 1편씩을 뽑는 관행은 여기에도 있어) 모두 그의 앞날을 더 의미심장하게 기약했다는 점은 그만큼 이 시가 현재화된 성취보단 잠재화된 재능을 더 발견케 만든 미덕을 갖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후자의 서툰 몸짓과 날선 언어들도 높이 산 편. 물론 어쩌면 이게 순전히 등단한 작가가 아닌 한낱 습작생으로서의 입장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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