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25년만에, 도로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 투쟁의 유월,
오늘의 편지,
[특별기고] 갈 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말자 / 홍세화
[한겨레]아! 이 글을 쓰는 중에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통보한 정부 처분이 정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 땅에서 노동의 권리는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갈 길이 멀다는 걸 절감한다. 하지만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일까, 이제는 신문 지상이나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들의 표정을 보는 일조차 식상하다. 인사청문회 덕일까, 전횡으로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게, 그리고 후보자들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결말지어지는 스펙터클을 멈출 날은 언제쯤 올까?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귀국하기 전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나?"라는 내 물음에 대한, 프랑스의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한 교수의 거침없는 대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반역사적 역사관을 드러낸 문창극 총리 후보자 때문만이 아니다. 강자의 논리에 기댄 그의 언설은 6만여 조합원 중에서 9명의 해고자가 있다는 이유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법외노조로 통보한 박근혜 정부의 막무가내와 힘의 논리만을 따른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에 있다. 국제적인 보편규범을 모른 체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노동 탄압에 앞장서면서 '비정상의 정상화'를 운운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가 기억투쟁을 게을리해선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잊기 때문인데, 후보 시절 "증세하여 재원을 늘리지 않고 어떻게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냐?"라는 문재인 후보의 질문에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아닙니까?"라고 응수했던, 그리고 당선에 성공한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에게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게 규제에 대한 적개심이다. 그에게 모든 규제가 암 덩어리에 불과하듯이, 이 땅의 사회귀족이 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은 절제를 저 멀리 내던지는 데 있다. 탐욕의 추구, 경쟁과 효율을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신의 구현이다. 자본에게 그것이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를 뜻한다면, 개인에게 그것은 "명리는 나에게, 책임과 윤리는 개에게나"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자본의 끝없는 이윤 추구를 위해 구성원들의 안전을 비롯한 공공성의 요구로 사회에 적용돼온 규제를 없애야 하듯이, 입신출세를 목표로 하는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가져야 할 덕목의 하나인 절제를 버려야 한다. 2기 박근혜 정부를 구성할 새 총리와 교육부 장관, 안전행정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교육수석 내정자를 비롯한 인물들에게서 예외 없이 드러나는 뻔뻔스러움이나 구림은 우리 사회에서 절제의 미덕이 사라졌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실상, 그들이 부끄러움 없이 웃는 표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두려운 진실을, 또 이 땅에 사회귀족 체제가 그만큼 견고해졌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들의 특징은 사회 각 부문에서 군림하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점이다.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려도 계속 찍어주고 지지해주고 선망하고 따르는데 왜 그런 거추장스런 의무를 스스로 지겠는가.
동양에서 미덕의 하나로 존중되었던 절제는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강조되어 왔다. 이 절제는 세 방향에서 작용한다. 각자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되는 자기절제, 상호 견제와 비판에 의해 작용하는 절제, 그리고 민중의 비판력으로부터 작용하는 절제가 그것이다. 가장 고급한 자기절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령 언론이 정치권력을 비판하거나 학문이 언론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행위자들에게 절제하도록 작용하는 것이 횡적 견제에 의한 절제라면, 투표 등의 행위를 통하여 당선 또는 낙선시킴으로써 위정자들에게 절제하도록 작용하는 것을 민중의 비판력에 의한 절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방향의 절제는 따로 작용한다기보다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작용한다.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부 없다"는 토크빌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민중의 비판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여기서도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기계적으로 따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경구는 그대로 적용된다.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이 결코 중립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자의 논문을 표절하거나 가로채고 연구비를 착복하는 '교육'계 인사들이 횡행하는 현실은 약자의 몫을 빼앗는 갑을관계가 어디까지 왔는지 허탈감마저 안겨준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짚어야 할 점은 그들에게서 절제를 기대할 수 없는 게 그들만의 탓이라기보다 사회부문 간 횡적 견제와 특히 민중의 비판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서 온 귀결이라는 사실이다. 행정, 사법, 언론, 기업, 학문, 종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횡적 견제는 사회귀족들 사이의 유착과, 지연, 학연, 혈연 등의 연고주의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상호 비판이나 견제가 이루어지는 대신 부패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자신처럼 부패한 사람과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동패를 이루면서 청렴한 사람을 멀리하거나 조직에서 내쫓는 데 힘을 모은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셤의 법칙이 적용되는 현실은 그 무엇보다 민중의 비판력이 취약하다는 서글픈 진실의 반영물인 것이다. 권력이든 자본이든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때(루소가 일찍이 말했듯이, 민중은 4년이나 5년 중에 투표하는 하루만 자유롭다), 없는 사람이 기득권 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오히려 걱정해준다면 왜 그들이 절제의 미덕을 가지겠는가.
한편, 우리는 염치나 절제 없이 명리만을 좇은 인물을 비난할 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일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 그들처럼 되지 못한 것일까? 사회 안에 절제의 미덕이 살아 숨쉬지 않을 때, 나만큼은 절제를 지킬 것이라는 확신은 대개 절제할 거리나 기회조차 없는 사람의 몫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관건은 사회 환경과 세력관계에 있다.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다. 이 점을 주류 지배세력이 더 잘 알고 있다. 조선, 동아를 비롯한 수구언론이 전교조를 부정하고 붉은 색깔을 입혀 깎아내리는 데 부심해온 점이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것에 큰일이나 난 듯이 호들갑을 떨며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은 세력관계 형성에서 교육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던 세력관계에 작은 변화라도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다.
아! 이 글을 쓰는 중에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통보한 정부의 처분이 정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전교조가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낸 법외노조 통보 취소 소송에서 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률이 아닌 시행령만으로 내린 법외노조 통보가 적법하다니… 이 땅에서 노동의 권리는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금 절감한다. 하지만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는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데 있다. 실상 세상이 혐오스럽다고 개탄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개탄을 넘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분노를 넘어 참여하고 연대하고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모두 설득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홍세화 <말과 활> 공동발행인
이재정·이청연 교육감 '교육 변화의 열망'을 나누다 [한겨레담 특집]
* 미디어다음,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40619184008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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