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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9일 (월)

단테, 2014. 12. 29. 00:36

글 / 훌쩍 지나버린 마지막 주말           


- 오늘의 편지, 

           

  

     

[조운찬의 들숨날숨] 나는 왜 쓰는가  

   

   

2500여년 전 춘추시대 때의 일이다. 노 나라의 숙손표와 진 나라의 범선자가 '죽어서도 오래 남는 것(不朽·불후)은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범선자는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귀족으로 이어졌음을 들어 "집안이 대를 이어 현달하고 제사가 끊이지 않은 게 '불후'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숙손표는 즉각 반격했다. 대를 이어 벼슬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을 '불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신 덕을 쌓는 '입덕(立德)', 공을 세우는 '입공(立功)', 문장을 남기는 '입언(立言)'의 세 가지를 꼽았다. '삼불후(三不朽)'가 바로 그것이다. <춘추좌전> 양공 24년조에 전하는 이야기다.

   


 

죽어서도 오래도록 남는 덕을 쌓거나 공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천운이 받쳐줘야 한다. 반면 입언은 개인의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5000년 중국 역사에서 입덕자와 입공자로 꼽히는 인물은 황제, 복희, 요·순 임금, 우왕, 주공, 공자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입언한 사람은 적지 않다. 노자, 장자, 맹자, 관중, 손자, 굴원, 사마천, 반고 등 불후의 작품을 남긴 이들은 모두 '입언'을 이룬 자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최선의 방법으로 입언, 즉 글쓰기를 꼽았다.


전통시대의 글쓰기는 '입언'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됐다. 글깨나 아는 선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개인 문집을 남긴 것은 이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는 죽은 뒤에 이름이 세상에 남지 못할까 걱정한다"(<논어> '위령공')고 했는데, 옛사람들이 이름을 남기는 최상의 방법은 다름 아닌 글쓰기였다. 글쓰기가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천정환 교수가 최근 해방 이후 잡지 123종의 창간사를 묶어내면서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천 교수는 "잡지를 창간하는 일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퍼뜨리고 싶다는 욕망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1984년>의 작가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글쓰기의 욕망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남에게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어 글을 쓰는 부류이다. 오웰은 이러한 글쓰기는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최상층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남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욕구이다. 예술가나 여행자의 글쓰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이다. 진실을 밝혀 후세에 전하려는 욕망이다. 기자나 다큐멘터리 작가의 글쓰기가 이 범주에 속한다.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이다. 글쓰기를 통해 남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이다. 신문의 칼럼, 팸플릿, 평론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정치적'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모든 글쓰기가 정치적 목적을 띤다고 할 것이다.


글쓰는 욕망이 오웰의 구분대로 나뉘지는 않을 것이다. 글쓰기의 동기가 오웰의 범주로 포괄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때론 오웰이 말한 두어 개가 겹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에 앞서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의식이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목적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공허하다. 목표가 확립됐을 때 쓰고자 하는 글과 책의 주제가 명료해진다. 논픽션 작가인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글의 형식에 따라 쓰기를 안내하고 있다. 형식은 내용과 방법까지 규정한다. 인터뷰와 여행기는 다르게 써야 한다. 인터뷰가 사람에 대한 글쓰기라면 여행기는 장소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회고록이 삶을 추억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글이라면 비즈니스 글쓰기는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실용성을 앞세워야 한다. 당연히 글쓰기는 주체에 따라,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세월호 유족에게 글쓰기는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하는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쓸 수도 있다. 종교인에게 글쓰기는 수양의 방법이고, 사상가에게 그것은 사유를 길어내는 작업일 수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새해 경향문예아카데미의 첫 프로그램으로 글쓰기 강좌를 마련했다. 강좌는 초보자, 청년·대학생, 직장인, 은퇴자, 여행자 등에게 맞춤형 글쓰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들이 먼저 준비할 일은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글쓰기가 이루어지려면 생각이 정립되어야 한다. 글쓰기는 생각쓰기이고, 생각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조운찬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 미디어다음, http://media.daum.net/editorial/newsview?newsid=20141226210807296  

                                                                                            


- 편집하는 말,   

      

토요일 새벽에야 일기를 쓰게 되더니... 이틀이 꼬박 지난 월요일 새벽에야 다시 한편의 일기를 위해 비로소 넷북 앞에 앉을 수 있게 된다. 딱 이만큼의 내 일상에서의 여유일까? 아니면 내 게으름과 목적없는 여정의 무료함과 맹목성에 대한 어떤 시그널 내지 경고일까... 아무튼 그렇구나, 

  

도서관에서 인터넷 관련 책들을 몇권 빌렸는데... 그 와중에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만화책을 두어권 더 가져왔다. 세밑에도 여전히 무언가 해볼 요량인데, 

        


- 블로그의 글,     

- 인터넷의 글,     

- 그밖의 말들,   


* 글, http://blog.daum.net/dant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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