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오늘의 편지,
첫사랑이 맴도는 인생속도 ‘초속 5센티미터’
[한겨레][토요판] [TV +] 김성윤의 덕후감
세상에는 재현할 수 있는 게 있고, 재현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나의 가벼움, 나의 비열함, 나의 추악함. 멋들어진 나와는 정반대되는 모습들. 밤새도록 토해내고 싶지만 도저히 게워낼 수 없는 역겨운 면모들. 아무리 목구멍 속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봐도 나오지 않으려 하는 지독한 녀석들. 그런가 하면 정말 조금씩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나의 폐부와 모든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
나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하고 싶으면서도 너무나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일이다. 때로는 이러저러한 기술들로 글 곳곳에 나를 숨겨 넣기도 하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타협책에 불과하다. 나를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철저하게 나 자신을 지키는 일. 내 인생은 그런 기술을 연마하도록 정해져 있었나 보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딱 한 사람을 위해 해본 적이 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었음을 알았으면서도 나는 무척이나 어리석었다. 그저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너무나 어렸다. 그 사람의 풍미에 비해 나는 너무나 소인배였다. 나 자신을 위해 허락된 변명이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난 아마도 지극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끝도 없는 자기 연민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몇 번이나 같은 공간을 밟았을까. 어쩌면 그중에 한번쯤은 스치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딱 한번 그럴 기회가 있었다. 그저 우연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명민한 나는 그 기회를 미리 알아버렸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 물론 그때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여전히 나는 도망치는 중이었던 셈이다. 차라리 그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고 확인하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정말이지 나는 만에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스무살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이 사람을 아낀다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빼면 나란 사람에게 청춘은 없다. 이 이상 뭘 더 잃어야 하는 걸까. 기억에 발이 묶여 있는 기분. 그리움. 평생의 괴로움.
요즘의 나는 완전히 열정을 잃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어머니를 제외한다면 삶의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동력도, 어떤 동기도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몇몇의 친구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던 걸까. 처음에는 그냥 슬럼프로만 여겼고, 그녀와 이별을 하면서는 다행히 한 줌의 노기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나약할 대로 나약한 마음에 평정을 찾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더 공허해지고 말았다.
지금 내 수첩은 텅 비어 있다. 무엇인가 잔뜩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딱 한번…. 그렇지, 시간이 너무 느리다.
… 이상은 얼마 전, 일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쓴 일종의 '자뻑' 일기이다. 요즘 <건축학개론> 덕분에 아련한 첫사랑 등등이 회상되는 모양인데, 생각해보면 30대 초식남 노스탤지어 판타지를 자극하는 비슷한 계열의 대중예술 작품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초속 5센티미터>도 대표적인 작품이고.
<초속 5센티미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사랑과 아련한 추억을 쌓게 되는 1부, 볼 수 없는 첫사랑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2부, 성인이 되어 무의미한 삶에 지쳐가는 3부. 그런데 이 애니도 그렇고 같은 계열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고, 기억이란 왜 그다지도 이기적인 걸까. 2부와 3부에서처럼 내가 누군가의 '썅놈'이었던 사실은 쉽게 망각되니 말이다.
4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 미디어다음, http://media.daum.net/entertain/culture/newsview?newsid=201204131950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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